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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최종 변경일자: 2015-04-10 14:06:23 Contributors

역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11대 공희 토리노 대주교 12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13대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대 천주교 마산교구장
초임 초대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 2대 병화 요셉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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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표어는 PRO VOBIS ET PRO MULTIS(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1]].

목차

1. 개요
2. 생애
3. 선종과 그 이후
4. 평가
4.1. 어록
4.2. 뜬금없는 친일파 의혹(?)
5. 기타

1. 개요

김수환(金壽煥)대한민국 최초의 가톨릭 추기경이다. 세례명스테파노(Stephen Kim Sou-Hwan)다. 선종 당시 역대 추기경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추기경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언제나 양심적이고 용기있는 행동으로 독재 정권에 맞섰으며, 국내 비정치인 중에서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인물 중 한명이었다. 근대 한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 중 극히 드문 영구까임방지권을 받은 인물이며, 진정한 종교인이다.

2. 생애

1922년 대구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경북 군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조부 김보현은 가톨릭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관군에게 잡혀 순교한 인물이다. 어머니의 강요(?)로 자신의 형과 같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동성학교 재학시절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소감을 쓰라."는 지시에 "난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 없음."이라고 썼다가 당시 교장이던 장면(후일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이 노발대발하며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 나이도 어린 김수환 학생이 일본인들과 경찰들에게 해코지와 탄압을 받을까봐 우려하여 일부러 그런 것이었고, 결론만 따지자면 장면이 김수환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다. 나중에 김수환이 일본 유학을 갈 때, 장면이 추천서를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서품을 받은 뒤에 어머니와 찍은 모습

죠치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하던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와중에도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독일인 신부에게 감명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당시 김 추기경의 은사였던 독일인 신부 테오도르 게페르트는 해방 후 한국에 건너가 서강대학교의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김 추기경은 2002년 게페르트 신부가 선종했을 때, 직접 장례미사를 주례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설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해방을 맞이해 무사히 귀국, 그때부터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안동 목성동성당 주임신부를 시작으로 대구대교구청, 김천 황금동성당 주임신부, 성의중고교장 등 대구대교구에서 근무했다. 1956년 독일 스터 대학 유학을 거쳐 서품 15년만인 1966년 주교로 서품되어 그 해 신설된 마산교구장에 임명되었다.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지 2년만인 1968년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 겸 (명예직인)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당시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들이 "저 듣보잡 주교는 뭘 했길래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하였느냐"(…)며 바티칸에 항의하기도 했지만, 교황청은 호구가 아니었다. 마침내 1969년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그리고 당시로서는 전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이 되었다(47세). 그리고,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소명여자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군사정권 시절 당시 추기경으로서 많은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으며, 이를 견디다 못한 전두환 대통령은 추기경을 해임하라는 압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이게 얼마나 무식한 짓인지는 뭐…. 그리고 이후 전두환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당시 뒷짐 조문으로 욕을 먹기도했다.

대통령의 추기경 해임 압력에 당시 교황청은 당연히 거부했다. 그리고 전두환 시절의 교황은 조국 폴란드에서 공산당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경력이 있던 요한 바오로 2세.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난다.

김수환 추기경이 6월 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피신해있던 시위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음날 공권력이 투입될 것임을 통보하러 온 정부 고위 관계자에게 한 말이다. 글로 적어놓으면 상당히 비장한 분위기일 듯 싶지만, 당시를 회고하는 인터뷰에서는 마치 "주말에 성당에 나오시면 늘 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냥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고 한다. 최후통첩 분위기를 내며 김 추기경을 협박하려 했던 정부 측으로서는 대꾸할 말이 생각 안날 대략 난감한 상황이었으리라. 아래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발언이 나온 강론 육성을 들어보면 당시의 어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6월 항쟁은 전두환 정권이 망하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1998년 정진석 대주교(후에 추기경이 됨.)를 후임으로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서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사회활동을 계속해 왔으며, 2004년에는 사제급 추기경 수석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제프 라칭어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후 다른 추기경 2명과 함께 즉위 미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3. 선종과 그 이후


주여, 추기경 스테파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경,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선종했다. 선종 당시 최장기간 재임 추기경이었다. 향년 88세. "그동안 많이 사랑 받아서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수환 추기경의 무덤

장례는 당초 서울대교구장으로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비록 자신이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정진석 추기경을 특사로 임명하여 교황장(엄밀히 말해서 '교황장'이란 용어는 없다)으로 격상해서 치렀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뤄졌으며, 선종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조문 기간 동안 약 40만명의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줄서서 조문하였다. 이 때 단 한 번도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시신은 경기도 용인의 사제 묘역에 안치되었다. 묘비에는 추기경의 사목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시편 23편 1절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가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직접 묘비명으로 부탁한 구절이다.

선종할 때 을 기증해서 2명의 환자에게 각막을 이식했고, 그 영향으로 추기경을 따라 각막과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하는 사람이 폭증했다. 특히 선종 이후 1주일 간은 각막 기증자가 너무 많아 장기기증운동본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이렇게 하지 말고 꾸준히 좀….

서점가에는 추기경과 관련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추기경의 자서전을 포함해 이미 절판된 책들도 수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재판되었다. 이러한 열기는 선종 1주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는데, 이 와중에 한 출판업자가 무단으로 서울대교구의 이름을 빌려 추기경 관련 서적을 출판하였다가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추기경이 안장된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는 일 평균 800여명이 다녀간다.

4. 평가

4.1. 어록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인사와 시민들을 보호하며 날린 명언폭풍간지 그 자체.

  • 암살당한 박정희 장례 미사에서 "인간 박정희가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날렸다. 유신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인 1971년엔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성탄 미사에서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라는 연설을 했다 방송이 중단되고 이후 박정희에게 힐난을 받기도 했다.(영상) 짧으면서도 임팩트 있는 한 마디 "박정희 당신은 아는가" 역시 성탄미사 생중계 중에 한 말이라고 한다.

    다만 김수환 추기경과 박 대통령의 사이가 험악할 정도로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 훗날 "종이에 4대강을 그려가면서 몇십 년은 족히 걸릴 법한 개발 계획을 설명해주는 그분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 독재 체제로 갈 것임을 예견했다. 다음날 혼자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무척 우울했다.(중략)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장기 집권 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진정한 애국자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김 추기경은 당시를 회고했다.[2] 결국 김 추기경은 '나 아니면 안된다'는 독선이 장기집권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와 국민은 물론 박 대통령 개인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며 그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비판했다.

  • 제5공화국 때에도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 군 추모미사를 봉헌하면서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면서 당시 고문 혐의를 부인하던 당국자들을 향해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고 일갈함으로써 공권력을 꾸짖기도 했다.

"오늘 미사의 제1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려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3]

이 사건은 5공 정권에 대한 범국민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종말을 고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 육성.

  • 장준하의 영결미사에서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 뿐입니다"라고 했다.

  •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당시 검찰과 경찰이 사건을 묻고, 피해자인 권인숙을 오히려 혁명을 위해 성(性)까지 도구화하려는 파렴치한 인물로 몰자, "나는 권양과 변호인단의 증언을 진실이라고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톨릭 내에서도 상당히 정의 의식이 강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인물이여서 당시 민주주의 세력이 독재정권에 대항하면서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참 종교인답게 다른 종교도 천주교와 동등하게 존중해주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감명깊게 읽고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였다. 2000년 성균관에서 수여하는 심산상을 수상했다. 심산상은 20세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성균관대의 창립자인 심산 김창숙을 기념하는 상. 관례에 따라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 자리에서 주저없이 절을 하고 음복을 하기도 했다. 추기경은 "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천주교가 조선 시절의 혹독한 박해[4]를 받아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유교와는 역사상으로 악연임을 고려할 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김창숙 묘소 참배는 일종의 종교간 화해로 해석되기도 했다.

권위의식도 없었다고 한다. 한 대학교 동아리에서 운동회를 하려고 강당을 빌릴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동아리 내의 가톨릭에 대해 무지한 한 학생이 성당에 강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성당에 가서 무작정 추기경실로 들어가서 강당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은 당당한게 좋다며 즉각 승낙했고 후에 그 학생은 추기경이 얼마나 높은 직책인지 깨닫고 놀랐다고 한다.

또 어떤 여대생이 한국의 유명인사에 관련된 인터뷰 과제의 상대로 김 추기경을 만나뵙기 위해 찾아갔다가 한 사제에 의해 문전박대당하자 화가 나서 한소리 해 주었는데, 당황한 그 사제는 김 추기경한테 돌아와서 얘기했다가 되려 혼만 나 버렸고 김 추기경이 직접 그 여학생을 만나서 아까의 무례에 대해 사과한 다음 인터뷰 요청을 수락해주었다고 한다. 후에 그 여학생의 과제는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문전박대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여학생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또 독일 유학 시절 공부하랴 강의 듣느랴 논문 쓰랴 이렇게 바쁜 와중에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어려움에 대해 알게 되면서(주로 언어문제, 송금문제, 기타 잡다 등등) 그들을 위해 어런저런 어려운 일들을 같이 처리해 주었는데, 한국에 돌아갈 때가 되자 광부와 간호사들이 슬퍼하면서도 그를 잘 전송해주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김 추기경은 사회 바깥의 어려운 이웃의 존재를 결코 잊지 않는다고 한다.

4.2. 뜬금없는 친일파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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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의 사진. 왼쪽에 있는 분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총장을 역임한 故 전석재 신부.

제2차 세계대전학도 특별지원병 제도강제적으로 징집된 일본군 장교였던 경력이 있다는 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사실 김수환 추기경은 사관후보생으로 강제징집되었는데 장교 교육과정에서 탈락되어 병사로 일본군에 복무하였다.문제는 일반 사병과 달리 장교 진출은 본인이 직접 지원하는 것이었다는 점..홍사익 등등 자원입대해 들어간 사람들 꽤 많다.

사실 예전에 자서전에도 기술했던 사항이 21세기에 다시 불거진 것인데, 그 당시 친일인명사전을 제작 중이던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가 애초에 수록 대상자에 미달되었음에도 이례적으로 해명 자료를 내서 친일파가 아님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이 틈을 타 심지어 김수환 추기경이 기회주의자 및 매국노라는 주장까지 했다. 거기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시 어떤 커뮤니티에서는 악플이 숱하게 달리는 한심한 짓거리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진중권 교수는 진보신당 게시판에서 위의 예를 들며 이들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은 군사독재정권에 가장 용감하게 맞서 싸우고, 그런 행위가 목숨을 걸어야했을 때 아낌없이 목숨을 내건 사람이다. 물론 당시 시대상황과 조건에서 김추기경이 다른 사람들보다 유리한 입장이기는 했다. 전두환 본인도 당시에는 천주교 신자였기에 추기경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 건 좀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수환 추기경이 위험을 무릎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추기경에겐 바티칸 시민권을 준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정권의 음모에 의해 순교한 성직자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도 이런 사태를 조금이라도 막고자 시민권 부여조항을 만든 것이다. 비록 타인에 비해 상대적인 위험은 낮았지만, 절대수치에서 보자면 김수환 추기경 역시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사람이 일제 때 같은 엄혹한 시절에 강제로 징집되어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기회주의자나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어디까지나 강제적으로 징집되었다.[5] 자발적으로 나라를 팔아먹고, 권세를 누렸던 여타 친일파들과는 천지차이로 다르다. 비록 사관후보생으로 징집되기는 했지만, 결국 훈련과정에서 낙오하여 장교로 임관을 하지도 못했으며, 다시 밑바닥 계급인 병사로 재징집되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김수환 추기경처럼 일본군으로 강제징집된 조선인 청년들도 매우 많았으며, 사실상 총알받이, 카미카제 특공대로 징집된 사실이 매우 많았다. 당시의 일본군은 구타가혹행위가 일상다반사였고, 만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미친 놈들처럼 반자이 어택을 하던 막장 군대였다. 일단 졸병도 아니고 장교를 사실상 강제징집으로 뽑는다는 것부터가 제대로 된 군대와는 몇 광년 격차가 있다. 결국, 김수환 추기경도 여느 강제징집된 조선인 청년들처럼 언제 살벌한 전쟁터로 내몰려 개죽음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총알받이 신세였다.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는 퇴임하신 전임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있다. 베네딕토 16세도 강제로 히틀러 유겐트에 징집이 되었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에게 나치 운운하는 것은 엄청난 결례이다. 실제로 베네딕토 16세의 가까운 친척들이 나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었다.

5. 기타

1995년 9월 24일에 방영된 열린음악회에서는 애창곡으로 등대지기를, 앙코르곡으로 애모를 불러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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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미사 경본의 감사기도(prex eucharistica)에 나오는 경문으로 1996년 이전에는 '많은 이를 위하여'로 번역했다.
  • [2] 출처 -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신문 엮음.
  • [3] 당시 미사의 제1독서였던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 사건에 비유한 것.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 창세기 4장 9절
  • [4] 상기했둣, 김수환 추기경의 조부도 병인박해 때 순교하셨다.
  • [5] 추기경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전쟁말 분위기가 극히 흉흉했고, 미사 중인 성당에 일본군이 총을 들고 들어와 강제징집해갔다고 한다. 이 때 추기경은 이 쯤 되면 내가 군대를 가는 것이 신의 뜻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고. 자세한 내용과 출처 추가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