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김일

최종 변경일자: 2015-04-08 21:36:14 Contributors

목차

1. 프로레슬러 김일
2. 성우
3. 북한의 군인, 정치가
4. 마의태자의 본명


1. 프로레슬러 김일


金一(1929~2006)
한국의 프로레슬러. 박치기왕이란 별명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프로레슬링계의 전설, 필살기인 헤드 버트(박치기)가 유명하다.

젊은 시절에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역도산의 제자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오오키 킨타로(大木金太郎)라는 이름으로 활약했으며 박치기를 필살기로 삼았다. [1][2]

워낙 박치기 임팩트가 강해서 얼핏 막싸움꾼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은 다채로운 관절기를 구사하는 테크니션이었다. 한때 '피겨 4 레그록'과 독특한 관절기 'X 굳히기'를 피니시로 쓰기도 했다.

통설에 따르면, 박치기는 역도산이 직접 "넌 조선인이니까 박치기를 해야지"하고 조언해줘서 수련했는데 훗날 역도산은 이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일이 쓰는 박치기는 모션이 독특한데, 상대 머리를 붙잡아 고정시킨 뒤 한발을 들고 몸을 뒤로 젖혔다가 들이받기 때문에 외다리 박치기(一本足頭突き)라 부르기도 쓴다. 또한 이런 체중이 잔뜩 실린 박치기의 파괴력은 지금 봐도 식겁할 정도라, 원폭 박치기(原爆頭突き)란 별칭이 붙었다.

경기중 들어가는 원폭 박치기의 위력은 무시무시하다. 그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언트 바바가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을 정도. 세번째까지는 버티더라도, 계속해서 들어가는 박치기에 점점 무릎을 꿇는 식이다.

전성기 때는 일본 레슬링계에서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등과 함께 3대 거물로 손꼽혔다. 하지만 역도산 사후에 일본 프로레슬링계가 분열하고 재편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여러 단체를 전전한 탓에 일본에서는 입지가 많이 줄어든다.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이탈한 안토니오 이노키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으로 독립하여 나가고, 또 다시 이탈한 자이언트 바바가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독립하여 나가는 가운데, 김일은 본래 역도산의 단체인 일본 프로레슬링을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일본 프로레슬링은 방송권을 전일과 신일에게 모두 빼앗겨버린 상태라 TV중계가 전혀 되지 않았고 빠르게 몰락하게 되었으며, 김일의 독자 노선은 성공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 프로레슬링이 완전히 몰락하자 전일본, 신일본, 그리고 제3의 단체인 국제 프로레슬링 등을 전전하며 경기를 가졌지만 그다지 탄력을 받지 못하고 서서히 몰락하게 된다.

다만 일본 레슬링계에서도 원로 레슬러로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고 있어서 말년에는 은퇴식을 가지기도 했다.

1106313725.jpg
[JPG 그림 (Unknown)]


한국 프로레슬링에도 진출한다. 본래 한국 프로레슬링은 역도산의 TV중계를 보면서 자생적으로 프로레슬링을 시작한 국내파 선수들로 시작해서 어느 정도 터를 닦아놓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김일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왔다는 걸 잘 몰랐기 때문에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 김일 이전의 한국 프로레슬링의 양대 거성이었던 영철천규덕 가운데 천규덕은 김일과 협력하게 되었으나 영철은 완전히 김일과 척을 지고 말았다.

이 때 장영철도 자존심을 세울 법한 것이 장영철은 원래 마추어 레슬링을 하던 정통파 레슬러였고, 공칭 100명이라 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제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초창기 몇 년 간은 장영철이 백지에서 프로레슬링 판을 혼자서 닦아 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영철 입장에서는 충분히 김일이 '굴러들어운 돌'이라고 여길 만했다.

당시 김일과 장영철의 대립은 심각한 수준으로 장영철이 단체를 따로 만들어 나가버리고, 장영철 파는 김일 계열과는 아예 시합도 가지지 않을 정도였다. 장영철은 본래 같이 경기를 하던 천규덕과도 사이가 틀어져서 급기야 천규덕과 장영철이 워크없이하는 실전 대결을 벌이게 되었지만, 서로 차마 제대로 공격하지 못해서 흐지부지 되는 일 까지도 있었다.

해외 인맥이 미흡했던 장영철 계는 점점 도태되었으며, 김일은 지속적으로 흥행을 벌이면서 한국 프로레슬링계의 대부격인 존재가 되었다. 암울한 한국사회에 희망을 주었던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자기보다 덩치가 큰 미국 선수나 일본 선수를 상대로 싸웠기 때문에 인기가 더욱 좋았다. 이것은 전후 일본에서 미국의 거한 프로레슬링 선수들을 초청하고 쓰러뜨려서 흥행한 역도산의 경영 전략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것이다.

여담으로 김일은 일본 프로레슬링 쪽으로 인맥이 많이 있었고, NWA 한국지구 프로모터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 지금에야 NWA가 듣보잡으로 전락했지만 당시는 미국의 대표적인 프로레슬링 조직이었다. 현실적으로 해외 선수를 이용한 흥행을 벌이려면 김일이 없어서는 안 되었을 듯하다.

그 덕분에 그는 전용 체육관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중구 정동에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로부터 체육관을 얻어 '김일체육관'으로 불려졌으나, 10.26 사태로 박정희가 피살된 후 전두환에게 전용 체육관을 빼앗기고[3][4] 답십리에 - 지금의 서울도시철도공사 본사 부근에 전용 체육관을 얻었다. 그러나 레슬링 인기 퇴조에 따라 나중엔 스탠드바로 개조되며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현재는 경남기업 사옥으로 쓰이고 있다.

말년에 TV에서 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몇 번 나왔는데, 젊었을 때 워낙 혹독하게 훈련한데다 박치기를 하며 단단한 물체에다 대고 허구한 날 연습한 나머지 두개골도 상처가 크고 거동이 많이 불편했다고 한다.

은퇴 후 건강과 재산을 잃어가는 와중에 사기를 몇 번 당할 뻔했으나, 오죽하면 자기같이 가난한 사람 털어먹겠느냐고 넘어간 일이 몇 번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WWE 레슬링 로(RAW)가 방문했을 때 당시 특별 게스트로 관중석에 앉아 시합을 관람하기도 했다.

병사로 인해 자기자신이 말년에 꾸었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2006년 2월, 1965년 '프로레슬링은 쇼다' 사건 이후 완전히 갈라섰던 전 프로레슬러 장영철[5] 을 직접 찾아가 그간에 쌓인 넋두리를 풀어내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두 사람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장영철은 그 해 8월, 김일은 두 달 후 10월 세상을 떠났다.

소중한 날의 꿈에 경기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타이거 마스크에는 당시 그가 일본에서 뛰고 있었던 만큼 일본식 이름인 오오키 긴타로로 출연한다.

현재 한국프로레슬링연맹의 대표이자 한때 백재현의 프로레슬링 사부로 유명한 이왕표가 그의 애제자.

한국 프로레슬링을 이끈 주역이자 한국 프로레슬링 그 자체였던 스타였으며, 아직도 한국 프로레슬링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김일옹밖에 기억 못하시는 경우도 있다. 알아봤자 천규덕옹과 영철옹 정도. 그마저도 "김일이 최고였지, 천규덕이랑 장영철을 쨉도 안됐어" 정도. 한국 프로레슬링의 몰락마저도 김일을 대체할 스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게 정설이다.


2. 성우

김일(성우) 항목 참조.

3. 북한의 군인, 정치가

김일(북한) 항목 참조.

4. 마의태자의 본명

상세는 항목 참조.

----
  • [1] 사실 김일은 세계 프로레슬링 역사에 자기 이름 두자 뚜렷이 남긴, 보통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프로레슬링 역사의 거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계에 남긴 그 이름은 대개 오오키 킨타로로 남아있다. 일본은 물론이고 서양 프로레슬링 골수 덕후들은 대개 오오키 킨타로는 알아도 김일은 모른다. 일본 프로레슬링은 여전히 메이저하지만 한국 프로레슬링은 현시창으로 쇠퇴한 것을 생각해보면 바꾸고 싶더라도 바꿀 힘이 없는 씁쓸한 현실.하지만 김일은 일본 이름을 쓰면서도 한복을 입고 링에 등장하는 등 나름대로의 노력은 했다
  • [2] 사실 역도산, 최배달, 김일 등 일본 격투기계의 레전설 중에는 한국인이 많다. 그러나 현재 세계 격투기계에서 그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격투가들로서 더 유명하다. 애초에 활동무대가 대부분 일본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안습.
  • [3] 그 체육관이 바뀔 당시에는 옛 문화방송 사옥(현 경향신문 사옥)이 있던 관계로 '문화체육관'으로 개칭되었으며, 이 체육관은 후일 정동이벤트홀로 바뀌게 된다.
  • [4]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프로레슬링의 팬이라 매번 경기를 관람했는데 옆에서 같이 있던 전두환이 "이런 쇼를 왜 봅니까?" 라고 물었다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5] 그래도 김일은 생전에 제자들도 많이 오고 일본에서도 제자들이나 옛 팬이 돕기도 하는 등, 관심이라도 많이 받았으나 장영철은 이 발언하고 은퇴하면서 아주 매장되었다. 사업도 연이어 말아먹고 늘그막에는 온갖 병에도 시달리며 생활고로 찌들려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