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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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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김씨 왕국 북한국왕 국가 원수 怨獸[1]
1대 2대 3대 4대 5대
김두봉 최용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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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13.36 KB)]

목차

1. 북한의 초대 황제독재자
1.1. 개요
1.2. 상세
1.3. 가족관계
1.4. 한국전쟁 도발
1.5. 숙청의 달인
1.6. '태조' 김일성
1.6.1. 신격화에 이른 독재
1.7. 사망
1.8. 이야기거리
1.8.1. 김일성 가짜설
1.8.2. 김일성 암살설
1.8.3. 족보 집착증
1.8.4.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1.8.5. 사상
2.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라고 사주한 사람

1. 북한의 초대 황제독재자

1.1. 개요

金日成. 1912.04.15~1994.07.08. 본명김성주. 일제강점기때 잠깐 항일운동을 했지만[2] 해방을 맞자마자 권력을 장악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사이비 종교 교주 & 희대의 독재자로 변신해서 지금의 가난하고 폐쇄적인 북한을 만든 원흉.

북한에서의 최종적인 공식 직함은 영구 국가 주석. 그리고 농업국가로 전락할 뻔했던 일본을 경제 강국으로 만드는 데에 아주 크게 기여했으며,[3] 대만장개석을 살렸다

1.2. 상세

1937년 6월 4일, 박달과 박금철[4] 등의 동지들과 잠깐동안 보천보 마을 점령(보천보 전투)으로 갑자기 유명세를 탔었는데, 100여명의 습격대를 침투시켜서 함경도의 보천보 마을을 24시간동안 점령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일본 지배 역사 35년간 유일하게 한국의 독립군이 국내[5]에 들어와서 마을을 점거했기 때문에 당시 김일성은 매우 유명해졌다. 그 때는 한국인들이 만주의 독립군이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일제가 그렇게 선전했다) 보천보 전투로 '독립군은 아직 다 죽지 않았다'것을 어필했다. 낙심한 조선 민중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과대포장에 의해 조선 곳곳에서 김일성 전설이 만들어지기도 했을 정도.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모래로 을 만들고 낙엽타고 압록강 도강했다는 얘기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만주 지역의 독립군은 거의 궤멸되고 만다. 자유시 참변을 겪은 데다, 1930년대 초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 지역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자 독립군은 점점 더 활동이 어려워졌다. 결정적으로 1933년에서 1935년 사이의 ‘반민생단투쟁’으로 인해 중국공산당과 협력 노선을 펴던 조선인 항일운동가들이 대거 숙청된다.[6] 관내에 김원봉, 무정 등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나 김구를 위시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들은 중일전쟁 전까지는 일제와 직접 맞붙을 여력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1937년의 보천보 전투는 궤멸상태에 놓인 만주지역 무장투쟁을 재개하고, 이 시기 처음으로 국내 진공을 성공시켰다는 의의를 갖는다. 그리고 보천보 전투 전후로, 김일성은‘반민생단 투쟁‘으로 인해 붕괴된 중국공산당과의 항일연합전선을 다시 펴는 데 성공한다. 이는 후에 로군하에서 그보다 선배이자 상관이었던 김책 등 많은 조선공산당 사람들이 그를 1인자로 추대한 명분이 되었고, 후에 그가 북한에서 해방 후에 지도자가 된 중요한 명분이다. 광복 직후 남한의 한 중도보수 신문의 설문조사에서 대통령 후보로 6위에, 국방부장관급 후보에 1위로 김일성이 뽑힌 적도 있었다. 어수선한 시절이었다지만 5년 후 그가 한 행보를 생각한다면 아이러니. 그리고 이는 사실상 김일성이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과중 하나이기도 하다.[7]

하지만……, 실제 보천보 마을의 일본 순사는 단 5명, 정확히 말해 일본 출신 3명과 조선인 2명. 게다가 그들 중 아무도 죽지 않았고, 마을 현장에서 실제 죽은 사람은 유탄에 맞은 갓난아기와 상황 판단을 못하고 저항하다 당한 일본인 요리사 둘 뿐. 김일성의 군사 능력을 보여주거나 한다는 그런건 전혀 없었다. 다만 김일성이 의도한대로 패배주의를 일소하는 성과와 상징성은 있었으니 흑역사 취급하기는 뭐하다. 어쨌든 김일성측에서 독립운동으로 내세울수 있는 성과.[8] 문제는 해방후 행적이 독립운동 했을때의 성과를 먹칠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사실 전과가 좀 부풀려진 까닭에, 냉전기간 티토체 게바라같은 세계의 유명 게릴라 지도자와 비슷한 취급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두 게릴라 지도자와는 비교를 할 수 없는 수준이다(...). 티토는 영국과 소련을 오가면서 줄타기 외교를 벌인 덕에 끝까지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체 게바라는 막장 수준이었던 쿠바를 체계잡힌 국가로 거듭나게 한 인물이다.


젊었을 때의 김일성과 아내 김정숙. 앞의 아이는 3살 때의 김유라. 체형은 부계지만 이목구비는 모계 유전자가 강한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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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Unknown)]

1945년(좌)과 1950년(우)

소련식 다이어트를 하던 시절
김일성이 이렇게 잘생겼을리 없어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나름대로 젊었을 때는 그런대로 얼굴이 잘 생겼고, 꽤나 날씬한 체격에 웃는 모습도 제법 시원시원했고, 목소리도 듣기 좋게 아주 우렁차서 그가 연설을 한번 하면 반해버린 여자들이 꽤 되었다 카더라. 가 무려 193cm나 되는 사람이었다는 소문도 있는데 탈북자들이 이 설을 신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흠좀무. 김정일은 루저새퀴라고 까면서 수령님 키는 크고 잘생겼다능 하는 사례도 있다. 이건 아무래도 정말 눈에 뭐가 씌인 거고 실제 키는 174cm였다. 뭐 못 먹고 살아 평균 키가 160대 중반을 찍던 당시에는 제법 큰 키로 봐줄 수는 있다. 당시 북한 지역 사람들 평균 키가 일본 본토와 남한 지역보다 더 크기도 했고.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같은 덕스런 얼굴이 북한 기준으론 조흔좋은 외모. 사실 장군님 킹왕짱, 희망 어쩌고 세뇌되어 자라니 미학이 그렇게 형성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뽀글이 장군에 비하면 김일성 쪽이 외모가 좋긴 하다. 게다가 북한에 막 도착했을 당시, 그러니까 아직 돼지가 되지 않고 마르고 샤프했던 시절 사진을 보면 우리가 아는 그 독재자 돼지가 맞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참 카리스마있게 잘생겼다. 물론 외모와 개념은 전혀비례하지 않지만 게다가 자기 자신은 이러한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이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결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정치기반 확립과 숙청을 감행한 것과는 꽤나 대조적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언제나 인민복 차림인데 김일성은 정장을 좋아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아! 물론 이상의 사항은 어디까지나 1970년대 이후 살이 쪄서 혹부리 영감이 되기 전 이야기. [9]



1991년 10월에 마지막으로 중국 방문을 했을 때 촬영된 사진들. 38년 만에 덩샤오핑과 공식 석상에서 만나고 있다.


카터와 협상하던 중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김일성.

왠지 대두가 됐다(...).

어쨌든 북한이 소말리아아프가니스탄 부럽지 않은 국가 막장 테크를 밟게 된 것은 김일성의 독재병크 정책이 최우선 원인이며, 김일성의 무모한 군사적 대결주의는 매카시즘과 함께 한반도를 전화에 휩싸이게 하여 분단을 고착화시키게 되었다. 가식적으로라도 제대로 된 지도자나 정치가라고는 부를 수 없다. 스탈린을 제대로 된 지도자나 정치가라 부를 수 있다면 모를까?

1.3. 가족관계

증조 : 김응우 1848.06.17~1878.10.04
북한에서는 그가 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민중들을 선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만든 주동자라고 선전하고 있다.

조부 : 김보현 1871.08.19~1955.09.02
조모 : 리보익 1876.05.31~1959.10.18

부친: 김형직[10] 1894.07.10~1926.06.05
모친: 강반석[11] 1892.04.02~1932.07.31

처: 정실 김정숙 1917.12.24~1949.09.22

김성애, 제갈 아무개[12]

형제: 김철주, 김영주[13]

자식: 김정일, 김경희, 김평일, 김영일, 김현 김일성과 제갈 아무개씨에서 나온 사생아이다. 북한 당국에서 존재를 철저히 숨겼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이한영이 자신의 수기를 통해 김현의 존재를 알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001년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일에게 처형당했다. 사람들의 추측으로 정통성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비슷한 시기에 검열삭제했다. 그래서 김현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동갑이다.

의외로 사람들을 충공깽하게 만드는 사실은 김일성 집안이 본디 개신교 집안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수쟁이들의 광신적 전도술을 배워서 쓴듯하다.


1.4. 한국전쟁 도발

해방 후부터 1950년까지 김일성은 남침을 허락해 달라고 소련에게 끈질기게 들이댔다. 소련은 2차대전 이후 미국과의 대전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요청을 묵살했지만, 미국이 애치슨 라인[14]을 설정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등 호재가 발생하자 스탈린이 이를 승낙했다. 김일성은 승낙받자마자 빠르게 남침 작전계획을 구상한 뒤 스탈린에게 비밀문서로 전달했다.

김일성은 개전 초기 빠르게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내 엄청난 혼란이 생겨 대한민국의 숨은 공산세력이 후방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자연스럽게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15] 그러나 막상 서울을 점령해도 대한민국의 후방은 잠잠했고 미군의 참전이 빠르게 결정되는 등 악재가 생겼다. 이 때문에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3일간 서울에 머무르는 작전상 엄청난 실수를 하였고,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1953년 11월 중국에서 덩샤오핑(왼쪽)과 만난 김일성. 이 둘은 38년 후에야 공식 석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1.5. 숙청의 달인

김일성의 절대적 독재체제는 절대로 공짜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의 통치 48년사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숙청의 연속. 수십년간이나 나라 하나를 국왕처럼 통치한 것은 김일성이 결코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반대파 제거를 통한 권력장악에는 정말로 능수능란했다.

북한 초기 김일성의 권력은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다.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그의 만주빨치산 파벌(산파)[16]가이련파, 무정일우안파, 박헌영이승엽남로당파 등 수많은 파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이게 지속 되었으면 북한도 나름대로 괜찮은 국가가 되었을지도[17]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이후의 군사적 대참사로 평양의 통치체제 자체가 붕괴되었는데, 김일성은 패배의 책임을 반대파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워 버리면서 정치적 위기를 탈출했다. 연안파의 리더 무정은 평양 함락 당시 김일성이 반강제로(…) 평양 수비를 명령했는데, 정작 평양이 함락되자 평양 함락의 책임을 지고(…) 지위를 박탈당했다. 북한 초기 김일성과의 명목상의 공동정권을 구성할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던 박헌영은 남한 내부 호응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제거되었다. 사실 이건 박헌영도 할 말이 없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박헌영은 전쟁 전에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 인민 20만 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뭐 해방 초기에는 한국전쟁 이후에 비해 남한이 좌파적 성향이 깊었고 북한이 우파적 성향이 강했었는 데 순 사건으로 남쪽이 다 숙청...

전쟁 이후에는 1956년의 8월 종파사건과 1958년의 "최창익 그룹 국가전복음모" 사건을 통해 연안파와 소련파를 궤멸시켰다. 당시 300명의 장성 중 숙청당하지 않은 사람은 김일성의 최측근 15명, 그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연안파와 소련파 장교들 몇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거기다 김정일로 승계 과정에서 갑산파들도 다 숙청시켰다. 한국전쟁 직후의 군사적 열세에서 불구하고 두 동맹국이 후원하는 두 파벌을 기어코 제거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일성의 정치적 수완(혹은 독재에의 집착)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무자비함은 어찌보면 독재체제 성립 이후에 절정에 달했는데, 1960년대에는 당내의 "군사만능주의"를 비판하며(…) 평생 동지였던 광협최광 등을 가차없이 숙청한다.[18] 이 숙청은 군부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방지하고 김일성 자신이 군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여담이지만, 광협의 몰락 이후 군을 장악한 것이 그 유명한 오진우다.

1.6. '태조' 김일성

권력을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계승함으로써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전제주의국가로 거듭나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는 짓거리를 보면 전설로 자신에 대한 숭배도를 높이는 등의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하므로 봉건 국가라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독재정권이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도 권력 계승을 자기 자식에게 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어지간한 나라는 총애하는 부하에게 넘겨주긴 할 지언정 자기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넘겨주지는 않았으며, 그나마 제위국가 원수 자리를 형제에게 넘겨준 쿠바조차도 원수 자리를 계승받은 동생 역시 형과 함께 혁명 투쟁에 참가한 서열 2위 원로였기에 계승한 것이지, 동생이라는 이유 만으로 후계자가 된게 아니다.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김일성을 존경해 그를 벤치마킹하려다가 벌집이 되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무나 하는 건 아닌 모양.

또한 홍길동이 썼다는 축지법쓸 줄 안다고 한다. 축지법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기행이 있는데...예를 들면, 독립운동을 하던 때에는 낙엽을 타고 두만강에서 일본군 함대를 격침시켰다던지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바꾸어서 싸웠다고 한다. 물론 일고의 가치도 없는 100% 거짓말. 다만 이건 보천도 전투 이후 한반도 민중 내에서 퍼진 소문들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박완서의 어머니가 김일성이 축지법을 쓴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이 있다. 요즘 북한 어린이들은 믿...으려나? 그리고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였을 때(아마 1920~30년대쯤) 웃통을 벗고 모래밭을 구르니 로 변했다고 한다. 근데 진짜 90년대에 들어 북한에 기아가 왔을 때 그런 액션을 전혀 취하진 않았고 그냥 죽어 버렸다. 여기에는 김정일이 죽였다는 카더라가 많다.

1.6.1. 신격화에 이른 독재

유교부장주의, 종교적 개인숭배, 경찰국가 등, 전근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권력 장악도는 매우 높고, 이런 모습이 제3세계 독재자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주화입마를 당한 독재자들로는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 캄보디아로돔 시아누크 등이 있다.

1.7. 사망

1994년 7월 8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북한측은 표면상으로는 과로로 인해 심장병이 발병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의 말년에 모든 권한은 김정일에게 쥐어진지 오래였고 김일성이 하는 일이라곤 주석궁의 자기 사무실에 앉아 혁명열사릉을 감상하는게 대부분이였으니 과로보다는 그냥 나이탓으로 여겨진다.왠지 어떤 목사분도 그렇고 둘러댈 거 없으면 과로사를 참 잘 써먹는다

생전의 김일성은 사후 혁명열사릉에 자신의 시신을 안치해줄것을 요구하였으나...그를 신격화시켜 권력 이양을 정당화하고자 한 김정일은 시원하게 씹었다.


현재 김일성의 시신은 미라화 되어서 그의 사무실이였던 주석궁을 개조한 타지마할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되어 있다.

이후 북한 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1년에 한번씩 정기 참배를 받고 있다. 하마터면 故 김대중 前 대한민국 대통령도 남북회담 당시 북한측의 회담 참가 조건으로 이 시체에 대고 참배를 할 뻔 했다고.

참고로 김일성을 미이라화 하는데는 예전에 레닌을 미이라시켜서 지금도 보존중인 러시아 기술진들이 투입되었다. 참배 받을 때 모양이 찌그러지면 안된다고 보존제를 비싼 재료를 쓰는 등, 경제사정도 안 좋은 주제에 이 시체 유지시킨다고 100만 달러 이상을 퍼부었으며, 지금도 한달에 두 세 번씩 방부처리, 2~3년에 한번씩 재보존처리 등 돈지랄을 하고 있다. 추정치로 만들 때 100만 달러 이상이 들었으며 지금도 연간 그에 준하는 돈을 퍼붓고 있다고 한다. 저 시체 보존만 안해도 아사자가 몇만명은 줄어들거라고 하니 말 다했다. 게다가 2대째도 곧 이 처리를 할 것이니 부칸의 경제부담은 2배로. 야! 신난다

미이라 제조에 쓰인 기술은 엠버밍이라고 하여 시체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것인데, 한참 전에 개발된 기술이지만 지금도 이 방법이 최상이라고 표현될 만큼 정교한 기술이나 그 대신 유지비가 미친듯이 깨지는 기술. 사실 엠버밍 기술도 고대 미이라 제작 방법과 마찬가지로 썩기 쉬운 내장과 뇌는 제거하므로 그냥 돈지랄해서 껍데기만박제 남겨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 아들 김정일도 사후에 박제를 하였다

1.8. 이야기거리


  • 뒤에는 크고 아름다운 혹이 있었으며, 이 꽤나 쪄있어 반공 애니메이션에서는 주로 돼지로 묘사되었다. 빨갱이를 돼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것에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심지어 이 장군에서는 인간을 코스프레한 돼지로 등장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김일성 본인은 이 콤플렉스를 거론하는 것을 무척이나 기분 나쁘게 여겼으며 이것에 관해 논할경우엔 아주 무시무시한 아저씨한테 끌려가서코로 평양랭면 원샷을 하거나 아주 무시무시한 곳으로 끌려간다 카더라. 그래서 북한측에서 찍은 사진중엔 김일성의 혹이 찍힌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뒤에서 찍은 동영상 김일성의 혹은 방종으로 추정되는데 외과수술을 통해 조기에 절제할 수 도 있었으나, 치료시기를 놓쳤고 고령이 된 뒤라 수술을 하면 건강에 타격이 가 그냥 방치해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혹은 더 커졌고...[19]


  • 남북정상회담을 하게 된 건 당시 북한이 워낙 막장이어서 빠져나갈 길을 모색하려 한 거였다고 한다. 이때 당시 남북간 지도자들의 만남이 최초로 성사될 뻔 했는데, 김일성의 사망으로 이는 뒤로 미뤄진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으므로 과연 최초의 정상회담이 몇년 먼저 성사되었을지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이점은 아직까지도 떠도는 김정일의 의한 김일성 독살설의 배경이된다. 이미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을 원치않아 아버지 김일성을 독살했다는 설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일을 두고 "내 기에 눌려 죽은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런데 국가 원수가 이런 농을 칠 정도로 김일성 사망 전후 남북간 분위기가 꽤 부드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일성이 급사하면서 남북 분위기는 급작스레 긴장으로 치닫는다.

  • 빨치산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해 준 김책을 존경하였다고 한다.[20] 그가 죽고 나자 함경북도 성진을 '김책'으로 바꾸고 공업대학을 만들 때 그의 이름을 붙여서 '김책공업종합대학'이라고 짓기도 했다.

  • 백괴사전의 김일성 항목은 모든걸 왜곡하는 동네답지 않게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놈으로 분류를 하는 등 가루가 되도록 깐다. 하긴 그의 살아생전 해놓은 짓들을 약간만 봐도 천당이나 극락에 갈 놈은 아니다. 당장 6.25 전쟁이나 주체사상만 해도….

  • 한국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스탈린에게 허락받으러 갔는데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끈질기게 아양떨고 지랄부리고 하여튼 스탈린에게 허락 받으려고 별짓을 다했다. 결국 스탈린은 무려 48번씩이나 거절한 끝에 한국전쟁을 허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 뒤 인민군이 깨져서 패주하는 꼴을 쳐다만 봤다.

  • 북한에서는 문화어가 '수령님께서 몸소 쓰시는 영광스러운 언어'라면서 김일성이 과거에 말한 '지주놈의 상통'(면상), '자본가놈이 뒈졌다', '대가리를 돌로 까부신다'같은 온갖 각종 욕설이 난무한 막말문화어라면서 대놓고 교과서에 실어놓았다.
  • 80년대말까지 김일성의 얼굴이 공개되는건 남한에서는 코렁탕의 지름길이었다(…). 대부분 캐리캐처로 처리, 브리테니카나 뉴스위크지에서 김일성의 사진이 나올 경우 먹지로 처리하거나 찢어버려서 수입되었다. 해외제작 6.25다큐의 경우는 김일성의 육성부분은 묵음으로 처리했다.

  • 미국 시사만화가 래넌 루리는 김일성을 살인 로봇처럼 풍자한 그림을 그렸는데, 1970년대 한국에선 좋아라 자주 소개했다. 그런데 루리는 박정희는 거만떠는 독재자로 풍자하여 그렸기에 이것이 반대로 북한에서 종종 소개되었고, 박정희 살아생전 남한에선 이 그림은 공개불가였다.

  •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연설을 하던 도중 백의사에게 암살당할 뻔했다. 수류탄을 암살자가 던졌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집어던져 암살을 모면했다. 그 대신 그 장교는 가까이서 터진 수류탄 덕에 팔 하나와 여러 곳을 다치고 의병제대했다. 그덕에 이승만김구는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받았다. 김일성이 권력을 확실히 잡은 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이 장교를 손수 찾아가 고마워했고, 북한에서 따로 연금과 여러가지를 제공하여 은혜를 보답했다고 한다. 이 장교가 죽을 때도 북한에서 장례비를 지원했다.

    • 김일성을 맡은 배우
  • 외국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신격화의 정도가 나오는데, 평양의 웬만한 공원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인 벤치가 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은 '수령님께서 앉으셨던 의자'라서 길이 보존해야 한단다(…). 개인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영구 사유화라니.이건 뭐….

  • 북한에서 제작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김일성[21] 역할을 한 배우는 평생 그것만 해야 하고 대단히 경호를 잘 해준다. 일명 1호 공훈 배우.전땡이 비슷한 얼굴을 가진 배우를 출연 금지시킨것과 비교가 된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박정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도 이 정도 대우를 받지만 그 사람은 다른 역도 꽤 나왔다.

  • "작명법의 관점에서 그 후손들의 작명은 상당히 희한하다. 본래 부자간에는 같은 한자를 피휘하여 작명하는 것이 원칙인데, 아들 김정일과 손자들(正 돌림) 모두 그 아버지의 한자를 차용해서 이름을 지었다. 김정일의 경우, 김정일(金正一)에서 김정일(金正日)로 일부러 개명까지 거친 이름인데 이는 아버지의 이름자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김일성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우기 위함이었다고. 본래는 그의 형제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만일과 함께 한 일(一) 자 돌림자를 썼다. 패륜왕 김정일"

  • 소뒷걸음질로 쥐잡는 격으로 사람(과 국가)를 살리기도 했다. 물론 죽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전쟁에서 죽은 사람+북한에서 숙청된 사람 vs 대만 함락되면 숙청되었을 사람+일본 안일어났으면 죽었을 사람+기타 친일파들+소위 빨갱이 사냥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박정희[22],장제스[23],요시다 시게루[24],이승만[25]등이 있고, 이 또라이인간 덕분에 일본은 아시아의 스위스가 아닌경제 강국이 되었다.

라) 보고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 전에 북조선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교부한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만식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 김정일이 실권을 쥐게 된 1980년대 이후로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고, 유년기부터 항일투쟁과 해방 시기까지의 활동을 다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같은 책을 집필했다. 하지만 저 회고록은 자기 입맛에 맞게 항일운동사를 마구 뜯어고치고 윤색해 북한 밖에서는 양판소불쏘시개로 취급된다.

  • 죽기 불과 한 달 남짓 전이었던 1994년 6월 10일에는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와 회동해 북미관계의 개선을 꾀하기도 했고, 당시 한국 대통령이던 김영삼과 남북정상회담도 추진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김일성의 죽음에 대해서는 온갖 설이 나돌고 있는데, 김일성의 이러한 외교 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긴 김정일이 몰래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밑의 '김일성 암살설'참조).


1.8.1. 김일성 가짜설

소련군의 밑에서 일할 때 지나치게 젊어보였던 데다가 보천보 전투에 대한 소문이 유포되고 김일성 이야기가 민간에서 돌아다녔을 적에 김일성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대략 도사 분위기의 노병 이미지를 상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막상 김일성이 소련군의 소개로 대중앞에 서자 상상 속의 이미지가 아닌 걸 보고 "저 애송이는 뭥미?" 하는 반응이 있었다. 김일성이라는 이름도 1930년대에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 개명한 것이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의 명성을 이용한 김성주라는 애송이라는 설이 팽배했었다. 이에 대해 전 북한 직업총동맹위원장 서휘는 "김일성은 자신이 항일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고, 철저히 중국인으로 속여가며 활동하던 사람인데, 그가 친일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김일성이 항일 이력은 있었으리라고 인정은 하지만, 항일운동으로 이룬 성과에 대해서는 이견이 크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최근까지 한국은 김일성의 항일 이력은 무작정 거짓으로 취급했고, 북한은 무조건 미화&과대포장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진실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분위기라서 제대로 연구되지도 못했다. 심지어 북한에서는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에 한국 광복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북한을 해방시켰다라고 개소리를 하면서까지 찬양을 한다.[26] 으악! 실제로 보천보전투 당시 김일성부대가 첩보와 작전협조를 위해 국광복회라는 것을 보천보 일대와 국내에 좀 심어놓긴 했는데, 이게 김일성 혼자 다 한것도 아니며, 그정도의 네트워크는 이미 김일성이 제대로 나서기 전부터 있었다. 그래도 작전계획과 실행은 김일성. 일단 국내 진입에 성공했던 보천보 전투는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에 대부분 인정한다. 사실 보천보 전투를 제외하고는 성과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지만 김일성 파벌이 북한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동안 언론플레이와 과대포장을 성공적으로 한 것.결국 음지에서는 아무리 노력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후새드.

1.8.2. 김일성 암살설

김정일이 김일성을 암살했다는 설.

줄거리는 이렇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원체 떠받들고 악화되는 경제상황을 왜곡해서 보고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북한의 경제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왕이면 김대통령이 기차를 타고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철도의 보수를 논의하던 중, 철도상으로부터 사람을 동원할 수가 없어 철도 보수 작업이 힘들다는 말을 듣는다.

이에 김일성은 "아니, 자금이라든가 물자가 부족한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게 무슨 소리요?"라고 반문했고, 이에 철도상은 쭈뼛거리다가 배급이 중단된지 3개월이 지나 동원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김일성은 즉시 김정일에게 전화를 하여 "이 김일성이가 쌀밥과 고깃국을 약속하며 정권을 잡았는데 배급조차 못 준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그따위로 일할 거면 당장 당 조직비서를 그만두라" 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김일성이 그 정도로 개념이 있을거 같지는 않지만 일단 넘어가자.[27]

김일성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유가 철도상 때문임을 파악한 김정일은 관련 장관을 호출하여 마구 혼을 냈고 이때 통일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 반동이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하며, 그 이전에 이미 묘향산초대소에 있던 김일성에게 의료진들이 매우 과로하여 쉬게 해야겠다고 진언하여 승낙을 받아 의료진이 잠시 철수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 김일성은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이것은 북한에서 떠도는 상당한 괴담이고, 월간 신동아에서는 탈북자들의 증언 등을 조합하여 김정일의 고의적 의료진 철수와 김일성 방치로 결론을 내리고 기사를 게제한 바 있다.(관련 기사 1,관련 기사 2) 실제로 김일성 사망 이후 김일성 경호를 담당하던 호위총국 제1국의 요원이 김정일을 향해 총질을 했다는 괴담, 호위총국이 숙청 재개편된데에는 김일성 암살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한 김정일이 주역할을 했다는 괴담도 돌았다고 한다.


1980년 10월 김일성/김정일. 아부지 꼬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찮다.

실제로 말년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매우 강하여 김일성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는 증언이 적지 않기는 하다. 심지어 말기에는 김일성이 김정일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려면 통일 문제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계산을 해 북 고위급 회담 등을 전격 추진하는가 하면 달현 부총리를 비롯한 개혁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을 직접 서울로 보내기까지 했는데 당시 김정일은 "통일, 통일하는 것들은 다 노망난 것들이야!"라는 망언을 하는가 하면,[28] 김일성이 주재한 회의에서 김달현이 "더 이상 공산주의로는 안됩니다. 경제개방을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김정일이 화를 내며 제지하다가 김일성이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라고 말한 일화까지 있었다. 게다가 김일성이 공교롭게도 남북정상회담 바로 직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더욱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이후 김정일은 후계자를 논하는 것 자체를 반역이라 간주하고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김일성이 김정일을 너무 일찍 후계자로 내세우는 바람에 권력을 모두 빼앗기다시피 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전철을 밟기 싫었다는 설이 있다. 이 때문에 김정은의 후계체계는 빠르고 급작스럽게 진행되었고, 이것 역시 김정일이 권력을 빼앗기는 것을 매우 두려워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1990년대 들어 80대에 접어든 김일성이 죽는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리가 없었고 실제로 1990년대 초반 남북 고위급 회담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김일성의 건강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었다. 특히 황장엽 비서는 증언에서 이미 김일성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노인이었으며, 그해 5월에도 눈수술을 받아 휴식이 필요했는데 독재자 킬러지미 카터를 만나면서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남한 주민들이 항일영웅을 만세로 맞이할 것이고, 김일성이 통일의 주도자가 될 것인 양 아첨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크게 들떠서 무리하게 정상회담을 진두 지휘하다 과로가 겹쳐 사망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이러한 김일성 암살설이 나도는 배경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김정일 통치기의 북한에 실망한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김일성 시절을 낙원으로 여기는 심리가 생겼고(적어도 굶어죽지는 않았으니까.),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데에는 김정일 탓으로 생각하다 보니, 김정일에 대한 분노가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확한 증거를 내놓을 수 없는 그냥 떡밥일 뿐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1.8.3. 족보 집착증

묘하게 자신의 성씨와 조상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주 김씨로서 6.25전쟁 중 전주 김씨 족보를 구하려고 무진 애쓰기도 했다. 한 일본 기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전주 김씨 족보와 조상의 영정을 모셔놓고 향을 피우는 방을 따로 마련해 놓은 걸 봤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또한 이 이야기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묘가 전주 모악산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 전쟁이 나도 전주는 안전할 거라는 이야기를 우스개소리로 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6.25 전쟁 개전 초기(9월)에 전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본가인 전주 김씨 시조는 사실 경주 김씨의 일파인 김태서[29]로서 그 후손 전주 김씨는 몽골 침입 당시 경주를 떠나 이주한 방계이며, 한동안 전주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 즉 근원적인 조상은 신라쪽으로 닿는다.[30]경주야말로 진짜 그의 뿌리인 셈.

1.8.5. 사상

김일성은 기본적으로 무식하며 학력이 얕았기 때문에 소련에 복종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이끌기는 했지만 정작 공산주의 사상에는 무지했다고 보인다. 김일성의 사상적 무지는 마찬가지로 게릴라 지도자 출신이라 사상 학습이 덜 되었던 모택동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공산주의에 그다지 심취하지도 않았던 듯 하다.

게다가 학습이 잘 된 공산주의자들은 오히려 숙청해버리는 정책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의 정책에는 도무지 공산주의라고 볼 수 없는 요소를 많이 포함하게 되었다. 주체사상이라는 비 공산주의 사상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2.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라고 사주한 사람

태조와는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이름이 같아서 김일성은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사람이라는 엉뚱한 취급[31]도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사람도 공산주의자다(…). 80년대 이후 복권되고 재평가 된 좌익 작가 강경애의 남편이다. 본명은 김봉환지구탐험 신비의 세계 부른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사주설이 아니고 진짜 그 사람 맞다.

암살한후 공개적으로 김좌진이 일제에 투항해서 우리가 처단한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 말대로 김좌진이 정말 일제에 투항했는지는 의문. 혐한들이나 일부 조선족 기록에 의하면 이 기록을 사실처럼 기재하는 경우가 있고 업그레이드해서 일본에 투항하고 주색잡기에 빠진 김좌진 떡밥을 돌리기도 했다. 물론 한국에서는 공산주의자와의 노선차이로 암살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90년대초반 중앙일보 현대사 연구 기사에 의하면 이런 투항설이 사실은 일제의 공작, 즉 투항하지 않는 김좌진을 투항한 것처럼 믿게 한 이이제이라는 가설도 나왔다.

장군의 아들의 원작자 홍성유의 소설 성유 인생극장에 의하면 이 김봉환이 "진짜 김일성"이고 우리가 봤던 북한의 독재자는 가짜 김일성이라고 하는데 신빙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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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실권자의 경우 김씨 돼지놈들이지만, 사회주의 헌법상 원수는 김두봉과 최용건이 먼저이다
  • [2] 그래봤자 소련에 줄을 대려고 일본을 견제한 것뿐이다. 즉 친소파. 뭐 한국전쟁때 소련이 생까던걸 보고 충격을 받았던지 나중에는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하고 소련과 중국을 오가며 양다리 외교를 했지만. 뭐 그덕에 북한은 막장화.
  • [3] 이케다 하야토의 개소리(망할 기업은 망해야 하고, 못 사는 서민은 그저 보리밥을 먹어야 한다.)로 인해서 지지율이 폭락해 정치인생 개발살날 뻔했던 요시다 시게루 당시 총리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제 일본은 살았다! 라고 개드립을 외쳤다. 그의 말대로, 일본은 비록 자기들이 전쟁을 일으킨건 아니지만 한국인과 중국인과 미국인의 피를 먹고한국전쟁 특수로 인해 경제 회복을 완수할 수 있었고, 요시다 시게루 역시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이후 최장수 총리에 등극하였다. 그이후 일본은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고도 경제성장을 하며, 선진국 진입에 성공하였다.
  • [4] 이들은 갑산계로 분류된다. 나중에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당 간부들에게 추천한 목민심서봉건주의의 산물이라고(…).
  • [5] 보천보는 국경지대의 산중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이웃에 함남의 거점 도시 혜산이 위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과가 그리 크지 않음에도 보천보 전투는 혜산을 통해 전국에 알려질 수 있었다.
  • [6] 일제의 토벌보다 ‘반민생단투쟁‘으로 희생된 항일운동가의 수가 더 많았다는 말도 있다.
  • [7] 실제로 이 이후 계속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긴 하지만 게릴라전이 그렇듯 전면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만주군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만주군의 총 공세가 시작되자 도주를 거듭하여 결국 소련으로 도망가고, 소련의 88 극동여단에 정착하는 계기가 된다.
  • [8] 사실 독립군은 여러 세력으로 존재하긴 했어도 독자적인 작전을 펼친 예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파 독립군은 사실상 장개석 국민당군 휘하에서 지휘를 받고 있었고, 좌파 독립군은 많은 숫자가 팔로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 [9] 참고로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김일성을 닮았다고 한다. 얼굴이나 성격 등.
  • [10] 미션스쿨인 숭실학교(지금의 숭실대학교 맞다.)를 졸업 후, 동문들과 '민족주의'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아들과 달리, 이 단체의 목표는 일종의 준비론에 가까웠다고 한다.
  • [11] 베드로의 그 반석 맞다.
  • [12] 김일성의 주석궁 안마사(간호사라는 소리도 있다.). 김일성의 많은 자식중 한명인 김현의 모친이다. 이외의 알려진 것은 없다.
  • [13] 1993년~1989년 9월까지 부주석, 2003년부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 [14] 공산주의에 대한 극동 최종방어선은 필리핀-일본으로 정하는 애치슨 국방장관의 선언이다.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는데 이는 6.25전쟁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 [15] 근데 이 때는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탄압 때문에 대한민국 내 공산주의 세력이 많이 약해진 때였다. 그러나 남로당의 박헌영은 전쟁을 일으키면 대한민국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전했고, 김일성은 이를 그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그리고 반대파 제거를 위해 김일성은 전쟁 후 박헌영을 숙청한다.
  • [16] 갑산파들도 김정일로의 승계 과정에서 숙청된다.
  • [17] 정치학자 서동만은 다양한 정파가 공존하고 있던 1950년대의 북한을 지금의 북한과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한 시기로 보았다.(서동만, 1950년대 북한의 정치갈등과 이데올로기 상황)
  • [18] 다만 최광은 김일성 통치 말기에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복직해 죽을 때까지 유임했다. 물론 군 상층부에서는 그냥 늙다리 바지사장이라고 뒷담화를 깠다지만.
  • [19]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5150020920300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5-15&officeId=00020&pageNo=3&printNo=17417&publishType=00020
  • [20] 원래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김일성으로 내세우려던 것은 김책이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 [21] 가장 유명한 작품이 조선의 별 연작영화이다. 의외로 같은 씨니까 그렇겠지만김정일이나 김정은과 비슷한 배우가 젊은 날의 김일성으로 나온다.
  • [22] 6.25 전쟁 안 일어났으면 남로당 가담혐의로 그대로 나가리
  • [23] 한국전쟁 안 일어났으면 중공군이 침공해서 멸ㅋ망ㅋ
  • [24] 전쟁 특수 없었으면 실ㅋ각ㅋ
  • [25] 한국전쟁 없었으면 탄핵받아 하ㅋ야ㅋ.
  • [26] 8.15 해방 이전에 북한이 '해방'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김일성이 아닌 소련군에 의한 '해방'이었으며, 김일성은 해방 후에나 귀국하게 된다.
  • [27] 비슷한 예 『평양은 서울을 꿈꾼다』에서 김일성은 매일 아침 일어나서 공장이나 발전소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나는거 보고는 "오늘 공장이 잘 돌아가는구만" 하면서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과정을 거쳤는데, 어느날 흰 연기만 뽈뽈나는거 보고는 기분이 나빠서 빨리 발전소를 돌리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계속 차질이 빚어지자 이유가 석탄공급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이유를 파악하고자 개인비서를 노동자로 위장시켜서 탄광에 보냈다. 거기서 비서가 배급이 안 나와서 광산이 정지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그대로 직통보고, 당연히 김일성은 노발대발했고 업무담당자들은 발전소를 돌릴 석탄을 구하느랴 죽어나갔다. 아무래도 김일성은 나름 고생해서 건국해서 그런지, 국가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긴 했다. 결과가 시망이라서 그렇지...
  • [28] 하지만 정작 북한 정권 수립 이래 처음으로 남한 대통령들과 정상 회담을 그것도 두 번이나 가진 최고 권력자는 2011년 현재까지도 김정일 뿐이다. 뭐야 이거 츤데레???
  • [29] 그런데 이 인물, 백과사전을 보면 알겠지만 권세를 믿고 탐욕스럽게 전횡을 휘둘렀던 상당히 평이 나쁜 인물이다. 자기 후손이 한반도 반을 통치하는 독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놀라워했을까, 기뻐했을까.
  • [30] 이러거나 저러거나 실제로 전주 김씨들은 김일성과 종친이라는 이유로 분단 이후 상당한 세월을 눈치 보면서 살았어야만 했다. 실향민+전주김씨 콤보인 사람들은 더더욱 사회적으로 많은 불이익(쉽게 말하자면 지역감정으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이런 이유로 모국을 떠난 이민 1세대들도 있다.
  • [31] 연도를 생각하면 전혀 말이 안된다. 김좌진이 암살된 것은 1930년이니까 이 당시 저 김일성은 겨우 만 18살로 지시할 위치도 힘도 없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