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네로

last modified: 2015-08-07 03:15:05 Contributors

  • 본 항목에서는 로마 황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동음이의어는 네로/동음이의어 항목으로

Contents

1. 개요
2. 즉위와 집권
3. 로마 대화재
4. 몰락
5. 평가

1. 개요


네로(Nero)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37년 12월 15일~68년 6월 9일). 재위 기간은 54년 10월 13일 -68년 6월 9일.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이어지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방탕한 생활과 광기를 가진 폭군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지만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로마의 역대 황제
4대 클라우디우스 5대 네로 갈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전기

2. 즉위와 집권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소)아그리피나의 아들로,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후처로 들어오며 그의 양자가 된다. 참고로 네로의 친아버지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大)안토니아의 아들이고, 대(大)안토니아는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딸이기에 네로는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받은 셈이다. 어릴 때에는 영특하고 현명하였다고 한다.손호?

사실 네로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았는데, 클라우디우스에겐 전 아내인 메살리나 발레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브리타니쿠스란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해 직접적으로 피가 안 섞였다고는 하나 표면적으로 남매간이 되는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1]와 네로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네로가 클라우디우스의 후계자가 되기 쉽도록 길을 터줬다. 이러한 아그리피나의 영향도 있었고, 불륜을 저질렀던 메살리나에 대한 악감정 탓인지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그 뒤 석연찮은 죽음을 맞는다. 클라우디우스 사후 네로는 브리타니쿠스가 어리다는 이유로 17세의 나이에 황제로 추대되었다.

네로와 옥타비아의 결혼은 사실상 강제였기 때문에 금슬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옥타비아는 당시 기준으로도 착하고 현명한 아내감으로 명망이 높았고, 네로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데 대해 로마 시민들의 강한 동정을 받고 있었다. 네로의 이러한 행실이 정통성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아그리피나는 그 점을 상당히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게다가 네로가 포파이아를 사랑하게 되어 옥타비아를 몰아내려고 하자 아그리파나는 옥타비아 편을 들어 아들과 대립했다. 이 때 네로는 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실권을 잡으려 하면서 아그리피나와 조금씩 충돌하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이혼 문제까지 끼어들자 둘의 사이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다.

이 때 아그리피나가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하자, 사실상 정통성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브리타니쿠스가 심각한 위협이 되었으므로 네로는 자신의 하수인을 보내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한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아그리피나를 뒤이어 암살했다. 아그리피나를 죽이고 나서는 그동안 사이가 나빴던 아내 옥타비아에게 간통의 혐의를 뒤집어 씌운 뒤 처형한다. 이런 막장짓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로의 치세에는 그다지 큰 영향이 없었는데, 당시 로마 시민들의 아그리피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으며 이 때까지는 네로에게 정치적으로 뚜렷한 실책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세네카와 부르스의 보좌를 받은 네로의 초기 치세는 꽤나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그리피나가 죽은 이후 방해꾼이 사라지자 네로는 조금씩 자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보좌의 한 축이었던 부르스가 병에 걸려 죽자, 가족까지도 가차없이 살해해 버리는 네로의 성격에 경계심을 품은 세네카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로써 네로는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네로는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 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연예인 기질이 강했는데 그를 제약하는 사람이 사라지자 이러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한다. 네로는 그리스 문화와 시에 심취하여 그리스 등지에서 열리는 시 낭송 대회에 출전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고, 그와 관련된 여러 일화와 농담들이 전해진다. 올림픽 경기에 직접 출전해 자신을 위해 창설한 음악 경쟁에서 우승하고, 7두마차[2]를 끌고 출전한 전차경기에서는 중간에 전차에서 굴러떨어졌음에도 심판진의 안 퍼졌으면 님이 1등 판정으로 우승. 그 외에 다른 종목에서도 전부 우승하였다.[3] 그리스에서 열렬히 환영(?)받던 네로가 로마에서 자신의 시 낭송회를 열자, 연예인 황제에게 좌절한 시민들의 반응이 환장환상적이었다고 한다. 나름 시인이자 아티스트, 체육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어보려고 노력은 참 많이 했지만 당시 로마인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황제란 인간이 정무는 안 돌보고 그리스에 가서 놀고 앉아있으니... 로마인들은 예술가 황제를 원한게 아니라 나라를 잘 돌보는 황제를 원했다. 그러나 로마의 예술 발전에는 큰 공헌을 했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지만 결국 그리스 문화도 '외국' 문화였기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많았다. 특히 동성애의 경우, 로마인들은 그리스 식의 소아동성애가 장차 로마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여성화시킨다고 생각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예로 대 카토는 미소년 시종이 논밭이나 도자기보다 더 값나간다는 사실에 로마는 망할 거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네로가 예술에 빠져 지내자 네로는 여자라고 험담을 했으며[4]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도 이런 네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네로의 예술 활동은, 동양의 경우로 따지면 정무는 안 돌보고 황궁에 틀어박혀 도적 패거리가 깽판을 치든 말든 돌 감상에 시간을 허비한 북송의 황제에 비교할 수 있겠다.

그렇게 취미활동을 즐기긴 했지만 네로가 정무에 그렇게 무신경한 것은 아니어서 네로 통치하의 로마는 잘 굴러가고 있었다. 특히 외교적인 면에서 네로는 그 이전 누구도 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업적을 남기는데, 파르티아 방면으로 파견한 장군 코르불로의 중재를 통해 한동안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얻어낸 것이다.

당시 파르티아의 황제였던 볼로가세스는 원래 측실 소생이라 황제가 될 자격이 없었으나 정실 소생이었던 동생 티리다테스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장자상속의 원칙을 내세우며 형에게 양보한 덕분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동생의 의리에 감복한 형은 파르티아 정실왕자에게 어울리는 번듯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걸로 보답하려 했고 국내의 반대파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도 겸해서 파르티아의 최고제사장 자리와 더불어 이웃나라이자 로마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속국이었던 아르메니아 왕위를 주려고 하고 있었다.

이때 아르메니아의 관할문제를 두고 파르티아와 로마가 전쟁중이었는데 네로가 개입하여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대관식을 로마에서 치르게 함으로써 로마와 파르티아 양국의 자존심을 모두 살렸다. 이 때 티리다테스는 비슷한 나이대였던 덕분인지 네로와 상당히 친해졌는데,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후 수도 명칭을 네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네로폴리스'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축제를 매년 열었다. 더불어 네로가 죽은 후에도 이 축제를 계속할 수 있도록 로마에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로마의 동방 국경이 안정되었다.

3. 로마 대화재

네로의 몰락은 엉뚱하게도 정무 수행에서가 아닌 다른 데서 촉발되었는데 우선 로마의 대화재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로마시의 대화재는 지금까지의 역사에도 유래가 없을 정도의 규모로 무려 5일에 걸쳐 불이 타올랐으며 로마의 14개 구중 네 개 구를 뺀 나머지가 탔다고 한다. 10개 구 중 3개 구는 완전히 불에 타 소실되었으며 나머지 7개 구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이 때 로마인들 사이에서 네로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는 네로의 그리스 애호 취향을 섞어 그럴듯하게 각색한 이야기었다. 즉슨 당시에도 그리스 문화 중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가 유명하였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트로이가 파괴되고 불타는 장면을 네로가 일부러 연출하기 위해 로마를 불질렀다는 얘기였다. 이 소문은 나중에 네로가 로마를 불사른 다음 궁중의 높은 누각에 올라가 리라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까지 부풀어서 전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루머와는 달리 실제로 네로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로는 로마가 아니라 80km나 떨어진 해안도시 안티움에 있었으며 대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불타는 로마로 혼자 전차를 몰고 달려가 진화를 진두지휘하였다. 또한 도시를 복구할 때도 민심을 잘 추스렸는데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난민들을 지원하였으며 궁전을 개방하여 재산을 손실한 시민들의 피난처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장에 직접 나서 화재 진압을 전두지휘하였으며 그러던 중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네로 방화 주범설'에 분노한 한 시민의 습격을 받았으나 의연하게 자신의 떳떳함을 밝혀 오해를 풀기도 하였다. 로마 대화재 이후 건축 자재로 가연성 재료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든 것 역시 네로다.

많은 증거와 상황이 네로는 화재와 무관함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네로가 범인이되 직접 불을 지르지는 않고 네로의 명을 받은 노예들이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낭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퍼졌다. 이는 훗날까지 전해져 폴란드 작가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쿠오 바디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네로는 이러한 소문을 매우 질색하였으며 이를 일소하기 위해 기독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죄를 뒤집어 씌우기도 하였다. 당시 로마인 사이에서는 나라의 행사에 불참하고 군대에도 불참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대화재와 같은 국가적 재난 때 시민들이 신전에 가서 울부짖을 때도 기독교인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네로는 이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방화를 한 주범이라고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기 시작한다.

단, 흔한 착각으로 네로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를 맹수들의 밥으로 주는 등의 방식으로 처형했다는 얘기가 매우 유명한데 네로는 콜로세움에서 단 한 명의 기독교도도 죽일 수 없었다. 왜냐면 콜로세움은 네로 사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네로의 거대한 동상(콜로수스)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이 있을 정도.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5] 원형 경기장이다. 아마도 네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원망+쿠오 바디스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4. 몰락

그러나 대화재 이후 네로의 로마 재건 정책이 시민들의 혹평을 사게 된다. 네로는 불에 타 소실된 넓은 지역에 네로를 위한 궁전[6]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를 로마 시민들의 거처를 빼앗는 짓이라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의 양부인 클라우디우스의 신전터도 궁전 건설 계획 부지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대공사를 위한 비용은?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속주들도 털렸으며 심지어 신전까지 털렸다. 네로의 인기는 추락하기 시작하였고 그 때문인지 일 년만에 그의 스승인 세네카까지 가담한 네로의 암살 계획이 발각된다. 세네카는 자살을 명령받고 생을 마친다[7].

그 뒤 네로는 유태인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유태인의 반란은 당시 시리아 총독이었던 파르티아 전쟁의 영웅 코르불로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네로는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내리고 코르불로를 자신이 머물던 그리스에 소집한다. 네로는 코르불로를 만나서 자살할 것을 명령하였고 코르불로는 그에 따랐다. 코르불로의 죽음은 로마군의 강한 분노를 초래했다. 코르불로는 당시 로마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몰라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코르불로의 딸을 아내로 삼을 정도였다. 결국 젊은 장교들이 황제 암살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또한 근위군에 의한 암살시도도 있었다.

코르불로 사후 일 년 뒤에 갈리아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딕스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스페인 총독이었던 갈바를 반란에 가담시켰으며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네로는 게르마니아 고지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루푸스는 빈딕스와 결전을 벌여 빈딕스를 격파하고 빈딕스는 자결한다. 하지만 네로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로마 군대는 루푸스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요청하였고 루푸스는 이를 거절한다. 이렇듯 루푸스의 진압군마저 네로를 따를 마음이 없음을 보여주자 스페인 총독 갈바는 마음껏 황제를 칭하면서 원로원을 압박했다. 병사들의 마음이 이미 네로를 떠나 갈바 쪽으로 기운 것을 본 원로원은 마침내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고 이 때 네로의 근위대장도 갈바 쪽으로 붙게 된다.

이렇게 되자 네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다음날 아침 궁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음을 발견한 네로는 를 타고 파르티아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선장들의 거절로 인해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 뒤 네로는 직접 로마 포룸으로 나아가 로마 시민들에게 연설하여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포룸으로 가는 도중 폭도들에게 맞아 죽을 것을 겁내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마침내 네로는 자신의 노예의 집으로 달아나 숨게 되는데 이때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였음을 알게 된다. 뒤이어 '원로원이 자신을 채찍질로 처형할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 듣고 공포에 질려 있다가 원로원으로부터 파견된 전령의 말발굽 소리를 듣자 칼로 자기 머리를 찌르는 방식으로 목숨을 끊는다. Qualis Artifex Pereo

그래도 의외로 죽은 뒤 험한 꼴 당하지 않고 정중히 화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석관에 안치되어 자기 조상들의 묘역 인근에 매장되었으며 예전에 네로의 무덤이 이미 발굴되어 그의 석관이 발견되었다. 갈바의 내전기 때 수준미달 황제들 때문에 원로원에서는 네로를 죽음으로 내몬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5. 평가

여러 막장스러운 사건을 제법 남겨서서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로마 말기의 막장 황제들에 비할 만큼 끔찍한 막장은 아니었다. 네로의 통치는 삽질도 했다지만 비교적 성공적이었으며 역대 폭군들에 비하면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최후의 인사였던 베스파시아누스의 유태인 진압도 결국 성공적인 인사였다는 것이 입증되게 된다. 로마 대화재 이후 소방법을 개정하고 로마를 새롭게 만드는 등 잘한 일도 많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공도 많고 과도 많은 인물이었기에 사실 '폭군'은 네로에 걸맞지는 않은 칭호이다. 하지만 변덕이 심하고 즉흥적인 성격이라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에는 확실히 걸맞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노래 부르며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음유시인의 인생을 걷는 것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본인 스스로도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심정을 털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로마의 막장황제 = 네로'라는 공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화재 직후 자신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기독교도를 범인으로 몰고 박해하였기 때문이다. 훗날 전유럽이 기독교화되면서 네로를 사악한 폭군으로 묘사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유럽전역에 퍼지며, 토착신앙을 악마나 마신으로 격하시킨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굳이 기독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에토니우스나 디오 시우스 등의 역사가들에게도 많이 까였다. 제국의 황제임에도 본분을 자각 못하고 노래나 시, 연극 등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낭만적인 모습을 보인 것들과 로마에서는 그리 좋은 취향이 아니었던 동성애적인 행사를 공개적으로 하는 등 어찌보면 작다면 작은 실수를 많이 저질렀기 때문. 게다가 툭하면 로마가 아름답지 못하다며 다 때려부수고 새로 건축해야겠다고 지껄이고 다녀서 로마 부유층에게나 하급 시민에게나 평이 좋지 않았고, 이러한 평소의 언동 때문에 로마 대화재의 범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는 점도 크게 이미지를 깎아먹었다. 아직 로마인들이 진짜 폭군들의 뜨거운 맛을 보지 못한 시절이기도 했고

네로는 자신의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 로마의 속주를 세금으로 쥐어짰다. 네로의 선물비용만 20억 세스테르케스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는 연간 군사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한다. 그만큼 속주는 막대한 세금을 내야했고, 심지어 속주 왕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도 발생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60년의 켈트족 부디카 여왕의 거병이나 66~70년에 이스라엘에서 대대적인 거병이 일어난 원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재미있는 이벤트를 자주 만들어냈고, 황제로서 선정을 펼칠려고 노력하긴 했고, 개인으로서는 호감가는 젊은이였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았다. 또한 그 최후가 매우 비참했고, 네로 사후 내전이 일어났으며, 이후의 황제들이 네로보다 낫기는 커녕 자격 미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네로가 사망한 후 후대 황제들의 행태에 질린 근위대와 시민들이 네로 탄핵을 후회했다고 한다.

할리우드 장르에서는 전통적으로 악역담당이다. 최근에 발매된 '라이즈 선 오브 로마'라는 액션게임에서는 네로가 죽지 않고 늙고 연로할때까지 통치하고 있었다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게임상 설정으로는 네로가 두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콤모두스' 와 '바실리우스'이다(...). 콤모두스는 네로처럼 로마사에서 못난 황제로 악평이 높고[8] 바실리우스[9]는 원래 왕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비잔틴 제국에서 황제를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게임내용이 궁금한 사람은 유튜브에서 공략동영상을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하지만 상당히 잔혹하고 폭력적으로 애들 보기는 부담스러운 게임이기에 성인들만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당연하게도 미성년자 구매불가 게임이다.
----
  • [1] 브리타니쿠스의 누이
  • [2] 10두라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는 4두마차로 하여간 반칙.
  • [3] 네로를 이기면 사형 판결을 받기 때문에 선수들은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 [4]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로마 남자들에게 가장 큰 불명예는 남자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 [5]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씨족 명
  • [6]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저택(黃金邸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 [7] 다만 세네카가 정말로 네로 암살에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8] 다만 네로는 파르티아와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한편 대화재 진압과 전후 복구사업을 몸소 지휘하는 등 그나마 실드를 쳐줄 수 있는 구석이 군데군데 있지만, 이쪽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 [9] 라틴어식 발음으로, 그리스어식으로는 '바실레이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