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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last modified: 2015-09-30 15:30:42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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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1.1. 개요
1.2. 이름
1.3. 생애
1.3.1. 청년시절에서 회심하기까지
1.3.2. 사제로서의 활동
1.4. 어록
1.5. 그밖의 이야깃거리
2.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1.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생몰년도 : 354~430

라틴어: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영어: Saint Augustine of Hippo
프랑스어: Saint Augustin d’Hippone (생 오귀스탱 디폰)
이탈리아어: Sant'Agostino d'Ippona (산타고스티노 디포나)
에스파냐어: Agustín de Hipona (아구스틴 데 이포나)
포르투갈어: Agostinho de Hipona (아고스티뉴 드 이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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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354년 11월 13일 누미디아(현재의 알제리 지역) 타가스테(Thagaste)에서 출생, 430년 8월 28일 히포 레기우스에서 선종. 4세기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초대 교회 교부(敎父) 중 하나이며 교회학자.

그리스도교 교파를 막론하고 두루두루 존경받는 성인이다. 축일은 가톨릭 및 서방 교회에서는 8월 28일, 정교회 및 동방 교회에서는 6월 15일. 상징물은 주교관과 지팡이, 학자를 상징하는 책과 깃펜, 조개, 비둘기 등이 있으며, 양조업자, 인쇄공, 학자수호성인이다. 그의 신학적인 사상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보나벤투라, 교황 베네딕토 16세 등 가톨릭 관련 인물들은 물론 마르틴 루터, 장 칼뱅 등의 개신교 신학자와 르네 데카르트,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두루두루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의 빛나는 업적과 성덕(聖德)은 대체로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고, 젊었을 때는 양아치가 따로 없는 생활을 했다(...). 그런 쓰디쓴 청년시절의 인생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와 그 후 하느님을 찬미하는 자신의 마음을 써낸 것이 바로 『고백록(Confessiones)』.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성인'이라는 기준에서 그런거지 당시 기준으로는 딱히 양아치스러운건 아니다.

1.2. 이름

본명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혹은 아오스딩으로 알려져 있다. 정교회에서는 복자 성 아우구스티노라고도 하며, 개신교나 철학계에서는 그냥 "아우구스티누스"나 "어거스틴", "오거스틴" 이라고 한다. 교회학자로서의 칭호는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이다.

가톨릭 및 정교회 내부에서는 이 인물을 원칙적으로 "아우구스티노"라고 호칭한다. 가톨릭에서는 정식으로 주교 회의를 통해 외국 성인명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안에 대해 발표한 바 있다. ( PDF 자료) (쉽게 풀어 설명한 기사.)

리그베다 위키에 한때 아우구스티노 표제어로 등록되어 있었으나 토론을 거쳐 현재의 아우구스티누스로 변경되었다. 관련 위키방 게시물 참고. 또한 추가 논의를 통해 관련 규정이 신설되었으니 이쪽도 참고.

1.3. 생애

1.3.1. 청년시절에서 회심하기까지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이교도 관리인 아버지 파트리치오(Patricius)와 그리스도인인 어머니 모니카(Monica, 축일 8월 27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성사는 받지 않았지만[1] 어머니에게서 양육되면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고, 370년에는 아들을 출세시키고자 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카르타고 대학에 들어가 수사학을 전공했다. 아버지 파트리치오는 371년 사망했는데 점점 방탕해져 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도 기가 막혀서 죽기 직전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반면 철학에 심취하게 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비상한 머리에 스스로 도취하여 어머니의 바람과는 점점 멀어져 갔고, 372년에는 때부터 어떤 여자와 동거하기 시작하면서 '아데오다투스'[2]라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왜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생활만 했는지는 불명이나, 훗날 아우구스티노 본인이 고백록에서 "떳하게 결혼한 여자가 아니라 지각 없이 들뜬 내 정욕이 찾아낸 사람이었다"고 했다. 아데오다투스는 372년에 태어나 388년에 일찍 죽었고, 그녀와의 동거는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모자간의 연을 끊고 만다.

카르타고에서의 공부를 끝낸 아우구스티노는 수사학 교수 자격증을 따 고향으로 돌아와 수사학교를 세웠지만 영 맘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카르타고로 가 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 동안, 아우구스티노는 철학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진리와 악 등의 존재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 답을 마니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373년에는 열렬한 마니교도가 되었는데,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읽은 뒤로는 회의감이 더 커졌다. 382년, 그는 마니교를 떠나 신 플라톤주의[3]에 빠졌는데 그것도 잠시, 383년에는 아예 카르타고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로마로 가 수사학 교수 일을 했고, 학생이 도무지 학비를 안 내자 질려서 이듬해 밀라노로 옮겨간다. 역마살 돋네. 본래 로마는 어머니 모니카가 모르게 갔던 것인데, 이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려와 아들을 찾아 밀라노까지 쫓아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인생의 턴포인트가 되는 인물인 암브로시오(축일 12월 7일) 주교를 만난다. 그는 대단한 말빨(...)을 지닌 암브로시오 주교의 첫 인상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의 강론을 틈 나는 대로 경청하곤 했는데, 딱히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진리를 얻고자 함이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말을 저렇게 잘 하나를 알아보려 한 것이었다. 계기야 어쨌든 그는 암브로시오 주교와 그의 강론 내용에 점점 이끌리고 있었는데, 그 때는 마침 자신의 여러 내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때였다. 더군다나 그와 함께 살던 고향 친구가 성 안토니오 아빠스의 극도로 절제된 수도생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때는 쾌락에 빠진 노예인 자신을 한심스럽게 생각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심란한 아우구스티노는 자택 정원을 거닐며 고민하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라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뭐라도 집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들어와 눈에 있는 책을 집어서 펼쳐봤는데, 그건 바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 로마서(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13~14절 (공동번역성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충격을 받아 개종을 결심한 아우구스티노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 암브로시오 주교 밑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받는다. 또한 이듬해인 387년 4월 13일에는 친구 알리피오(Alypius, 축일 8월 15일)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32세. 한편 15년 동안 동거했던 여인은 그의 회심을 알고 곁을 떠났는데, 전해지는 내용에 따르면 그녀 역시 회심하여 수녀원에 들어가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

1.3.2. 사제로서의 활동

387년, 그리스도인이 된 아우구스티노는 아들 및 친구와 더불어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 모니카는 도중에 오스티아에서 세상을 떠났고, 388년에 아프리카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수도 공동체 비스무리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머지 않아 아들도 죽고 말았다. 후에 수도회원들은 점점 늘어났고 공동체는 단순한 수도생활을 넘어 일종의 성서 연구소로 탈바꿈한다. 아우구스티노가 꾸려놓은 수도 공동체는 한참 후인 13세기에 그가 정립한 회칙을 바탕으로 탁발수도회인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로 정식 발족한다.

391년, 사제가 되지 않고 수도 생활을 더 하고 싶은 36세의 아우구스티노는 동료를 더 모을 생각으로 히포로 출장을 가 미사에 참례했다. 아우구스티노의 명석함과 타의 모범이 되는 보속의 생활은 이미 그곳까지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히포의 주교 발레리오가 강론 중 히포에 새로운 사제가 필요하다고 한 순간 사람들이 다짜고짜 아우구스티노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아우구스티노는 졸지에 발레리오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게 아닌데 싶은 아우구스티노는 울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주교가 되지 못해 서운한가 보다 생각했다고 한다(...).

395년에는 부주교가, 발레리오 주교가 세상을 떠난 396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수사학 지식까지 총동원하여 히포의 백성들을 위해 사목활동에 집중함은 물론이고, 자신이 직접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었으며, 삼위일체, 은총론(은혜론) 등의 영성신학을 연구하고, 방대한 양의 각종 저술활동을 통해 교회를 공격하는 영지주의(그노시스), 나투스, 라기우스, 아리우스파 등 각종 이단들을 향해 쉬지 않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 중에는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마니교도 있었다.

427년에는 아리우스파로 개종한 반달족로마 제국을 약탈하며 북아프리카를 반달쳐들어왔고, 그들을 피해 타 지역에서 사람들이 히포로 몰려들어왔을 때 아우구스티노는 거처를 제공하는 등 그들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430년에는 히포까지 포위되었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이 공들여 이룩한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병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8월 28일, 아우구스티노는 시편 7장을 읊으며 7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4. 어록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말라."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라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하느님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다(quimirum si non comprehendias? Si enim comprehendis, non est deus)."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지 않을 때는 대답을 알고 있지만 막상 묻는 자에게 설명하려면 대답을 알지 못한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바꾸려는 용기."

"정의가 없다면, 권력이란 강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In the absence of justice, what is sovereignty but organized robbery?)"

"신념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믿는 것이며, 그(신념)에 대한 보상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혹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좋게 하라. 그러면 좋은 시대가 된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만든다. 우리의 형편이 달라지는데 따라 시대도 달라진다."

여담으로 일찌기 창세기천지창조와 실제 우주 모델이 다르다면서, 창세기가 비유인 걸 인정해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헛소리 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정말로 창조과학 주장자를 위한 개념찬 발언이다. 영어판은 다음과 같다.

"Usually, even a non-Christian knows something about the earth, the heavens, and the other elements of this world, about the motion and orbit of the stars and even their size and relative positions, about the predictable eclipses of the sun and moon, the cycles of the years and the seasons, about the kinds of animals, shrubs, stones, and so forth, and this knowledge he holds to as being certain from reason and experience. Now, it is a disgraceful and dangerous thing for an infidel to hear a Christian, presumably giving the meaning of Holy Scripture, talking nonsense on these topics; and we should take all means to prevent such an embarrassing situation, in which people show up vast ignorance in a Christian and laugh it to scorn. The shame is not so much that an ignorant individual is derided, but that people outside the household of faith think our sacred writers held such opinions, and, to the great loss of those for whose salvation we toil, the writers of our Scripture are criticized and rejected as unlearned men. If they find a Christian mistaken in a field which they themselves know well and hear him maintaining his foolish opinions about our books, how are they going to believe those books in matters concerning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the hope of eternal life, and the kingdom of heaven, when they think their pages are full of falsehoods and on facts which they themselves have learnt from experience and the light of reason? Reckless and incompetent expounders of Holy Scripture bring untold trouble and sorrow on their wiser brethren when they are caught in one of their mischievous false opinions and are taken to task by those who are not bound by the authority of our sacred books. For then, to defend their utterly foolish and obviously untrue statements, they will try to call upon Holy Scripture for proof and even recite from memory many passages which they think support their position, although they understand neither what they say nor the things about which they make assertion."[4]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 I- XIX-39, A.D. 408).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의로운 전쟁"론을 주장했고, "매춘처녀와 결혼한 부인을 (강간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이라는 식의 주장으로 마르틴 루터 등에게 엄청 까였다(...)하필 마르틴 루터가 성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신부였으니...

1.5. 그밖의 이야깃거리


2014년에 사망한 故 신해철의 세례명이 바로 이 성인의 이름이다. 다만 신해철이 세례를 받았던 시절엔 표기법이 지금과 달라 장례식 자리에선 '아오스딩'으로 표기되었다.
생전에 신해철은 자신의 세례명이 된 이 성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타락이 꼭 나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예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언급한 것이다.

이 세례명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추천했는데, 훗날 가수가 된 신해철은 자신의 미래 모습을 모친이 예견한 것 같다고 회고한 바 있다.
http://blog.naver.com/rubystarll/100128789515

2.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생몰년도 : ?~604

1번 항목과는 동명이인. 이런 사례가 있기 때문에 히포, 캔터베리 등 교구 지역명을 통해 분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고 잉글랜드로 건너가, 앵글로색슨 민족을 개종시킨 인물이다. 이때 세례를 준 사람들만 해도 켄트 왕국의 왕과 왕비, 그리고 수천명의 신하들이 포함되었다고.(…) 그 외에도 주교가 된 이후로는 12개의 교구들을 새로 창설하는 등 맹활약을 펼쳐, 그 결과 601년에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성 오거스틴 수도원을 세우기도 했는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해당 부지는 성 오거스틴 대학교 교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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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유아세례가 그리 보편적이지는 않았고, 뒤늦게 세례를 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2] Adeodatus. A deo datus로 풀어서 해석하면 하느님이 내린 선물이라는 뜻이 된다.
  • [3] 주의해라, 플라톤의 사상에 빠진게 아니라 플라톤주의에 빠졌다.
  • [4] 라틴어 원문: "Plerumque enim accidit ut aliquid de terra, de coelo, de caeteris mundi huius elementis, de motu et conversione vel etiam magnitudine et intervallis siderum, de certis defectibus solis ac lunae, de circuitibus annorum et temporum, de naturis animalium, fruticum, lapidum, atque huiusmodi caeteris, etiam non christianus ita noverit, ut certissima ratione vel experientia teneat. Turpe est autem nimis et perniciosum ac maxime cavendum, ut christianum de his rebus quasi secundum christianas Litteras loquentem, ita delirare audiat, ut, quemadmodum dicitur, toto coelo errare conspiciens, risum tenere vix possit. Et non tam molestum est, quod errans homo deridetur, sed quod auctores nostri ab eis qui foris sunt, talia sensisse creduntur, et cum magno eorum exitio de quorum salute satagimus, tamquam indocti reprehenduntur atque respuuntur. Cum enim quemquam de numero Christianorum in ea re quam optime norunt, errare comprehenderint, et vanam sententiam suam de nostris Libris asserere; quo pacto illis Libris credituri sunt, de resurrectione mortuorum, et de spe vitae aeternae, regnoque coelorum, quando de his rebus quas iam experiri, vel indubitatis numeris percipere potuerunt, fallaciter putaverint esse conscriptos? Quid enim molestiae tristitiaeque ingerant prudentibus fratribus temerarii praesumptores, satis dici non potest, cum si quando de prava et falsa opinatione sua reprehendi, et convinci coeperint ab eis qui nostrorum Librorum auctoritate non tenentur, ad defendendum id quod levissima temeritate et apertissima falsitate dixerunt, eosdem Libros sanctos, unde id probent, proferre conantur, vel etiam memoriter, quae ad testimonium valere arbitrantur, multa inde verba pronuntiant, non intellegentes neque quae loquuntur, neque de quibus affirm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