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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최종 변경일자: 2015-12-31 04:11:01 Contributors

야구 선수를 찾으려면 이창호(야구선수) 참조.


"넷마블 팀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약 15년간 한국바둑의 주장이기도 하죠."
- 2010한국바둑리그에서, 당시 해설인 박정상 九단의 소개 멘트
2014년 이제는 한국바둑의 아이콘으로 진화
공식 홈페이지: http://www.leechangho.com

목차

1. 설명
2. 기풍
3. 바투
4. 약력


李昌鎬
Lee, Chang Ho
1975년 7월 29일 ~
전라북도 전주시 출생[1]

1. 설명

역대 최고의 바둑 기사

한국의 프로바둑기사. 프로 九단이다.[2] 별명은 강태공, 신산, 돌부처. 중국 언론에서는 大李(小李는 이세돌)라고도 한다.[3]

바둑이 생긴 이래 '바둑사 사상 최고의 천재는 누구인가'에 대해 항상 빠지지 않고 첫번째로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005년까지의 이창호의 전성기시절 주요기사 상대전적

공식 기록상 최강의 기사. 지금은 최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4],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를 지배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바둑계의 절대본좌라고 할 만하다.[5]그의 전성기때는 한중일의 모든 바둑기사들이 달려들어서 십 년을 넘게 연구해도 못 이기고 있다는 자조 어린 목소리도 심심찮게 나왔다.

7살 때 바둑을 배워 10살에 그 유명한 조훈현의 내제자(집에서 숙식을 같이하는 제자)로 들어가, 11세에 최연소 기록 2위[6]로 프로에 입단했다. 바둑을 배운 지 4년만에 입단할 정도이니 대단한 기재를 소유한 셈. 그리고 입단 시험도 10살 때 한 번 보고 떨어진 후 다음 해인 11살 때 통과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배운 지 3년만에 연구생 1조까지 올랐다는 계산이 나온다.다만 조훈현은 이창호의 이런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늦게 입단해서 정말 천재가 맞는가하고 의구심을 가졌다고 술회했다.대체 몇 살에 입단하길 바랬던 겁니까[7]

이창호는 프로기사가 된 후에도 남들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성적을 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13살의 나이에 바둑왕전 타이틀을 따냈다. 아무리 당시 한국기원의 선수층이 얇았다지만 조훈현, 서봉수 다음의 '도전 5강'(서능욱, , 김수장, 장수영, 성호)이 10년의 도전 속에서도 단 하나의 타이틀[8]만을 딴 것을 감안한다면 이창호의 13세 우승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다. 14세 때 타이틀 수를 늘리더니 15세 땐 조훈현과의 번기 대결에서 연이어 승리하여 한국 최고의 다관왕이 된다. 프로기사로 입단해도 빠르다는 소릴 듣는 나이에 이미 한국 프로 기사의 정점에 섰으니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현존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창호가 스승의 타이틀을 계속 빼앗아 오면서 집에 오면서 어색한 시간이 늘어 갔다.타이틀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스승님[9] 결국 조훈현평창동으로 이사를 할 때 분가하게 된다[10].

너무도 어린 나이에 한국 바둑의 정점에 서자 일본에서는 '일본기원과 바꾸더라도 이창호를 사고 싶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소년 이창호에 대해 일본 기사들은 강한 호기심을 가졌고, 공교롭게도 린하이펑이라는 거물급 기사와 세계대회(제3회동양증권배) 결승에서 격돌하는데, 이 커다란 승부에서 이창호가 승리하였다(3:2). 그리고 당시 일본의 최강 기사였던 조치훈 九단은 이창호와의 5번기 결승을 앞두고 조훈현에게 "제자한테 너무 무기력하게 지는 것 아닌가? 그래 가지고서 뭘 배웠겠는가"라고 말하고 "그럼 한번 둬 봐"라는 대답을 듣는다. 그 뒤 벌어진 번기에서 초반은 조치훈이 좋았으나 중후반 이창호의 추격에 2, 3국을 반집으로 내주면서 조치훈은 이창호에게 0-3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이창호는 누구보다도 어린 나이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뒤 기복없이 꾸준히 성적을 내 당시 절대본좌였던 스승인 조훈현을 결국 무관으로 만들어 버리고 1994년에 13관왕[11]을 하는 등 독주하였다. 이런 독주는 그야말로 우악스러울 정도였고 기간 또한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무려 15년이 약간 안 될 정도로 긴 세월이었다. 이 기간동안 이창호는 승률왕을 독식하였으며 일 년에 한 명 나타날까말까 한 80%대의 승률을 수 차례에 걸쳐 달성한다. 이창호 평생 승률이 76%이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전설인 셈.

우승 역시 통산 137번의 우승, 조훈현의 157번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국제대회 우승을 한 기사이기도 하다(2009년 통산 21회 우승).

스승인 조훈현과의 전적은 이창호가 훨씬 앞서지만 이창호와 조훈현의 대국은 언제나 최고의 관심사가 된다.[12]

어렸을 때는 국내에서와 달리 국제대회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이창호의 사실상 첫 세계무대 데뷔였던 요다 노리모토와의 특별대국을 보았던 오오다케 히데오는 "이창호의 바둑은 분명 강하지만 스승 조훈현을 이기는 데 너무 특화되어 있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하였다. 동생인 이영호 씨의 말에 따르면 보통 식사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기름기가 많은 중국요리를 먹고 나면 반드시라 할 만큼 탈이 났다고 한다. 초기에는 아예 굶기도 했으며 라면이나 김치를 챙겨 가기도 했다. 중국어에 능통한 이영호 씨가 중국에서 열리는 경기의 매니저를 자청한 이후부터는 대회장 주변의 패스트푸드점이나 일식집 등을 수소문해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해외 경력을 쌓아간 이후 (그래 봤자 20대 초반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승률을 과시하며 세계 바둑계를 학살하기 시작한다. 이창호는 17세 때 국제대회 최초로 우승한 이후 20대 후반인 2002년까지 국제대회 결승에서 무패행진에 가까운 성적을 거두었다.(딱 한번 1회 춘란배 결승에서 조훈현에게 패한바 있다.) 즉 결승에만 오르기만 하면 우승은 따논 당상인 셈. 90년대 중국 최강의 기사였으며, '이창호 빼고는 다 이겼던' 마샤오춘 九단을 만날 때마다 안드로메다로 보내 결국 재기불능으로 몰아넣었다.[13] 일본이나 중국은 스승 조훈현은 물론 서천왕(天王)으로 불리며 중국 킬러로 군림하던 서봉수 九단 역시 벅찬데 더 괴물이 나타났으니 할 말을 잃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창호를 거의 신으로 모실 정도이다. "그에게 지는 것은 한국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신은 인간보다 위대함을 알려줄 뿐"이라고 할 정도니. 심지어 자신이외계인도, 터미네이터도 아니다고 직접 해명까지하였다! 한 중국 네티즌은 '우리는 국가대항전에서 중국이 이기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지만 이창호가 지는 광경 또한 보고 싶지 않다.' 라는 표현으로 이창호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참고로 이 표현이 나온 시합에서 이창호는 혼자 살아남은 한국 대표로 중국과 일본의 대표 다섯 명을 연달아 박살내면서 한국팀의 우승을 이끌어냈다(…).

전성기 때는 수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우승률(1등을 한 기전 수 / 출전한 기전 수)을 퍼센트로 기록했다거나(전성기 때의 우승률은 30퍼센트에 가까웠다고 한다.), 한국바둑을 아웃 오브 안중으로 여기고 일본, 중국 그네들끼리 '슈퍼'대항전을 만들어 한창 잘 놀다가, 이창호 이후 한국바둑이 득세하게 되면서 그 일중슈퍼대항전이 2류대회로 전락하면서 슬며시 사라졌다든지.

현재 바둑계를 주름잡는 이세돌, 구리, 콩지에가 20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세계 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듣기 시작하는 것은 이창호의 노화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세 기사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적수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창호가 건재했을 땐 이들마저 이창호보단 약했다는 것. 사실 많은 기사들이 20대 초·중반에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세계 바둑을 나눠먹는 것은 이창호의 노쇠 덕을 본 것이였다.

대표적으로 현재 구리, 콩지에에 이어 아슬아슬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세돌의 경우 1990년대 후반기인 17세 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나 이창호에 의해 항상 1인자로 올라서지 못했고, 이창호가 노화로 인해 기량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을 본다면 그만큼 이창호의 전성기 시절의 기량은 최정상급의 한 수 위에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세돌과 이창호의 상대 전적도 이창호가 아직 앞서며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번기 대결에서도 이창호가 5승 2패로 우위라는 점은 이창호가 그만큼 강했다는 얘기.

단지 현재 바둑계의 추세상 대부분의 기전이 속기인 데다 이창호의 강점인 정밀한 끝내기가 눈에 띄게 쇠퇴한 점을 감안한다면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성적을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창호와 비슷한 또래인 기사들은 한중일 통틀어 모두 한 물 간 것을 감안한다면 그나마 이창호니까 한국 랭킹 2위에 해당하는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스승의 업적들을 거의 물려받긴 했지만 단 두 가지 물려받지 못한 기록이 있다. 첫째는 전관왕, 둘째로는 연속 타이틀 홀딩 기록. [14]94년 왕위전 타이틀을 유창혁이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조훈현이 이룩한 전관왕 타이틀은 아직 그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 때의 아쉬움 때문인지 그 이후로 왕위전 만큼은 한 번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왔다. 흠좀무. 때문에 단일 기전 연속우승 기록이 현재 12연패. 이 기록은 조훈현의 패왕전 16연패 다음의 기록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왕위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창호의 기록이 다시 한 번 스승을 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이창호에게도 천적은 있다. 바로 일본요다 노리모토. 상대전적이 좋지 않다. 첫 단추(1990년대 초 한일신예대항전이란 형식으로 5번기를 벌여 1:3으로 패배))를 잘못 채운 탓인지, 이후 이창호는 요다만 만나면 이상하게 바둑이 꼬이곤 했다. 한때 상대전적 1승6패를 기록하는 등 계속 헤매다가 2000년대 들어서 상당히 만회하여 둘 간 승률이 거의 대등해졌다. 그리고 8:8 상태에서 제7회 농심배 최종국에서 만났고 이제는 명실상부 우위로 올라서나 했는데, 그만 패배. 요다는 여전히 만만찮았다. 이창호가 직접 "요다는 내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요다 九단에 따르면 이창호 九단의 바둑은 대부분 복기해 봤다고 한다.[15] 요다 九단에게 지고 나서는 한때 중국의 마샤오춘 九단에게 약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 이후 처절하게 발랐지만…2000년대 후반에 와서는 강동윤에게 맥을 못 추고 있다.

2005년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항 연승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당시 개인 기록이 꽤 부진한 시기였는데다가 한국팀의 나머지 인원들이 일찌감치 충격적인 광탈을 해 버린 나머지 한국팀에는 이창호 혼자만이, 중국과 일본팀에는 합이 다섯 명의 기사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느 신문에서는 혼자 남은 이창호가 다섯 명을 몽땅 박살내고 우승컵을 한국팀에게 가져다 줄 확률을 3% 미만으로 계산하기도 했을 정도. 오죽하면 한국팀 단장이 우승은 역시 어려울 것 같다는 인터뷰를 했겠는가…. 그런데 혼자 남은 이창호가 정말로 나머지 다섯 명을 몽땅 박살내 버리고 우승컵을 한국팀에게 가져다 주고 말았다! [16]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하지만 이 이후로 이창호의 부진이 꽤 길다. 무엇보다 전세계가 이창호의 바둑을 연구하기 시작하니 결국 중국의 구리 등의 기사나 한국의 최철한 등이 강력한 전투력을 앞세워서 이창호를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이창호 이후 끝내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현재는 신예 기사들의 끝내기 실력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것도 이유일 것이다. 또한 실수가 잦아지고 끝내기에서 미스가 속출하면서 예전처럼 둘 수 없는 이유도 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제 13회 LG배에서 우승한 구리에게, 세계 1인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질문하자 이런저런 말을 하고 말미에 하는 말이, "이창호에 비하면 이세돌과 나는 아직 멀었다."였다. 또한 휴직하기 전 명실상부 국내, 세계 1인자였던 이세돌은 이제 그만 1인자임을 인정하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국수에게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두 차례 이상 답했다. 이창호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여복이 너무나도 없는 편이라 35세까지 결혼하지 못했다.[18] 바람직하지 못한 사생활 때문에 결혼을 늦게 하는 일부 연예인들에 비해, 이창호는 매우 깨끗한 사생활을 보유하고 있었다.(…)그러나 현재 11세 연하의 바둑 전문기자 이도윤씨와 교제중이라고 한다. 2010년 10월 28일에 결혼을 하신다고 밝혔다! 많은 바둑인들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셈. 아시안게임은 어쩌실려고 결국 2010년 10월 말 쯤에는 결혼에 성공했다. 결혼식은 가족들과 친지들만 초청하고 바둑 관계자는 일체 부르지 않은 채 소박하게 진행했다고 한다. 다만 조훈현 국수 내외는 가족이라고 생각해서 초청했다고 한다. 2012년 3월 8일에 득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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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Unknown)]

DCinside 고전게임 갤러리에서 누군가가 이 사람이 오락실에서 철권 태그 토너먼트를 하는 사진을 짤방으로 올리면서 전형적인 안여멸의 모습이라고 깐 적이 있었는데 나이 지긋한 올드비들이 대번에 이분은 세계 최강의 프로게이머 이창호 九단이시다. 깝치지 마셈이라는 요지의 덧글을 달아서 데꿀멍한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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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Unknown)]

사실 이런 사진도 있을 만큼 소년기사 시절부터 격겜 팬이었다. 그가 18살 때 쓴 자서전(…)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오락실에 가서 또래 기사들과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했다고. "제가 또래 고등학생들과 비슷한 건 오락실 가서 '스트리트 파이터'를 재미있게 한다는 것 정도일까요."라는 인터뷰도 했고, 또 이후에는 철권 시리즈 역시 재미있게 했다고 한다. 연수로 따지면 격겜만 20년차. 다른 취미로는 탁구와 테니스, 보드게임을 즐겨 하는데, 동료들이나 지인들과 보드게임을 할 때도 생각을 엄청나게 많이 하는 편이라고 한다. 가장 자주 하는 보드게임은 부루마불.생각이 필요한가

여담으로 천재라고 모든 방면에 뛰어나지 않다는 표본이다. 조 국수의 부인 정미화씨의 증언에 따르면, 내제자로 들인 때, 머리조차 혼자 감지 못해 감겨줬어야 했다고 한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애지중지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인 성장이 늦은 편이었다. 물론 내제자로 처음 들어간 것이 10살때니 그나이에 혼자 머리를 감지 못하는 아이도 있긴 하지만, 하늘 같은 스승님의 사모님께서 머리까지 감겨주시게 했다니 민폐 중의 민폐. 한편 1996년, 한국바둑의 국보에게 병역 혜택을 주느냐 마느냐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시절이 있었다. 국회의원 105명이 연명으로 진정서를 내는 사건까지 발생하고 나서, 이창호는 논산훈련소에 입소한다. 훈련소에서 기본 병영훈련을 받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한다는 조건이었고, 소속 부대는 한국기원, 부대장은 한국기원 이사장…#[19] 덤으로 훈련소에서 훈련하는데 집합을 할 때면 항상 이창호가 없었고 교관이 내무반에 가서 보면 군화끈을 못 매서 쩔쩔매고 있었다한다. 원래라면 바로 기합이었겠으나 국회의원 105명의 빽(…)이 있는 이창호를 기합주기는 부담스럽고 해서 고민하던 교관이 결국 찍찍이 군화를 만들어 신겼다고.장군의 아들도 누리지 못하는 특혜[20] 조훈현의 집에서 지낼 때도 운동화 끈을 못매서 정미화씨가 찍찍이를 신기거나 신발끈을 대신 매줬는데 그게 군대 무렵까지도 이어졌던 듯.바둑관계자들이 우스개로 하는 소리 중, 조훈현은 무슨 일을 하든 성공했을 것 같은데 이창호는 모르겠다는 말도 있다. 이거 갖고 이창호가 아스퍼거 서번트라는 드립은 치지 말자. 사회생활 멀쩡히 하고 계시니까

2010년 1월 16일 제2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64강전에서 17세의 연구생에게 패배, 탈락했다.#관련기사 그냥 진 것도 아니고 100수도 못 채우고 불계패.[21]아무래도 사이가 붙어있는게 틀림없다. 하지만 사이래봤자 이창호에겐 상대가 안……

2010년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혼자 남은 상황에서 중국의 류싱, 구리, 하오를 꺾으며 3연승, 한국의 8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2010년 11월 한국 랭킹이 6위까지 떨어지고, 승률도 60%가 안 나왔다. 입단한 이래 최악의 성적. 이 때문에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 멤버가 되었으면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나, 11월 23일 광저우기원에서 열린 남자단체전 예선리그 2라운드에서 한국 남자팀의 승리에 일조, 특히 또 하나의 '이창호 킬러'로 불릴 정도로 근래 상대 전적이 우세하던 창하오 九단을 다시금 제압하여 역시 이창호다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형이 좀 져준다고 기고만장하지 말란 말이다! 그러나 25일 일본과의 대국에서는 이세돌과 함께 짜고 지는 바람에 대표팀은 최철한을 비롯해 나머지 3인이 분발하여 승리, 간신히 결승에 올라갔다. 아, 형님 희망고문 매너요.(;;;)

2010년 11월 26일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남자 단체전 결승전에서 제1장으로 나서 중국 랭킹 3위 구리를 관광보내며, 금메달 획득에 일조했다. 오전 예선 6R에서 패해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점심 먹고 와서…구리 역시 이창호 못지않게 부진을 겪고 있긴 하지만, 대국의 내용은 전성기의 이창호 바둑을 연상케하는 묵직한 내용이었다는 것이 중계 해설의 평. 그러나 그와 같은 방을 쓴 다른 이기사는 콩지에에게 무릎을 꿇은 걸 보면 자는 동안 정기를 빨아드신 듯 하다

바둑 팬들은 부진한 때에도 진로배, 농심신라면배 등 단체전에서는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던(2010년 제11회 대회 포함 농심신라면배 성적 19승 3패, 승률 86%[22]) 이창호가 믿음을 깨지 않고, 이번에도 활약을 해줘서 '역시 이창호…'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2011년 2월 14일 최철한 九단에게 패배하며 데뷔 이후 첫 무관…

2013년 1월 7일 랭킹 1위 이세돌, 떠오르는 신성 박정환을 연파하며 KBS 바둑왕전 결승에 진출했다. 만약 우승한다면 2010년 국수전 이후 3년여만에 우승컵을 추가하는 것.

2013년 2월 1일 패자조 결승에서 이세돌 九단을 격파하고 결승에 진출한 박정환 九단과 결승전을 치뤄 결승 1국에서 승리했으나 2월 2일 2국과 2월 4일 열린 최종 3국에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이번 패배로 박정환 九단과의 전적은 6승 10패가 되었고 랭킹도 14위까지 떨어졌다.

2013년 4월 6일에 열린 제9회 한국물가정보배 예선 2회차에서부터 5월 6일에 벌어진 제18회 박카스배 천원전 예선 3회차까지 12연승을 달렸다. 랭킹도 10위권에 재진입.

2013년 7월 16일 벌어진 제1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대표선출을 위한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 대회에선 이세돌 九단도 탈락해 많은 이들이 이변이라고 할 정도.[23]

2. 기풍

이창호의 바둑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자면 두터움, 침착함, 형세판단, 끝내기다. 강태공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느려 보이나 두터운 행마를 주무기로 삼았다. 스승인 조훈현이 쾌속행마로 제비라는 별명을 얻은 것을 생각하면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게 있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다른 기사들이 아무리 유리해도 두텁고 침착하게 두어 정확한 끝내기로 마무리해 역전시키니 그 중압감과 패배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루이나이웨이가 "이창호 九단과 바둑을 두면 참 이상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데도 바둑은 언제나 불리한 것 같다."는 말을 남길 정도. 결국 상대는 '초중반에 유리한 국면으로 만들지 않으면 후반에 밀릴 수밖에 없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무리수를 두고, 그러다가 후반에 이창호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창호가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어서 분명 형세는 자신이 앞서는데도 무표정한 이창호를 보며 자멸하는 경우가 많다.[24]

조훈현이 이창호의 전성기에 계속 당했던 패턴이 바로 이것으로, 초중반 조훈현 쾌속행마로 우세 -> 조훈현의 무리수 -> 이창호의 끝내기로 역전 식으로 계속 당했다. 아직도 끝내기와 형세판단에 있어서는 이창호가 최정상급임을 인정받고 있으며, 하물며 전성기 때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기원 기사실에서 모여 관전할 때 끝내기 즈음이 되면, "창호 어디갔어? 창호한테 물어봐!"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왔다고 한다. 양재호에 따르면 이창호는 극초반부터 계가를 한다고 한다. 프로라면 모두 가능한 일이지만, 계가를 지루해하지 않고 종국까지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이창호를 비롯해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고수 치고는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에게도 반집 승부가 많이 나는 기사 중 하나이다. 그때문에 하수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부질없는 착각에 빠지곤 하는데 몇번만 더 둬보면 그 반집 차이가 타 기사의 백집 차이보다 크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반집 승부를 하는 이유는 반집으로 이기나 불계로 이기나 이기는 것은 똑같기 때문. 또한 절대 살릴 수 없는 대마를 잡지 않는 습관도 있는데, 그 이유는 대마를 잡으려면 운과 실수로 살아날 수도 있지만 대마를 죽이지 않고 계가로 가면 반드시 이길 수 있어서라고 한다.

그의 강점을 김진명의 소설 고구려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열 집이 있다고 하면 열 집을 모두 가지려는 자와 네 집은 내주고 여섯 집을 가지려는 자가 싸우면 같은 기량을 가지고 있을 경우 후자가 반드시 이긴다고 한다. 물론 이창호는 후자에 속하는 기사. 이 역시 스승 조훈현 九단이 언급한 적이 있는 부분인데, 이창호가 프로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초반에 유리했던 경우에도 대마를 노리거나 큰 집 차이로 이기는 걸 노리지 않고 작은 집 차이로 이기는 승부를 많이 하자 혹시 어떤 연유로든 큰 집 차이 승부를 못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창호와 그러한 대국들에 대해 복기를 하면서 넌지시 물어보았는데 이창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큰 집 승부를 하려면 대마를 잡아야 하는데 대마를 잡기 위해 준동하다간 상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마를 살려 주는 대신 다른 곳에서 차근차근 대가를 치르게 하면 작은 집 차이로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백 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말은 반상에서 수십 년 정진한 노년 기사들이 새파란 신생 기재들에게 일러 주는 충고에 알맞지, 중학생 정도의 어린아이가 스스로 깨우치고 실행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어린 기사라면 당연히 싸움을 좋아하고 상대를 통쾌하게 누르는 대승을 원하기 마련이다. 이창호는 당시 승부의 본질을 꿰뚫는 확고한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역대 최강 천재인가 이는 조九단이 신문 인터뷰에서도 한 적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가 바둑TV에서 해설을 하던 때에도 대국 중 잠시 쉬는 시간에 상대 진행자와 이창호에 대한 대화를 잠시 나누다가 직접 담담히 말한 적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2005년 이후 부진이 계속되면서[25] 기풍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먹잇감이었던 하오에게 세계대회 결승에서 두 번 만나 두 번 다 준우승하기도 하고, 국내에서는 목소리가 이상한 후배나, 갑자기 나타나 대마를 때려잡는 후배 또는 이창호 잡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닥치고 전투 이후 대마를 잡아먹는 바둑도 자주 보여주신다. 대단한 것은 기풍도 바뀌고, 예전처럼나이 탓이다 정확한 형세판단을 보여주지 못하면서도 항상 정상권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제 '이창호 스타일의 바둑은 계속 이겨서 재미없으니까 저렇게 둔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부처가 아수라의 칼을 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기풍의 변화에 대해 본인의 자서전에서 기존의 기풍(초반에 안정적으로 두어서 불리하게 출발하더라도 중후반에 타개와 끝내기로 역전)을 유지하다가는 본인보다 끝내기가 더 정밀한 후배 기사들에게 밀릴 것 같아서 초반부터 전투를 통해 이득을 취하고 가는 방향으로 기풍을 바꾸었다고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자서전인 이창호의 부득탐승('11년 8월 발간)을 읽어보길 바란다. 본인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이야기까지 담아놓은 책이다.

여담으로 이영도의 장편소설 피를 마시는 새의 등장 인물 중 하나인 엘시 에더리의 바둑 행마 묘사는 이 사람의 행마를 참고한 듯 하다. 하지만 엘시가 주장하는 전쟁의 진선미에 따르면 그의 바둑풍은 이창호가 아닌 쾌속행마 조훈현이나 무쌍 이세돌가 모티브였어야 할 것 같다. 물론 바둑을 두지 않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그런 화풍까지 자세히 반영한다는 것은 힘드니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편, 엘시 에더리 이름 자체가 이세돌 이름의 아나그램이라는 설도 있다.

3. 바투

바투에서는 돌부처답지 않은 황당한 행동들과 이어지는 표정들로 많은 분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특히, 헤드셋을 거꾸로 끼거나 황당한 초읽기는 백미! 이런 모습을 선보이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30대가 넘은 분인데 귀엽다는 의견이 많다.



4. 약력

  • 조훈현 九단 문하.[26]
  • 세계 최연소 타이틀 획득(13세, 제 8기 바둑왕전)
  • 최연소 세계챔피언(17세, 제 3기 동양증권배).
  • 연간최다대국(1989년, 111국), 최다연승(41연승), 연간최고승률(78승 12패, 86.7%), 연간최다승(90승), 국내 16개 기전 사이클링히트 달성(1994년, 제18기 기왕전 우승), 최다관왕 기록(13관왕).
  • 문화체육부에서 은관문화훈장(2등급) 서훈(1996년).
  • 5년연속 최우수기사(1995년~99년).
  • 그랜드슬램 달성(2003년, 제4회 춘란배 우승)
  • 2008년 2월 5일 현재 통산 135회 우승(비공식 기전인 타이다배와 세계최강결정전 포함)
  • 역대 최연소 1500승 달성(35세, 제 28기 KBS바둑왕전)

1986년 : 입단(11세 1개월, 조훈현 九단에 이어 최연소 입단기록 2위)
1988년 : 제8기 KBS바둑왕전 우승(첫 타이틀 획득, 세계최연소)
1990년 : 국수, 최고위, 신왕전 우승. TV바둑아시아선수권 준우승. 41연승. 78승 12패로 승률 86.7%
1991년 : 명인,최고위,대왕, 왕위, 박카스, 제왕 우승
1992년 : 동양증권배 우승(최연소 세계챔피언). 명인, 최고위, 대왕, 비씨카드,박카스, 제왕, KBS우승.
1993년 : 국수, 명인, 대왕,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박카스, 제왕, SBS 우승. 90승으로 통산최다승 기록보유.
1994년 : 국수, 명인, 최고위,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SBS, KBS 우승. 국내 16개기전 사이클링히트 달성. 13관왕으로 통산 최다관왕.

1995년 : 국수, 명인, 최고위,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SBS, KBS 우승. TV바둑아시아선수권 우승.
1996년 : 九단 특별승단(세계대회 우승자 자격으로). 국수, 명인, 최고위, 대왕, 왕위, 국기, 기성, 천원 우승.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세계바둑최강 결정전 우승.
1997년 : 국수, 최고위, 대왕, 왕위, BC카드, 배달왕, 기성, 천원, 테크론 우승

1998년 : 명인, 최고위, 대왕, 왕위, 기성, 천원, 테크론 우승
1999년 : 기성, KBS, 최고위, 명인, 왕위, 천원 우승
2000년 : 기성, 왕위, 명인 우승
2001년 : 통산 1백회 우승. 응씨배, LG배 우승. 기성, 패왕, 명인 우승
2002년 : 통산 1천승 달성. 농심신라면배 우승. TV바둑아시아컵 우승. 기성 방어. 패왕 우승, 왕위 우승. 도요타덴소배 결승진출, 명인 우승. KBS바둑왕전 우승. 제4회 농심辛라면배 한국대표(한국우승)

2003년 : 제1회 도요타덴소배 우승, 제46기 국수전 우승. 제4회 춘란배 우승. 제2회 KT배 4강. 제7회 LG배 준우승(대 이세돌). 제14기 기성전 우승(11연패). 제2회 CSK배 바둑아시아대항전 한국대표.
제22기 KBS바둑왕전 본선. 제8기 LG정유배 우승. 제37기 패왕전 준우승. 제16회 후지쯔배 3위. 제37기 왕위전 우승(8연패). 제8회 삼성화재배 8강. 제5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TV바둑아시아 본선. 제5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제34기 SK엔크린배 명인전 우승.

2004년
제5회 농심신라면배 한국우승(5연패).
제47기 국수전 준우승(대 최철한, 2승3패).
제8회 LG배 우승(대 목진석, LG배 통산4회 우승,세계대회 통산19회 우승 달성).
제15기 기성전 준우승(대 최철한).
2004한국바둑리그 본선(피더하우스 주장).
제38기 왕위전 우승(대 이세돌 3-2, 9연패 달성).
제9기 LG정유배 우승(대 박영훈 3-0, LG정유배 통산 5회 우승).
제23기 KBS바둑왕전 우승(대 조한승 2-0, KBS바둑왕전 통산 7회 우승).

2005년
제48기 국수전 준우승(대 최철한).
제6회 농심신라면배 우승 리드(5연승, 한국 6연패).
제5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우승(2연패 달성).
제2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
제39기 왕위전 우승(대 옥득진, 왕위10연패 달성).
제1기 한국물가정보배 준우승(대 박영훈 九단 0:2)
제10기 GS칼텍스배 프로기전 준우승(대 최철한 九단 2:3)
제10회 삼성화재배 준우승(대 뤄시허 九단 1:2)

2006년
01.22 제1기 원익배 우승(대 박영훈).
02.24 제7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준우승, 대 요다 九단).
03.02 제49기 국수전 우승(대 최철한, 탈환성공).
06.27 제3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2연패, 대 박정상).
07.19 제40기 왕위전 우승(11연패,대 이영구).
08.11 제18회 TV바둑아시아 준우승(대 왕시 五단).

2007년
01.24 제11회 삼성화재배 준우승(대 창하오 九단 1:2)
02.09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주장 2연승(한국팀 우승)
03.16 제50기 국수전 준우승(대 윤준상 四단 1:3)
04.25 KB국민은행 2007한국바둑리그 주장(광주 kixx)
07.09 제20회 후지쯔배 준우승(대 박영훈 九단 0:1)
07.16 제4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준우승(대 강동윤 五단 1:2)
07.18 제41기 KT배 왕위전 우승(12연패, 대 윤준상 3:2)
08.17 제3회 중환배 우승(대 박정상 九단 1:0)-세계대회 통산21번째 우승!
12.03 제26회 KBS바둑왕전 우승(대 조한승 九단 2:1)

2008년
02.02 제3기 십단전 우승(대 목진석 九단 2:0)-135번째 우승
02.20 제9회 농심배 한국대표 출전
00.00 KB국민은행 2008한국바둑리그 출전(광주 Kixx)
07.08 제21회 후지쯔배 준우승(대 구리 九단 0:1)
08.05 제5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대 목진석 2:0)
10.21 제10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출전
12.11 제7회 춘란배 결승진출

2009년
01.08 2008바둑대상 우수기사상, 남자인기기사상, 연승상 수상
03.16 제27기 KBS바둑왕전 우승(대 이세돌 2:1)- 개인 통산 137번째 우승
04.23 제6회 응씨배 준우승(대 최철한 1:3)

2010년
01.18 역대 최연소 1500승 달성
11.26 광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단체전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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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본관경주 이씨라고 한다.
  • [2] 9단으로 표기되어 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단급 표기는 아마추어의 경우 아라비아 숫자, 프로 기사의 경우 한자로 표기함을 원칙으로 한다.
  • [3]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광저우 조직위에서 발행한 소식지에 한국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로 박태환, 장미란, 이창호를 꼽았다. 바둑팬이 아닌 한국 국민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바둑과 이창호의 중국 내에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기사라고 할 수 있다.
  • [4] 2014년 1월 기준 랭킹 16위.
  • [5] 이창호가 약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프로게이머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신예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서 네임드 기사들의 자리가 협소해진 것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물론 이창호의 전성기에 바둑에 대한 연구가 약했냐고 하면 또 아니게 되므로 꼭 프로게이머식으로 연상하기도 힘들다. 전 세계 모든 게이머들이 그의 경기만 죽자사자 연구하면서 파훼하려고 했지만 10년을 넘게 본좌를 차지한 프로게이머… 정도로 생각하면 쉽다.
  • [6] 1위는 9세에 입단한 조훈현
  • [7] 위 각주에 있다시피 조훈현 국수 본인이 최연소 입단 기록(9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들과 전혀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을 거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 [8] 강훈이 한 번 우승
  • [9] 조훈현 九단의 부인인 정미화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이창호가 밤 늦게까지 복기를 하고 있을 때 창호 방에서 바둑둘 두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곤 했다고 한다. '남편을 꺾기 위한 것인가'라고 생각될 때가 많았다고…. 더불어 승리한 제자와 패배한 남편을 한 차에 태우고 오는 날에는 만감이 엇갈렸다고 한다.
  • [10] 원래 계획은 조훈현이 이창호를 五단 또는 성인이 될 때까지 데리고 있으려 했다. 이것이 일본에서 불문율로 정해진 내제자가 독립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임에도 이창호가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
  • [11] 이창호 기사가 전관왕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조훈현 국수의 전관왕은 1980년 9개 기전, 1982년 10개 기전, 1986년 11개 기전으로, 우승 타이틀 수에서는 더 앞섰으며, 이 기록은 2013년 현재까지 최대관왕 기록이다.
  • [12] 2010년에 KB바둑리그에서 사제 대결이 한 차례 있었는데 역시 이창호의 승이었다. 그러나 바둑 내용은 승부라기보다는 사제간 연구 대국을 두는 듯 신수가 난립했고, 해설을 하던 유창혁 九단은 "어허, 재미로 바둑 두나요"라는 말까지 했다. 대국 후 복기에서는 이미 30대 중반이 되었건만 이창호가 머리를 푹 숙인 채 조훈현의 "이러면 어떻게 돼?" "이게 더 좋지 않았나" 등의 물음에 모기만한 목소리로 "…예"로 일관하며 20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 [13] 전체전적 31전 26승 5패를 기록하고 있다. 국제기전 결승전에서 4번 만나 4번 전승.
  • [14] 최다승기록도 있기는 한데 이건 앞으로 따라잡을 가능성이 크니…전성기가 지난 지금 저 두가지 기록은 갱신하지 못할 듯하다.
  • [15] 2000국이 넘는데…
  • [16] 이창호는 이 대항전에서만 5연승, 농심배 통틀어 13연승을 기록했다.
  • [17] 팬들 사이에는 이창호가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상대가 눈치 못 채게 일부러 져 주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혼자 다 해먹으면 한국 바둑계가 망하니까… 물론 세계적인 승부사가 그런 일을 벌일 리는 천부당만부당하다. 이창호도 흐르는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다는 걸 농담 삼은 이야기 정도로만 알아 두자.
  • [18] 이창호 九단은 1975년생이다.
  • [19] 법적인 요건을 채우기 위한 몇 가지 조치도 취해졌다. 병무청에서 인정하는 국제 예술 대회 2위 이내에 든 예술가는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는데, 바둑을 예술로 보고 3개 대회(동양증권, 후지쯔배, 응씨배)를 병무청에서 인정하도록 한 것. 지금은 병무청에서 바둑을 예술이 아닌 체육으로 보고 있어서 아시안게임 우승하면 되나 광저우 때만 정식종목이었고 그 뒤로는 되지 않고 있다.
  • [20] 사실 국회위원은 건너뛰고라도 훈련소 간부 중 바둑팬이 하나라도 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군 간부 중에는 바둑팬이 의외로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바둑이나 장기나 넓은 의미에서 모의전투니까.
  • [21] 이때 승리한 한태희는 그해 연구생 1등으로 입단하였다
  • [22] 저 3패가 한국팀이 농심배를 가져가지 못한 2번의 기록과 일치한다. 19승이라는 기록도 혼자 남은 불리한 상황에서 연승하면서 쌓은 기록들, 특히 2006년 농심배의 폭풍 5연승은…참고로 이창호를 제외한 다른 한국 기사들의 농심신라면배 총전적은 45승 43패.
  • [23] 사실 이변이라 하기도 뭣한 게… 이창호 九단은 9회부터 계속 선발전 탈락 중이었으며 13회까진 와일드카드로 농심배를 출전하였다. 이세돌 九단 역시 10회, 12회를 제외하면 선발전을 통과한 적이 없었다.
  • [24] 다만 바투에서는 표정변화가 조금씩 나타났는데 팬들은 대환호.(…)
  • [25] 부진이라지만 세계대회 우승 1회, 준우승 9회이다. 국내기전은 여전히 계속해서 우승하시는 중이다…
  • [26] 조훈현 九단의 내제자 이전에는 작고한 故전영선 七단 문하였으며 전영선 七단이 이창호의 기재에 놀라 조훈현 九단에게 소개, 지도기 후 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