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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

최종 변경일자: 2017-05-13 01:13:12 Contributors

목차

1. 프로필
2. 소개
3. 일생
4. 생전의 영상
5. 죽음
6. 트리비아



1. 프로필

|본명 장덕 (張德)
생년월일 1961년[2] 4월 21일 ~ 1990년 2월 4일
출신지 서울특별시
혈액형 O형#
신체 158cm,46kg[3]
가족 1남 1녀 중 둘째
학력 테네시주립대학교 실용음악학과
데뷔 1975년 노래 '꼬마인형'

2. 소개

28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한 한국의 여자 싱어송라이터. 여자 존 레넌

한국 음악계 최초의 현대적인 여자 싱어송라이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덕 사후 90년대가 되어서야 이상은, 김윤아, 임현정 등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당시 한국 음악계의 수준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코드워크(코드의 진행)와 보이싱(화성을 구성하는 음의 배치를 바꾸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단번에 신드롬이 될 만큼 뛰어난 멜로디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가 활동했던 시기[4]에는 여자 싱어송라이터는 커녕, '여자가 작곡을 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기였으나[5], 그러한 시대의 편견을 아름다운 음악만으로 뛰어넘었던 진정한 천재 싱어송라이터.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유재하, 김현식 등의 음악가들과는 달리 사후 거의 완전히 잊혀져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일부 여성단체는 여성이라서 잊혀졌다는 글을 쓰기도 했지만 알려지지도 못했다. #

3. 일생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6개월만에 설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오빠 장현과 함께 '비운의 남매'라고도 불린다.

장덕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이는 그녀의 아버지 영향이 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덕의 아버지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서양화가였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이라 할 수 있었다. 장덕이 음악에 재능을 보인것은 아버지 영향이 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삶이 불행해진 것 역시 아버지 잘못이 컸다. 장덕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 그녀의 부모는 이혼했고, 장덕은 도봉산의 사찰인 청기와집에서 1년간 살았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뿐철학' 이라는 사이비 동양사상에 심취해서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그녀의 오빠인 장현도 남의 집 가정교사를 해 밤 늦게 들어왔다고 한다. 이러니 삶이 꼬인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다.

결국 사춘기 들어서면서부터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기도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그녀의 어머니가 남매 듀엣인 '현이와 덕이'를 결성시켜 주었고 미 8군 쇼 무대에서 공연을 하다가 방송국 PD들 눈에 띄어 TV로 데뷔하는 계기가 된다. 장덕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안양예고 1학년 때인 1977년 1회 MBC 국제 가요제에서 그가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이 진미령의 노래로 입상하면서였다. 당시 작곡가와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미는 게 당시 대회 규정이었기 때문에 장덕이 직접 나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 후에도 3연속 입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재혼 문제로 손목을 긋고 자살소동을 벌이기에 이르렀고 결국 1979년 10월 그녀의 어머니가 살던 미국으로 건너갔다. 잘 알려진 얘기는 아니지만, 1981년 결혼까지 했었다. 만 19세에(...) 그러나 미국에서의 삶이 순탄치는 못해서 향수병에 빠졌고 전자 포커게임으로 대학 등록금을 다 날리기도 했었으며 결국 1983년 이혼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다고 한다. 그 후 1983년 귀국했고 한때 오빠와 다시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하기도 했었지만 큰 인기를 끌지 못했고 이에 장덕은 솔로 활동을 준비하고 오빠 장현은 장덕의 매니지먼트를 전담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86년에 나온 음악이 바로 '님 떠난 후'이다. 당시 요 톱 10에서 5주간 1위(골든컵)를 했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만 하다. 또한 1987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ABU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당시 여가수 중에서는 외모가 빼어났기 때문에 예능프로그램이나 단막극 드라마에도 자주 나왔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1990년 설날 특집 드라마 "구리반지"의 주연 및 주제가를 불렀다. 아이돌 가수 연기겸업의 원조.

4. 생전의 영상

대표곡 중 하나인 '소녀와 가로등'. 1986년경 녹화된 영상이다.

장덕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님 떠난 후' 역시 1986년의 영상이다.

대표곡 중 하나인 '나 너 좋아해'. 참고로 1987년의 영상이다.
참고로 가운데에 있는 남자는 가수 김학래이고 우측은 조영남이다.

장덕의 음악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장덕이 작곡한 이은하의 곡이다. 1987년의 영상.

5. 죽음

그러나 그 행복할 것 같은 시간도 오래가지 않았다. 1989년 낸 앨범인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실패하고, 그녀의 오빠인 장현이 설암에 걸렸다. 그런 가운데에서 장덕은 불면증까지 걸렸고 수면제로 잠을 청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1990년 2월 4일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6]에서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를 다량 복용해 신음하고 있는 것을 그의 매니저가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숨졌다.당시 기사.친절하게 주소까지 알려준다.
흔히 자살이라는 말은 많지만 자살은 아니다.(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장덕이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던 것은 그녀가 이전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당시 알려진 사인은 세 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해 상승 작용에 의한 쇼크 사망이었다. 장덕의 죽음이 자살로 잘못 알려진 데에는 약물 복용에 의한 죽음이라서 그런 듯하다.

오빠인 장현은 투병 중이었고 설암으로 말을 할 수 없어서 누이의 죽음에 인터뷰로 슬프다면서 메모로 보여주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반년 뒤인 1990년 8월 16일 결국 장덕을 따라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선희는 자신의 시집에 장덕 추모시를 싣기도 했다.
2010년 최진영 자살 이후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등 잠시 회자되는 듯 했지만 이내 잊혀졌다.

6. 트리비아

  •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팬에게 다섯 번이나 납치를 당했었다고 한다...(...)

  • 그녀의 아버지인 장규상 씨는 딸이 죽었다고 하자 그녀의 시신을 집으로 가져와 소생시키겠다고 심령술을 동원했었다고 한다.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시 관련기사. 굳이 조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장덕의 영과 소통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는데 그 영이 세상이 더러워서 다시 오기 싫다고 했다나. 뭐 솔직히 소생시키는 게 가능하지도 않았는데 차마 실패했다고 하기 싫어서라는 말도 있다.

  • '현이와 덕이'는 미국의 카펜터스와 엮기기도 했다. 아무래도 두 듀엣 모두 남매 듀엣이었던데다가 장덕과 카렌 카펜터가 둘다 안타깝게 운명을 달리 했던 것도 연관되는 듯 하다.

  • 일본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것 같다. 유튜브에 올라온 몇몇 장덕 노래 중에 다수는 일본팬이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오카다 유키코처럼(이 사람은 자살했지만) 생전 큰 인기를 얻고 일찍 죽어서인 듯. 여담이지만 오카다 유키코와 장덕은 좋아하는 색깔이 흰색으로 같다.

  • 2013년 3월 16일 불후의 명곡에서 장덕 추모 특집을 방영하여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만 정작 장덕 팬 사이에서는 원곡을 너무 망쳤다는 혹평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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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밑의 글귀는 그녀의 생전 친필.
  • [2] 프로필상으로는 1962년인데 묘비에는 1961년 4월 21일이라고 적혀 있다.연예인들이 나이를 한두살씩 줄여 말하는 것처럼 아마 장덕 본인도 나이를 한 살 줄여 말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묘비에 오기가 났을 가능성은 생각하기 어려우니... 장덕의 묘비 (참고로 저 묘는 장덕의 오빠인 장현의 묘로 충북 음성에 있다고 하고 시신은 화장되어서 남이섬 상류에 뿌려졌다고 한다.)
  • [3] 프로필에서 언급.
  • [4] 80년대 초반에 활동을 중단한 시기가 있어, 활동 시기는 70년대 후반, 그리고 80년대 중반~후반에 걸쳐 있다.
  • [5] 1984년 데뷔한 이선희조차, '여자가 감히 작곡을 한다'는 편견 때문에 1996년 10집에 와서야 자신이 작곡한 곡을 앨범에 실으며 본격적인 싱어송라이터 활동을 할 수 있었다.
  • [6] 2001년에 마포자이로 재건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