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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최종 변경일자: 2015-04-15 21:46:17 Contributors

중화민국 역대 총통
(초대) 초대 대행
(초대) 장제스 리쭝런

중화민국 역대 총통
대행 복귀, 2대, 3대, 4대, 5대 대행
리쭝런 장제스 옌자간

< 193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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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 리스 심프슨 장제스, 쑹메이링 1938 -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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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신 대만 달러 지폐에 나온 장개석.

목차

1. 출생과 성장
2. 북벌반장전쟁
3.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
4. 제2차 국공내전의 패배
5. 국부천대 - 대만 이주 이후
5.1. 본토수복의 꿈과 무산
6. 평가
6.1. 혁명가 시절부터 집권까지
6.2. 난징 정부 시절
6.3. 인재 불신
6.4. 한국(조선)과의 관계
6.5. 대만 통치기 평가
7. 2010년대 이후의 평가
8. 트라비아
9. 참고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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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대만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이때가 79세였는데 많이 노쇠했음을 사진으로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9년은 더 살았다. 그래서 UN에서 대만이 쫓겨나는 꼴을 보고야 말았다.

본명 : 蔣中正(장중정), 자 : 蔣介石(장개석) / Chiang Kai-shek [1]
"나는 중국이다. 중국는 나 없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 - 신생활운동의 실패를 비판한 외국 고문인 도널드에게 장제스가 대답하길.

중국의 군벌, 군인, 정치가이자 중화민국 초대 총통. 그리고 대만 본성인들에게는 천하의 개쌍놈 근대 중국(또는 대만)의 아버지란 평에서부터 잔인하고 무능한 군사독재자란 평까지 다양한 평이 공존한다.

총 재임 25년 282일. 중간의 1년 38일을 더하면 1948년 5월 20일부터 1975년 4월 5일로 26년 320일. 전 항목에는 실질적으로 50년 집권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있었는데, 쑨원은 장제스를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일이 없고 장제스는 한민, 왕징웨이, 오중카이 등과 경쟁하면서 쑨원의 후계자 자리를 쟁취했다. 장제스는 오랫동안 잘쳐봐야 군사지도자에 해당했다. 그가 난징정부의 수뇌의 자리에 오른 1928년에도 왕징웨이의 우한 좌파 정부와 광시성 파벌들이 반항하고 있었고 국민당에 저항하는 군벌들도 많았다. 그를 중국의 지배자로 봐도 되는 시점은 1928년에 2차 북벌이 마무리된 시점은 되어야 한다. 그래도 20년이 추가되니 근 50년 한게 맞긴 하네?

1. 출생과 성장

장개석의 이름은 사실 중정(中正)이다. 개석(介石)은 (字). 대만에서는 장중정이라 불리고, 나머지 한자 문화권에서는 장개석(장제스)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아명은 상서로운 시작이란 뜻의 뤼위안(서원 瑞元), 족보 이름은 주태(周泰)삼국지의 그 주유평?, 학명[2] 존경의 의미로 선총통 장공(先總統 蔣公)[3] 그래서 대만에서 F-5 전투기를 라이센스 생산할 때 별명을 중정호라고 붙였다.

장개석은 장성 펑화현에서 중산층 상인 집안 태생이었지만, 일찍 아버지를 잃은 후로 삼촌들의 농간으로 인해 유산을 받지 못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머니가 과부란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며 심지어 10살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4] 장개석의 어머니 왕채옥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일찍 사별한 충격으로 잠시 비구니가 되기도 했던 여잔데 22세의 나이로 45세의 장개석의 아버지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좋지 않았는데다가 남편을 잃고 나서는 생계를 위해서 다른 지방으로 떠났는데 이방인이란 이유로 백안시를 당했다. 관리들이 장개석을 감옥에 넣었던 것도 장개석 일가가 타향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5]

1906년, 장개석은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여 어머니를 설득한 후 바오딩(保定) 군관학교에 입학하며, 졸업 후 좋은 학업 태도와 성적을 인정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 시기에 장개석은 혁명을 품고 중국동맹회에 입회하며, 같은 저장성 출신인 중국동맹회 간부인 천치메이(진기미)로부터 호감을 얻고 그의 정치적 제자이자 심복이 되었다. 동시에 상하이 암흑계의 거물이었던 천치메이는 장세스에게 황진룽(황금영), 두웨성(두월생), 장소림(장샤오린), 장징강(장정강), 다이촨셴(대계도), 천궈푸(진과부), 천리푸(진입부) 등을 소개해 준다.

이들은 장개석의 일생에 엮인 암흑계의 인물들이다. 황진룽, 두웨성, 장샤오린 모두 상하이 암흑계의 3대 대부이며, 특히 두웨성은 청방의 수장이자 장개석의 비밀 후원자였다. 장징강은 상하이의 거부이자 국민당의 원로로 장개석이 당 총재가 되게끔 만들어 주었다. 다이촨셴은 장개석과 의형제를 맺어 훗날 중화민국 고시원장직을 역임한다. 진과부와 진입부는 진기미의 조카들로 장개석의 충복이 되어 국민당 조직부, CC단, 중앙조사통계국(남의사(藍衣社)를 의미한다.) 등의 수장이 되며, 중화민국 4대가족인중 진씨(천씨) 일가를 이루게 된다.[6]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천치메이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장개석은 천치메이의 정적인 타오청장(도성장)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병원에서 쏘아죽이기도 했다. 장제스의 측근들은 타오청장이 장제스를 죽이려고 해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그 소스가 어디까지나 장제스 찬양 전기에서만 나오는 말이고 나머지 기록들은 장제스가 다짜고짜 타오청장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장개석은 진기미와 함께 원세개 타도를 위해 여러차례나 봉기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얼마후 천치메이가 자금을 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외출했다가 여섯명의 괴한에게 암살당하자 좌절하여 10년 가까이 상해 암흑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32세의 나이로 14세의 천제루를 만나 두번째 결혼을 한다.

1921년 쑨원(손문)이 국민혁명 운동을 이끌며 광동에 자리를 잡자 장개석은 쑨원을 따라 광동으로 가며, 곧바로 쑨원의 경호 임무를 수행하였다. 장개석은 쑨원을 이상론자라고 비웃는 천중밍과 노선 차이로 자주 마찰을 빚었고 상하이와 광저우를 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1923년 광동 군벌 천중밍(진형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총탄과 포화가 난무하던 시내를 뚫고 쑨원과 제2차 호법군 정부가 피신해 있던 군함 영풍함[7]에 승선하여 쑨원을 죽을 때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이 그가 두각을 드러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류전환, 리쭝런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의 도움으로 천중밍을 축출하고 광저우를 다시 정복한 이후 새로이 건립된 황푸군관학교의 교장을 맡기면서 장개석은 점차 국민당군의 실력자가 된다.

2. 북벌반장전쟁

1926년, 중산호 사건에서 국민당 좌파의 장개석 납치 음모(?)를 뒤엎으면서 국민당의 정부의 가장 강력한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후한민, 왕징웨이(왕정위) 같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쑨원의 후계자이자 국민당군의 지도자로 오르게 된다. 사실 이 중산함 사건에 대해선 말이 많은데 정말로 장제스 납치 시도가 있었단 말, 장제스가 있지도 않은 납치 시도를 조작하여 일으킨 사건이란 말, 그리고 당시 반국민당 언론이었던 자림서보가 내놓은 장제스의 국민당 좌파 토사구팽설이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제스는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친소련, 친좌익 성향이었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저우언라이의 귀뜸도 무시하고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있었다. 중산함 사건 전날까지 장제스의 집에는 긴장한 공산당원들이 들락였는데 자림서보는 국민당 좌파들이 국민당 우파를 없애기 위해 장제스의 힘을 빌리려고 했고 장제스는 수락한 척하면서 거꾸로 국민당 좌파를 조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설하고 이후 그는 북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북양군벌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중산함 사건으로 싹수를 보인 그가 북벌로 힘을 얻어 소련 고문 보로딘 해임 등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우한 정부는 장제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그를 숙청하려고 했는데 이에 장제스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한 직후인 1927년 4월 12일 "해 사건"[8]를 일으켜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동년 2월우한(武漢) 국민정부를 공격해 국민당 내 공산당 세력을 거의 씨를 말려버렸다. 이후 장개석은 갓 스물이 된 아내 천제루를 갖다버리고 쑨원의 처제이자 학식과 지성을 겸비한 쑹메이링(송미령)과 결혼하였다. 이때 장제스는 천제루에게 쑹메이링과의 결혼은 오로지 중국 통일을 위한 정략결혼일 뿐이니 5년 후에 그녀와 재결합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 자신의 난징 정부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이미 천제루는 그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후였다. 그나저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긴 했다. 부처님의 대리인, 닛뽄군과 마오쩌둥

하지만 장개석은 북벌 뒤에 여전히 큰 세력을 자랑하던 위샹(풍옥상), 시산(염석산), 리쭝런(이종인) 등의 군벌 실력자들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한다. 사전에 국민당원으로 가입했으면서도 3년 동안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며 주판을 튕겨보던 장쉐량(장학량)이 마침내 장개석이 승리할 즈음 봉천군을 이끌고 국민당 편에 가담한다.

3.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

군벌의 세를 꺾는 데 성공한 장개석은 이를 갈아오던 공산당 토벌을 위해 "초공작전"을 시작하지만 이번에는 만주사변(일본의 만주침략)이 장개석의 계획을 망쳐놓았다. 만주사변으로 인해 자신의 근거지에서 쫓겨나면서도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않는 방침을 고수했던 장학량 등의 군벌들은 "빈대를 잡으려다가 군벌 자신들의 세력을 모두 날려먹는" 초공작전에 반발하여, 비밀리에 공산당의 주은래와 결탁하여 음모를 꾸민다.

마침내 공산당에 대한 마지막 공세를 점검하러 시안으로 온 장개석을 장학량이 연금하는 서안 사건이 발생한다.[9] 결국 장개석은 장학량의 "공산당과 화해하고 일본을 물리치라"는 요구조건을 수용하기로 하고 풀려난다.[10] 이렇게 내키지는 않지만 2차 국공합작은 실행되었다.

이로서 일본은 중일전쟁을 발발시킨다. 장개석은 결과적으로 충칭(중경)으로 피난을 가서 오랫동안 버티며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개석은 엄청난 일본군을 붙잡아 두어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중대한 역할을 했다. (유럽 전역에서 독소전쟁의 역할과 비중이 과소평가 된 것처럼, 이 지점은 어느정도 재평가 받아야할 지점은 있다.) 중국이 대륙에서 붙잡아둔 일본군은 약 400만으로, 필리핀, 뉴기니나 그밖의 섬에 전개한 일본군 전체의 4배에 달했다. 이 병력이 태평양이나 일본 본토로 동원되었다면 미국도 상당한 희생을 각오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당군이 잘해서 이긴 것만은 아니었다. 일제와 민국의 단두대 매치 장개석의 강력한 항일 투쟁 의지는 높이 평가할만하지만 문제는 의지만 있었을 뿐 일제에 맞설 능력까지 따라주진 않았다. 그나마 엄청난 숫자의 머릿수와 광활한 영토를 바탕으로 소모전, 지연전은 전개했지만 그뿐이었다. 실질적 전쟁은 분명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국민당군이 주력으로 수행했던 것은 맞다. 중공에 친화적이거나 국민당에 비판적인 역사가들은 오송 크리크 등으로 알려진 상해 전투에서, 중앙군은 장비와 병력이 타 군벌 출신 부대들보다 뛰어났음에도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했으며, 심지어 군벌군이 일본군과 협력하거나 의도적으로 전투를 방관하여 공산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송에서 장개석 직속 군대가 얼마나 날아갔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무리에 가까운 주장이다.

오히려 이러한 의혹은 공산당의 행위에 들어맞는다는 증거가 더 많다. 중공에 비판적이거나 국민당을 옹호하는 시각의 역사가들은 마오쩌둥이 팔로군에게 항일전쟁에서 '어떠한 결정적인 역할도 수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명백히 전쟁 와중에 의도적으로 전투를 회피하고 홍군의 세력을 온존하기 위한 지시였다는 것. 세력을 보존하면서 땅따먹기에만 주력한 결과 홍군의 병력은 20만 명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실제로 홍군의 대일본 전투 가운데 별로 쓸만한 공적이 없는 것도 사실.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와 장융의 "마오" 참조. 실제로 기껏해야 백단대전을 비롯한 매우 간헐적인 전투에서만 홍군이 참여했으며 국민당이 대일투쟁에서 200명이 넘는 소장급 이상 전사자를 낼 동안 홍군은 좌관급까지 합쳐서 10명도 안되는 전사자를 냈다. 훗날 엄청난 속도로 국민당을 쓸어버렸던 국공내전에서의 홍군 장교 전사자는 그 열배에 달했다. 홍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훗날 국민당을 상대하던 수준 이하로 싸웠단 소리다. 게다가 상해 사변에서 장개석이 일본군을 막기 위해 4개 사단을 빼내자 철수하는 국민당군의 뒤통수를 쳤던 것이 항일을 목소리로만 부르짖던 공산당이었다. 임표, 팽덕회는 백단대전에서 이기고도 모택동에게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질책까지 당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장개석에게도 비판점이 많다. 장개석은 작전을 지휘할 때 야전지휘관에게 전선을 위임하지 않고 간섭했으며, 군벌 군대를 총알받이 취급하면서 보급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11] 그는 구 군벌출신 장성들과 자신의 파벌인 황푸군관학교 출신 외 이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홀대했다. 하지만 장개석의 이런 행동을 비판하기만 하기도 그런 것이 우선 장개석 자신의 코부터가 석자라서 제대로 지원해줄 물자와 물자 수송 수단이 빈약한 터였다. 통설관 달리 장개석은 미국에게서 받은 것이 별로 없었을 뿐더러 중국의 공업화는 당시 빈약해도 너무 빈약했기 때문에 중국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물자는 형편없었다. 게다가 장개석은 자신의 기반인 난징 지역을 떠나서 연고가 없는 중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세금을 거두는 것조차 현지 유력자들의 협조를 얻지 않으면 안될 판이었다. 당시 중화민국은 행정 체계가 움직이는 것도 신기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소위 군벌 군대라는 자들은 서안 사건 당시에 장개석의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서안을 날려버리자고 주장하여 쑹메이링(송미령)을 대경실색하게 만든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을 장개석이 믿으면 그게 신기한거다.

한편 이 시기 장개석은 처형이자 쑨원의 아내인 쑹칭링(송경령)과 대립이 극심해졌다. 송경령이 소련에 가 있는 도중에 소련에서 새 애인"들"을 만났다고 하는 등의 날조 기사를 퍼트렸을 정도. 이유는 국공합작을 지지한 쑨원의 노선에 대한 장개석의 반감 때문이었다. 더구나 송경령은 그 당시 국민당의 독재정책과 공산당 탄압에 반기를 들고 국민당을 탈당해 버렸으며, 쑨원의 아내라는 이유로 국모 대우를 받고 있었다.

4. 제2차 국공내전의 패배

장개석은 여하간 중일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중국은 2차 세계 대전 승전국 지위를 얻었으며, 대만을 반환받았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꿰어차면서 그야말로 아시아에서 일본을 대신한 "지도 국가"가 되었다.[12]

그랬기에 여러 삽질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 시점까지의 상황은 장개석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는 미국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나치 독일[13] 다양한 국가에게 전술 지원을 받고, 항공기까지 보유한 레알 밀덕후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까지 공산당을 몰아붙이면서 통일에 성공하는 듯 하지만, 미국의 계속되는 압력이 그에게 화를 불러왔다.

그가 미국의 마셜 장군의 사실상 강압적인 정전권고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계속하려 했던 것은 만주는 당시 중국 최고의 공업지대이었기에 전략적 중요성이 높았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장개석은 공산당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어쩌면 유방을 살려두어 화를 부른 초한지를 교훈으로 삼았을지도)

하지만 이번에는 물주의 압박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46년 6월 7일 마셜의 개입으로 장개석이 진격을 정지하고 정전 명령을 내린 사건은, 장개석 스스로도 내 일생 최대의 실수라고 회고할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바로 전날 6월6일 임표가 하얼빈의 포기를 건의할 정도로 중공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이 하얼빈을 잃는다면 중화민국군이 당시 중국 전체 산업생산력의 90%를 차지하던 동북지역의 산업 기반을 모두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정전으로 인해 중화민국군 내부의 전력 이동 정지[14]까지 겹치고...OTL

결국 그 시기를 피크로 하여 국민당은 기울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렸다가 오히려 소련군의 지원으로 무장을 대거 강화한 공산당은 린뱌오군이 만주에서부터 반격을 개시했고, 이어 패퇴하면서 국민당군을 분산시키던 펑더화이, 가 지휘하던 다른 방면군들도 일제히 반격을 하면서 전세를 뒤집고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막상 자기가 위기에 몰리자 장제스는 공산당에게 "장강(양쯔강)을 경계로 천하를 반분하자"고 제의하면서, 이를 위해 1949년 1월 21일 총통직을 사퇴하고 그 자리에 리쭝런을 앉혀 공산당에 협상했으나, 공산당이 다 잡은 맹수를 순순히 놓아줄 리가 없었다. 공산당은 평화협상을 하면서도, "전범 장개석을 넘겨야 협상에 응하겠다"고 요구했는데, 이는 진짜 오너였던 장개석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공산당은 4월 20일 장강 이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공산당이 장강을 건너 오자마자 난징상하이를 비롯한 국민당의 주요도시는 모두 공산당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다. 국민정부는 임시수도인 광저우가 위태로워지자 10월 12일 내륙의 옛 임시수도 충칭으로 이동했고, 11월 29일 충칭마저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자 청두로 다시 이동했으며, 12월 7일 타이베이로 철수했다.그야말로 안습의 역사 장개석은 쓰창(西昌) 대본영을 순시하고 돌아온 후 12월 10일 타이베이로 떠났고, 이후 두번 다시 대륙 본토로 돌아오지 못했다.

5. 국부천대 - 대만 이주 이후

결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개석은 대만으로 도주하여 무려 40년[15]간 계엄령을 내리고,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어떤 단체와 비슷한 수준의 독재정치를 펼치다가 사망했는데 6살 아래 숙적인 마오쩌둥(1976년 9월 9일)보다 1년 5개월 빨리 갔다. 하지만 너무 오래 살다보니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뺏어가는 치욕도 보게 된다(1971년 10월 25일). 결국 UN 탈퇴.

그래도 그 아들 장징궈[16]는 소련으로 가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적도 있었고,[17] 대만인 차별 철폐와 부정부패 척결에 애를 쓰는 등 "어떤 나라"2세보다는 훨씬 나은 정치를 폈다. 앞서 말했듯 사실 장개석 자체도 대만으로 건너온 이후부터는 부정부패가 패배의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대대적으로 부패 제거에 노력했다. 물론 때 늦은 일이었지만.

죽을 때 유언마작 좋아하는 중국인답게 "련보등 한 번 못 해보고 죽는 게 한이다."라고 남겼다는 설이 있지만 출처 불명. 혼수상태로 죽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남긴 유언은 없다. 다만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동포를 구하라,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중국을 구하라'로 말했다는 설이 있다.[18]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보고 굉장히 착잡했나보다.


장제스의 영구는 지하에 매장되지 않고 지상에 토관묘 형식으로 안치되어 있는데, 언젠가 중화민국이 대륙 본토를 수복하면 그때 본토의 고향에 매장해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19] 그의 유해가 안치된 타오위안(桃園) 현의 지후(慈湖)는 장제스가 생전에도 고향과 비슷한 경치라며 종종 방문했다고 전해지며,[20] 현재 중화민국군 헌병대가 관리 중이다. 1988년 타계한 아들 장징궈 전 총통도 비슷한 형태로 안장되었고, 장제스의 유해와는 약 1km 정도 거리에 위치한다.

5.1. 본토수복의 꿈과 무산

장제스는 대만으로 퇴각한 직후부터 줄곧 무력을 통한 본토수복을 포기하지 않았고,[21] 이는 대만에서 국민당 정권이 대만 본성인들의 민주화 요구를 계엄령과 권위주의 지배로 억누르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당시에는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가 미국과 군사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22]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정부가 1950년대의 대약진운동 실패,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 등으로 인한 정치-사회적인 불안정, 소련과의 대립 등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던 점에서 나름 승산이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1960년대에는 이른바 '국광'(國光)이라는 이름의 보다 구체화된 본토수복 계획을 세우고, 중국 동남부 해상에서 다수의 비밀 군사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키피디아의 관련 항목 그러나 이들 작전의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갔고, 1970년대 미중관계 개선과 중화민국 정부의 UN 축출로 인한 외교적 고립이 가중되면서 더 이상 실행되지 못했다.

현재 중국이 마오쩌둥, 저우언라이가 꿈꿨던 공산주의 중국보다는 장제스가 꿈꿨던 자본주의 강국 중국에 더 가까워졌단 점에선, 역설적으로 장제스가 중국대륙에서 가졌던 비전은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잃었음에도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민주화가 멀었잖아 장제스가 잡고 장징궈가 대륙까지 통치했음 지금 중국도 민주화되었을텐데

6. 평가

국내에선 장개석이 그 거대한 대륙을 공산당에게 뺏기고 섬으로 튄 무능한 쪼다(...)라는 인식이 강했고, 이 항목을 포함한 리그베다 위키 전반도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여 무능의 극치인 인간이라는 투의 서술이 많았지만 이는 승자인 중화인민공화국에게 편중된 편협한 평가이며 뚜껑을 열어보면 다르다.. 엄밀히 따지자면 장개석은 세운 공도 많으니 특히 중일전쟁 시기에 그 공이 두드러진다. 장개석은 당시 중국에서 꼬물거리던 수많은 중국 지도자 워너비 중에서 그나마 가장 나았던 존재라서 그 자리에 올라갔던 것이고[23] 중화민국의 병크로 지적받는 점도 청조 붕괴 이후 워낙 개막장이었던 중국 상황에서 어쩔 수 없던 면이 강하다.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이뤄야 할 목표치가 안드로메다급이었던게 가장 큰 문제였다.(...)

6.1. 혁명가 시절부터 집권까지

천치메이(진기미)의 오른팔이던 꼬꼬마 혁명가 시절부터 쑨원의 곁으로 조금씩 접근하던 시절은 사생활이 문란했던 것말곤 딱히 깔 게 없다. 애초에 자금도 인맥도 없는 듣보잡 청년 혁명가가 병크를 저질러봐야 얼마나 저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이후 장제스가 중국에서 좀 주목할 만한 인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영풍함 사건으로 천중밍의 공격에 위기에 처한 쑨원을 구원하면서 그의 심복이 되면서인데 이때부터 1차 북벌 직전까진 오히려 장제스 군대는 대민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군기가 잡혀 있어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받는 군대로 인기가 드높았다. 나중에 부패에 찌들어 허물어지는 국공내전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 하지만 1차 북벌시절부터 탄옌카이, 탕셩즈, 바이충시 등의 군벌들을 본격적으로 흡수했고 쑨촨팡, 장쭝창 등과 싸우면서 휘하 소군벌들을 대거 사들이다시피 빨아들이면서 군대의 기강은 해이졌다.

그리고 정치적으론 국민당의 장군 중 하나에 불과한 장제스였지만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 좌파들을 습격하면서 실력자로 떠올랐고 나중에 상해 사변을 통해 공산당과 좌파들을 아주 개발살냈다. 우한에서 저항하던 왕징웨이 좌파 정부도 펑위샹과의 협약을 통해 공산당을 갖다버렸다가 결국 굴복해서 난징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이전까지 친소 좌파로 분류되어 대표 우파인 후한민 파벌 등에게 빨갱이라고 경계를 받던 장제스였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스탈린에게 장제스의 성분을 의심할 바가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차였는데 그렇게 됐다. 이때 장제스는 이전의 혁명가의 면모를 버리고 대대적인 살육을 벌여 전 중국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6.2. 난징 정부 시절

국민당은 1920~30년대 연간에 토지개혁을 시도했다.[24] 그 외에도 관세자주화 및 통화의 일원화, 국내 통행세 철폐, 조세개혁 등에서 노력했다. 이 때문에 1936년런던 채권시장에서는 그의 경제개혁이 성과를 반영하여 중국국채이자가 일본국채의 이자보다 저렴한 조건으로 발행되기까지 했다.[25] 그의 옹호자들은 그의 정권 자체가 연합정권의 형태였기 때문에 토호세력의 반발에 밀려 정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문제라니까!

실제로 이런 개혁을 바탕으로 장제스의 난징 정권은 위안스카이 이래 가장 풍족한 재정을 자랑했다.[26] 기반이 부족했던 그가 중국 역사에서 명나라 이후 처음으로, 역사상 두번째로 북벌을 성공시켰던 원동력도 이런 유능함에 부분적이나마 기인했다. 오호 북벌의 카리스마!!

군사적 무능함도 어느 정도는 변명할 수 있는 것이, 300만에서 최대 1천만에 달했던 대군은 대다수가 장학량, 염석산, 풍옥상, 이종인 등의 군벌 출신의 오합지졸들이었다. 1929년의 '편견회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나, 군벌들의 반발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문제는 2차 국공내전의 패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1천만 대군이 있다고 해서 이들이 무슨 현대식 무기로 잘 무장한 군대를 상상하면 안되는 것이 어제까지만 해도 비적질을 하던 그야말로 도둑떼도 섞여 있고 제대로 된 무장도 못 갖춘 일이 허다했다. 애초에 중국의 공업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 이 상황에서 이들을 잘 무장시킨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훈련이나 규율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나마 이 무능한 군대가 장개석 말을 잘 들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심지어 옥상을 필두로 왕정위, 과의 이른바 "반장개석 국민당 3인방"은 장개석을 제거하기 위해 공산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다. 광서군벌 이종인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산서의 옌시산(염석산, 閻錫山)은 "산서성 먼로주의"(…)를 선포하고 반독립정권을 구축했다.

장개석의 직예군은 다른 군벌군에 비하면 그나마 쓸만했지만 당시 열악한 인프라 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 군의 질은 한계가 있었고 그나마 정예라는 장개석의 중앙군은 상해에서 분전하긴 했지만 결국 개전 초기에 삽시간에 60%가 궤멸당하는 꼴을 보였다. 그런데도 누군 또 장개석은 일부러 소극적으로 싸웠다고 까댄다. 어쩌라고...

사실 군사부문 보다 장개석이 혹독한 평가를 받을 것은 부정부패다. 이 부패는 장개석의 인척인 공씨, 송씨 등이 가장 악명이 높았다. 공상희의 가문은 '양자공사'를 통해서 양쯔강을 통한 수운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고, 송씨가문의 경우는 미국의 원조물자를 빼돌려서 막대한 치부를 했다. 측근부터 막장.

경제정책도 유능한 것은 못 된다. 바로 그 탐관오리 공상희가 세계 대공황 당시 경제 장관이었다. 또한 중일전쟁으로 장강삼각주 일대의 경제적 기반을 상실당하면서 은본위제가 붕괴된 마당에 재정적자를 이유로 화폐를 마구 찍어내 막대한 인플레이션[27]을 불러왔다(…).[28] 국공내전 패배 이후 대만으로 건너간 장개석은 부패가 패배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부패 척결에 애를 썼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강력한 지도력을 좋아하다 못해 준파시스트화하여 여러 인권 문제를 일으켰다. 장개석의 주구였던 첩보/테러 조직 남의사는 백주 대낮에 반대파 암살이나 고문과 같은 테러를 저지르고 다녔다. 비밀경찰 자체는 별 신통치는 않았지만, 적어도 정적을 죽이는데는 그럭저럭 쓸모가 있었다. 그외에도 CC단도 있다. 중국의 강제수용소는 이미 국민당 시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국민당 치하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이런데 끌려와서 코렁탕을 먹고 있었다. 국공내전에서 중국 지식인들이 괜히 공산당을 환영한 게 아니다. 물론 훗날 공산당은 1957년 정풍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몇 술 더떴지만…

6.3. 인재 불신

  • 이충시(백숭희)는 작은 제갈량으로 불리는 천재군인이었고, 거의 유일하게 일본군을 물리친 경험이 있었지만, 장개석은 그가 반장전쟁 때 한번 반항했다는 이유로 한직에 두었다. 중일전쟁 과정에서 미국에서조차 백숭희를 총참모장에 임명하라고 권했으나, 장개석은 계속 이를 무시했다.[29]

  • 손입인은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한 미국 유학파로 버마 전선에서 활약했지만 중국 전선에선 항상 후방으로 좌천당했다.손입인은 후일 1954년에 마오와 모의한 장개석 일가 암살 음모에 대한 방조죄로 좌천되고 이후 가택연금형에 처해지며 이 과정에서 아끼던 부하 하나가 주모자로 걸려서 처형당하는 등의 일을 겪는다. 그러나 마오가 모의했다는 건 거짓말이고 실지로는 미국이 장개석을 몰아내고 손입인을 필두로 한 다른 세력으로 대체하려는 불발 쿠데타라는게 정설, 가택연금 당시 방문한 미국 장교에 따르면 그는 수사 도중의 일로 인해서 정신병을 앓았다고 한다. 손입인은 장경국이 사망한 후에야 자유의 몸이 된다.

  • 저우언라이(주은래)도 국공합작시절 한때는 장개석의 수하(황푸 군관학교 교감)에 있었다. 장개석은 주은래의 능력을 보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매일 그와 같이 아침을 먹을 정도로 그를 아꼈지만 저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생깠다. 어쨌거나 저우언라이는 그 후에도 장개석에 대해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고 하며 장개석은 주은래만 자기 사람이었으면 자신과 모택동의 상태가 반대였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근데 당신이 주은래가 활약하게 냅뒀을까? 어쨌거나 장개석은 속이 무지하게 좁아서 능력이 있지만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기용하지 않았다.

  • 백전명장이라고 일컫던 위립황은 장개석의 파벌로서 신뢰를 받았지만 봉천지역 방어전 때 장개석의 간섭으로 원활한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공산당에게 패배해 돌아오자 모욕을 당한 후 지휘권을 박탈당한 채 감금되고 만다. (다만 위립황의 경우는 1944년 있었던 스틸웰의 미국 소환 때 장개석에게 항명했던 전과가 있었다... 스틸웰의 부관이었던 프랭크 던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장개석에게 어느 정도 물리적인 힘을 가하여 스틸웰을 재등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들켰다고 한다. 그러니 믿지 못할 수밖에.)

그가 지휘하던 국민당과 관련해 이런 일화가 있다.[30]

때는 2차 국공내전. 국민당 장군으로 두율명(杜聿明)[31]이라는 자가 있었다. 버마 전역 중국군 사령관으로서 그의 무능함은 태평양 건너 미국에까지 소문이 자자했으나 장개석의 신임이 두터워 귀한 자리에 멀쩡히 남아있었다.

어느 날, 두율명이 장개석을 찾았다.

"총통 각하, 아무개 장군은 공산당 첩자인듯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다른 장군들과 달리 청렴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장개석은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32] 화를 벌컥 냈다.

하지만 두율명의 말은 사실이었다.


할 말이 없다. (...)

하지만 이 두율명(두위밍)이란 장군은 항일 전쟁에서 여러차례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한 준수한 능력의 장군이었고 스틸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단 이유로 폄하된 사람이다. 미국 내 당시 국민당 인물들의 평가는 스틸웰의 일방적인 보고에 의존한 것이 많은데 스틸웰은 어차피 백숭희, 손입인 두 사람을 빼곤 중국군이 다 총살당해 마땅한 병신이라고 매도했던 사람이고 중국의 예비대는 자신의 개인적 명예를 위해 죄다 버마에 꼴아박았으며 중미간의 이간질이나 일삼았고 장제스의 소모전 전략을 비웃으며 중국군은 일본군 상대로 야전을 벌어야 한다는 개소리나 했던 양반이니 이 양반의 평가를 믿으면 안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능력에 관해 가장 크게 평가를 할 수 있는 점은, 공산당을 자신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판단했다는 점이다. 어째 프로토스 대의회랑 하는 짓이 똑같냐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일본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도 공산당 격멸에 주력한다는 행위는 병크로밖에 보이지 않을테지만[33] 실제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침략자인 일본군과 달리 같은 중국인이고 주민들에게 환영받는 공산당의 경우는 일본군이라는 위협이 제거된다면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점차 제거하기 힘들게 될 것은 당연한 문제였다. 따라서 시안사태와 2차 국공합작이 없었더라면 이후 역사는 상당히 달랐을 지도 모른다.

또한 장제스의 공로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중일전쟁 당시 끝까지 대일 항전 의지를 견지했다는 점이다. 만일 그가 조기에 항전을 포기하고 일본에 항복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6.4. 한국(조선)과의 관계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찌되었건, 장개석은 조선의 독립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우리 군사 백만 명이 못해낸 일을 한 명의 조선인이 이루어냈다.
라 극찬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남의사는 대체 뭐했나 남이사 뭐하던 말던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하이에서 데리고 나와 중일전쟁 내내 같이 도망다니며 (생색을 많이 내긴 했어도) 지원해 준 것도 장개석이었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대단한 업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무엇보다도 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란 조항을 선언에 포함시킨 것도 그의 영향력이 상당했다.

난징 중앙군관학교 분교 지원금을 김구에게 보내줘 이범석이 나올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백색테러 조직인 남의사 계열이나 CC파(혹은 CC단, CC계)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런 장개석의 태도가 한국을 독립시킨 후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국민당은 임시정부한국독립당 임시정부로 인정했을 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인들은 지방마다 분열을 잘 한다."고 영미측에 귀뜀한 적도 있었다. 행동준칙으로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통제한 것도 사실이다.[34] 김구에게 독립자금 등을 쥐어줘서 한반도로 보냈지만 미군정의 반대로 자금조달은 실패한 일화가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장개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을 적극 지원하면서도, 이들을 통제하고 향후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특히 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 국가(미국, 소련, 중화민국, 영국)에 중국이 들어가는 것에도 장개석의 입김이 지대하게 미쳤다. (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좌절되지만.) 즉, 장개석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아래 있는 한국을 중화질서에 재편입시키겠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중화공영권 [35]

이승만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안좋았다. 해방 직전에 한국이 해방되면 누가 한국의 대표로 UN에 출석할 것일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장제스의 처남이자 중국의 외교부장인 송자문(쑹쯔원)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로 나섰던 김구, 이승만, 한길수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한길수야 처음부터 송자문에게 줄을 대고 있었고 김구는 장개석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니 당연히 응했지만 이승만은 이 요청을 씹었고 기분이 상한 송자문은 이승만에 대해 장제스에게 안좋게 말했다. 당연히 장제스는 이승만은 무시하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김구를 지지했다. 장개석이 김구에게 준 20만 달러의 독립자금의 사용처를 두고도 두 사람은 충돌했었다. 이후 기선을 잡은 것은 이승만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49년 8월에 이승만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장개석이 방문하자 이승만은 장개석에게 "당신처럼 분열이나 조장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차라리 모택동이 훨씬 믿음직하니 앞으로 한반도 문제는 모택동 주석하고만 논의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고. 이에 이미 모택동한테 밀려 대만으로 쫓겨나기 직전이던 장개석은 송자문 탓을 하며 이승만을 대형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사과했다는 말이 있다.(...) 아..안습

여튼 장개석의 의도가 어쨌건 현실에서는 중화민국이 대륙에서 밀려난 결과, 한국을 위성국화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작금에 와선 물건너간 소리가 되어버렸다. 한국도 결코 큰 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화민국의 남은 영토인 대만은 거리도 멀 뿐더러 한국의 1/3을 조금 넘는 수준의 섬이 영토의 거의 전부인 한국보다 많이 작은 나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

결국 받아간 거 없이(…) 독립운동 지원만 많이 해준 셈이 되어 이에 대한 보답으로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북한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김일성한국전쟁을 일으켜 1950년 10월로 예정된 중공의 타이완 침공을 무산시켰다카더라.[36]

여담으로 환빠들 중 상태가 특히 안좋은 일부 환빠들은 장개석이 중일 전쟁 종전 후에 만주족의 본거지인 만주에 치를 떤 나머지 만주를 조선에 양도하려 했지만 모택동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장학량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몽골조차도 중국 땅이라도 하는 장개석이 만주를 포기?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군요!

6.5. 대만 통치기 평가

대륙 통치기와 달리 이 시기에는 통치를 그럭저럭 잘 해서 문제점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반공을 표방했던 장개석의 대만 독재정치는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 중화민국 때 남의사 데리고 하던 버릇이 어디 갔겠는가.

그 일례로 대만에 집권하자마자 불량배, 불평분자들을 싸그리 잡아들여 태평양 밑에 처박아 버렸으며[37] '얼얼빠'로 대표되는 지독한 원주민 탄압정책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한국의 5.18이 무색할만큼 악명높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만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 할 수 있는 2.28 사건이다. (제주 4.3 사건과 원주민 정책을 비교하기도 한다. 사실 토착 섬 원주민 학살이란 점에선 후자가 더 타당해 보인다.)

대만에 무협지가 많이 나왔던 이유도, 수많은 문인들이 독재에 염증을 느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무협지를 썼기 때문.[38]

대만 내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척도. 국민당을 지지하는 대만 북부 출신 보수파는 "일제의 잔재를 뿌리치고 경제를 활성화시켰다"면서 중산이라는 이름과 대아시아주의도 일제잔재 아니었나? 추켜세우는 반면, 민주진보당을 지지하는 대만 남부 출신 진보파는 "계엄령을 내리며 공포 정치를 단행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26년간이나 혼자서 다해먹은 독재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대륙 중국의 평가는 당연히 안좋은 쪽이 많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했을 때, 중국 관영 통신사인 화사에서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장제스의 이름 앞에 "국민당 반동파의 두목이자 중국 인민의 공적(国民党反动派的头子、中国人民的公敌)"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으며, 대륙 중국에서 만들어진 창작물들에선 대부분 악역으로 나온다. 아무래도 국공내전 당시 중국 공산당의 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만… 그래도 나름대로 야심만만하고 비범한 기질을 지닌 당대의 호걸로 묘사되었으며, 90년대 이후에는 대만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인지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영화 <건국대업>에서의 장제스가 대표적인데, 여기에선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대립하면서도 나름대로 중국의 발전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로써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대만 범록연맹이 설쳐대니 타이완으로 쫓겨나기 직전 장징궈와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7. 2010년대 이후의 평가

국력이 중화인민공화국 쪽으로 기운 지금에서는 중공측의 장제스의 평가도 전향적으로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정적이었던 공산당의 편협한 입장에서만 장제스를 보았다면, 현재는 중국사의 정통성을 가진 정권의 입장에서 일본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했던 장제스를 높이 평가하는 것.

2차대전 이후 중국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던 후난성 즈장 항일전쟁기념관에서는 항일전쟁 영웅으로 장제스의 사진과 청천백일기가 그럴듯하게 전시되고 있다. 덤으로 미국인이 주축이 되었던 플라잉 타이거즈 기념물도 있다.

마오 주석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뛰어난 인물이라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졌고 절강성 영보시에 있는 그의 생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39] 사실 마오쩌둥에 맞섰던 인물이기에, 그를 높이면 그를 이겼던 마오쩌둥이 더 부각되는 효과도 있고. 승자의 여유? 혹은 둘다 바보?


이런 대륙의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대만 독립파에서는 장제스를 학살자, 억압자로 욕하는 사람이 생겨나는 등, 대만에서 그의 위상은 전과 같지 않다. 2015년 2.28 유혈사태 추모일을 앞두고 중정기념당에 세워진 장제스 동상에 계란을 던지는 이들이 있었을 정도.

8. 트라비아


  • 북경 천안문광장에는 지금은 모택동의 초상이 걸려 있지만, 1949년 인민해방군북평(베이핑 - 북경의 당시 이름)을 점령하기 전에는 장개석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 12월 3일에 걸린 것으로, 지금의 모택동 초상보다 컸는데, 고작 3년 1개월 만에 내려지게 되었다. 장제스가 이겼으면 쑨원을 걸었을까 그대로 장제스를 걸었을까?


  • 장개석의 사진이 천안문에서 내려진 것과 달리 왠지 난징 총통부 안에는 아직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 비록 대만으로 도주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금성에 있던 진귀한 역사적 유물을 싸그리 털어 대만으로 실어왔다. 이 유물들은 중국의 여러 황실에서 계속 모아온 보물 중의 보물로 지금까지도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는데 실컷 써먹고 있다(...). 근데 정말 문화적인 면에선 중화민국의 유물 보존 노력이 많이 도움이 되었고 현재 유물을 전시중인 대만 고궁박물원을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장제스가 유물을 털어간 덕분에 자금성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아 관광객을 맞이하기도 했는데, 이후 중국 정부가 대륙 전체에서 유물을 수집해 양적으로는 과거의 규모를 능가했지만 질적으로는 대만의 그것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 무엇보다도 장제스가 자금성의 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과연 문화대혁명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 타이베이 북부의 스린(士林)에는 그와 부인 쑹메이링이 국공내전 직후 후퇴한 1949년부터 26년 동안 거주했던 총통 관저가 있는데, 1975년 그가 타계한 곳이기도 하다. 2000년대부터 일반에 공원 및 사적지로 개방되어 관광객을 맞고있다. 2층 구조로 장제스 부부가 사용했던 서재, 침실, 각종 사진, 소장품, 그리고 외국 귀빈과의 접견실 등이 마련되어 중국 현대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가볼만한 곳. 다만 아쉽게도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음.
여담으로 관저 2층에는 장제스와 쑹메이링 여사의 침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각방? 이는 군인 출신인 장제스가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기상과 취침 시간이 빨랐던 반면, 쑹메이링은 올빼미 스타일로 밤에도 독서와 취미활동[40]을 해서 서로 취침시간이 맞지 않았던 점을 반영한 결과다.

  • 그의 생일인 10월 31일2006년까지 대만의 공휴일(先總統蔣公誕辰紀念日)이었다.북한이 각나면 는거다 거기다 아들에게 세습한거 까지 똑같다 적어도 나라를 막장으로 만들진 않았잖아 거기다가 지금 장씨 가문이 통치하는 것도 아니고

  • 장개석 본인은 여러모로 말투가 굉장히 험해서, 외국 외교관들과의 대화를 아내인 쑹메이링(송미령)이 번역하는 데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아, 여보, (검열삭제) 욕 좀 쓰지 마! 한편 장징궈가 사실상 후계자가 된 후 송미령은 찬밥 먹는 신세가 되어, 국부천대 이후엔 사실상 미국에 거주하게 된다.

  • 유명한 카이로 회담에서 담소하는 장제스 사진은 연출이다. 장제스는 영어를 전혀 못 했고 회담 내내 본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덕 전투[41]의 불리한 전황과 이를 자꾸 캐묻는 미국과 영국 때문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 장징궈의 동생(?)인 장위국은 원래 장개석의 아이가 아니라 손문의 동지이자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던 대계도가 일본 여자랑 관계해서 낳고 키울 수 없어서 맡은 아이이다. 이 아이에게 자기의 성과 항렬까지 준 장개석[42]은 대인배였고 장위국은 독일 유학파 장교로 강하엽병 장교로 오스트리아 병합에 참가한바 있다.[43] 사실 장위국의 혈통에 대해 논란이 많은 이유가, 장개석과 대계도와 문제의 일본 여자가 삼각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 장개석이 고자였다는 설도 있다. 내가 고자라니 어렸을 때 화로에 영 안좋은 곳을 데어 생식능력이 없어졌는데(까지 둔 걸로 봐서는 관계는 할 수 있었던듯), 장징궈는 장개석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씨라는 것이다. 이는 장개석이 젊은 쑹메이링과 결혼하고도 아이가 없었다는 점을 봐서도 설득력이 있다. 한편으로는 장경국을 낳은 뒤에 맺은 창녀와의 관계에서 성병이 옮아 생식불능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충공깽 스럽게도 조석마음의 소리의 주인공으로 패러디되어[44] "차가운 도시의 총통, 하지만 자본가에게는 따뜻하겠지."(…)라고 말한다.

  • 1915년부터 1973년까지 57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붓으로 일기를 썼다. '제요(題要)'라는 제목 아래 그날 있었던 주요 사건과 알게 된 과정을, '예정(豫定)'이라는 제목 아래 급히 해야 할 일을, '주의(注意)'라는 제목으로 정세평가와 판단, 유념할 일을 적고 '기사(記事)'라는 제목 아래 그날 한 일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매주마다 반성할 점과 다음주에 할 일을, 매달마다 반성할 점과 그달 있었던 사건들을 적었으며, 매년마다 반성할 점을 적어두고 빠진 기록들을 보충해놓았다. 주위 인물에 대한 평이나 쌍욕, 또는 검열삭제 관련 기록을 적어두기도 했다. 미국 후버연구소가 유족으로부터 이걸 빌려와 2006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전부를 공개했다.
  • 1930년대 중반에 중화민국에서 만들어진 24식 소총은 장개석의 이름을 따서 장개석 소총,장제스 소총,중정식 소총,총통소총 등으로 불렸다. 다만 성능은이름값 못하고생산한 조병창이나 시기, 심하면 조병창의 작업교대에 따라서(!) 들쑥날쑥했다고...

9. 참고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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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Chiang Kai-shek'은 광동어 발음 '쬥가이쎅(표기법 기준) / Zoeng2 Gaai3-sek6 (홍콩언어학학회(LSHK) 표기법 기준)'의 변형이다. 성씨 '蔣'은 보통화 발음 기준 웨이드식 표기법인 'Chiang'이고, 나머지는 광동어 발음 표기의 변형. 초기에 국민당의 본진은 광동성에 있었고, 장개석이 두각을 나타낸 때가 광동국민정부 시절이었기에 광동어식 발음으로 서구에 알려졌다. 영어 위키백과 해당 항목명도 'Chiang Kai-shek'. 아마 저장성 출신인 그도 스스로 이 이름이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화 표기를 우선시하는 풍조 때문에 이제는 '장제스'라는 발음이 더 널리 퍼져 있다.그런데 '스'발음은 권설음이라 우리말의 스 발음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게 함정 사실 대만에서는 '蔣介石'보다도 '蔣中正'이 더 널리 쓰이긴 하지만. 대만 내 영어 문맥 표기에서는 'Chiang Kai-shek'을 쓴다.
  • [2] 學名. 여기서는 학생 때 쓰는 이름. 중국의 문벌 있는 집안에서는 입학할 때가 되면 아버지나 스승이 학명을 지어준다.
  • [3] 그냥 스페이스 한 번(반각)으로 先總統 蔣公이라고 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先總統"과 "蔣公"을 글자 하나가 들어갈 만큼(전각) 띄어 쓴다. 띄어쓰기가 없는 중국어에서 이렇게 특별히 띄어쓰기를 하는 것은 나태(挪抬)라고 해서, 해당 인물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용법이다. 줄여서 장공(蔣公)이라고 불린다.
  • [4] 부당한 세금을 내지 않고 저항하는 장개석 일가에 대한 부패한 관료들의 보복이었다. 장개석의 어머니가 세금이라 쓰고 뇌물이라 읽는 돈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 [5] 고생만 한 왕채옥, 즉 왕차이위였지만 죽어서나마 이름을 남겼다. 중화민국의 최고 훈장 이름이 장제스의 어머니 이름을 딴 차이위(采玉) 대훈장이며, 본국과 외국의 국가원수에게만 주어진다. 마잉주를 제외한 전현직 중화민국 총통은 다 받았다. 천수이볜까지도.
  • [6] 저 진과부는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등장하는데,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에 지원받을때도 저 CC단과 남의사 루트로 지원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항목의 '중국과의 관계'를 참조.
  • [7] 1900년대 말에 일본에 주문해서 완성된 700t 대의 포함으로, 주로 장강유역의 초계를 목적으로 하는 전투함이다. 쑨원 사후에 쑨원의 호인 중산함으로 개명된 뒤 중산함 사건(공산당원이던 함장이 장개석의 지시를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중일전쟁 초반에 일본군의 공습으로 장강 중류에서 격침되었다가 21세기 초에 선체가 인양되어 복원작업을 받아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 [8] 혹은 상해 쿠데타. 현재 중국에서는 상해정변이나 4.12반혁명정변이라 한다,
  • [9] 이 과정에서 쿠데타군 가운데 양호성의 제17로군은 서안 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군벌들은 말로는 항일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같은 중국인의 생명과 재산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 [10] 시안사태는 일종의 쿠데타였으며, 장쉐량은 본래 장개석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장개석이 죽으면 중국의 대일 항전 능력이 붕괴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의 발빠른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이 자신의 요구조건에 동의하자마자 그를 풀어주었고, 난징으로 함께 돌아가 사태에 대한 처벌을 기다렸다. 하지만 장개석은 장쉐량의 목숨만은 살려주었고, 훗날 대만으로 함께 도망간 장쉐량은 거의 죽을 때까지 연금신세를 당해야 했다. 장개석의 입장에서 장쉐량은 쿠데타 역적이었다는 걸 생각해볼 때, 그나마 시안사태에 이때 동참한 양호성이 1949년 중경에서 일가 모두가 살해당한 데 비하면 훨씬 양호한 대접이었다.
  • [11] 1944년에 일본이 실행한 대륙타통작전에서 선전하던 운남군벌군이 참패한 이유로 지적되는 것이 장개석의 병참지원 미비인데, 문제는 운남군벌군을 지배하는 용운은 군벌간의 투쟁에서 일관되게 장개석을 지지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용운은 중일전쟁 말에 장개석으로부터 감금당하는 수모를 겪은 끝에 탈출하여 공산당을 지지하게 된다.
  • [12] 국제연맹에서는 일본이 상임이사국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국력에서도 일본은 중일전쟁 때 여러면에서 중국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이걸 다 뒤집어 엎은 것.
  • [13] 사실 그 시대의 많은 지도자들이 그랬듯, 장개석도 나치스러운 면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개석의 아들내미 중 하나는 독일군 육군 장교로 2차대전 폴란드 침공작전에 투입되기까지 했다고. 한 아들은 모스크바로 한 아들은 베를린으로
  • [14] 정전 기간 동안 대부분의 병력은 여전히 서북지역과 사천, 운남에 머물러 있었다.
  • [15] 1947년에서 1987년까지. 자기 생전에만 26년으로 자신의 집권 기간의 절반이 넘는걸 주목하자.
  • [16] 송미령의 아들이 아니라 장개석 첫째 아내(마오푸메이)의 아들이다.
  • [17] 잠시이긴 했지만 트로츠키주의자였다고. 또 러시아 여자와 결혼했다. 정확히는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된 이후 소련 각지를 전전하면서 고생할 때 만난 여성으로, 장제스는 이 며느리를 그닥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결국 이 여성 때문에 장씨 일가는 3대 세습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좋은 며느리네
  • [18] 무의식 중에 나온 말이라 영파 사투리가 굉장히 심해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는데, 당직부관 옹원(翁元)만이 그 말을 듣고 의사에게 이 말이라고 전했다. 진짜 그런지 진실은 그만이 안다고.
  • [19] 천수이볜의 민진당 정부 시절에 한때 장제스와 아들 장징궈의 유해를 중국 본토로 이장하는 방안이 추진되었고, 중국도 내심 받아들일 준비까지 하고 있었지만, 2008년 국민당의 마잉주가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취소되었다.
  • [20] 장제스는 이곳에 본토수복을 위한 군사작전을 지휘할 비밀 지휘소까지 건설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훗날 공개된 정부문서에서 밝혀졌다.
  • [21] 대만에서는 주로 '반공대륙'(反攻大陸), '반공복국'(反共復國), '대륙광복'(大陸光復) 등의 용어로 쓰였다.
  • [22] 다만 미국은 6.25 전쟁 당시 중국과의 대결을 경험하면서 중국과의 직접 대결로 악화될 수 있는 대만의 본토 선제침공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대만과의 동맹에 따른 방위공약 대상도 대만과 인근 도서지역으로 한정시켰다. 왠지 비슷한 시기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노선에 신경쓰였던 것과 비슷
  • [23] 시안 사건이 터지던 당시의 미국 대사인 넬슨 존슨은 장개석의 정적들조차 중국 전체를 규합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은 장개석 밖에 없다고 인정하고 마지못한 지지를 보냈다고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 [24] 심지어 이 토지개혁은 공산당 승리 후 거의 수정없이 그대로 진행되었다.
  • [25] 쉬운 말로 중국이 일본보다 돈을 더 잘 갚을수 있는 나라라고 평가받았다는 의미이다.
  • [26] 어떤 의미에선 당연한 측면도 있다. 국민당 정권의 경제적 기반인 절강재벌들이 소재한 장강하구 유역만의 재정동원 능력이 약간 향상된 것만으로 이 정도의 성과가 났던 것을 보면 전국적으로 경제개혁이 일어났을 경우 어떤 성과가 났을 지는 불문가지이다. 사실 제국주의의 중국 침탈이 절정에 달하던 1913년 당해의 중국 GDP를 능가하는 나라는 미국영국 정도라는 통계자료도 있고 보면...
  • [27] 1936년 화폐발행량의 100여 배를 넘는 1,890억 원을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찍어냈다. 그 바람에 일본군이 계획한 중국법폐를 대량위조하여 중국내 경제 혼란을 일으키려된 계획이 뒤집어졌다. 그리고 일본 위폐작전 책임자는 "중국은 정말 무서운 나라다"라는 비아냥급의 찬사를 남겼고, 일본의 계획은 쇼카쿠급 항모 1척의 건조비만 낭비하는 것으로 끝났다(…). 인플레이션 계획을 인플레이션으로 막다. 폭탄테러를 자폭으로 맞불놓을 기세 훗날 이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려고 실행한 금원권 개혁의 실패는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의 패배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
  • [28] 당대 경제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중국과 미국간의 은본위 문제가 얽힌 것도 있다. 관련해서 송자문과 공상희의 대립은 정책상의 문제로 시작되었다. 혹자는 금본위제도가 안정적이었다면 중국 경제가 그렇게 파탄나지 않았다고도 본다. 문제는 둘 다 탐관오리에 가까운 부패 인사였지만.
  • [29] 그 자리에는 자신의 심복인 허잉친(하응흠)을 앉혔는데 그는 군사적으로는 거의 무능했고, 결국 국민당군은 계속 참패만 했다.
  • [30] 제임스 이스트만의 '장제스는 왜 패했는가'에서 나오는 유명한 대목이다.
  • [31] 중국군 최초의 기갑사단을 이끌면서 중부 전선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의 병력교환비율은 중국과 일본이 2대1수준이었다. 얼마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타 지역의 교환비가 5(최대 10) ;1이라는걸 생각하면 그가 정예군대를 이끈다고 쳐도 꽤나 괜찮은 인물이다. 이후에 버마 전선에서도 참여했으나 영국의 비협조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가 무능한 인물이라고 평가절하 받는건 미국 고문이 악의적으로 중국 국민당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 [32] 사실 이런 이야기는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화를 냈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냥 죤나 딥빡치는게 정상인 이야기다. 자기 부하는 다 부패하고 타락한 놈들이고 공산당만 청렴하다는 이야기니...
  • [33] 대부분의 상황에선 진짜 병크 맞다. 특히 영토와 세력이 작을수록...
  • [34] 이는 조선민족혁명당선의용대를 흡수한 광복군이 공산군에 합류할 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 심지어 화북에서는 무기조차도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 인사들이 한국광복군의 통제권을 되찾아오려고 갖은 노력을 해 겨우 되찾아왔다.
  • [35] 실제로 이즈음부터 1948년도까지 중국(중화민국) 언론은 한반도 정세에 대한 기사와 논평(대략 한국인은 이념대립을 멈추고 자신들에게 놓인 문제를 잘 해결해야한다 정도의 내용)을 자주 내보냈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장개석의 의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 [36] 공격 개시 4달을 남겨두고 김일성이 남한으로 쳐들어가는 바람에 미국제7함대대만 근처에 띄웠다.
  • [37] 하지만 그럼에도 삼합회가 기승을 부리고 다닌다(…). 물론 삼합회와 장개석의 처가 송씨 일가(일명 '송가황조')와의 유착이 뿌리깊기도 했고...
  • [38] 대만 성인영화 관련 다큐에 의하면 대만에서는 "반공, 반일만 한다면 어느 정도 검열은 통과했다."고 한다. 그래서 SM에 가까운 이야기도 역시 반공영화로 탈바꿈해서 상영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영역은 아니지만 대만 영화 중 상당수가 "국내 상영용"과 "해외 수출용"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 [39] 물론 복원된 것이다. 원래의 생가는 문화대혁명홍위병들에게 개박살났다.(...)
  • [40] 주로 자수, 그림을 했으며, 관저에 걸린 미술품의 상당수가 쑹 여사의 작품이다
  • [41] 동방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선전되었다.
  • [42] 송가황조라는 르포에 보면 장개석의 불륜의 씨앗이라 한다.
  • [43] 일설에는 폴란드 침공 때도 있었다고 한다.
  • [44] 짱개(중국인) + (조)석 이라서 짱개석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