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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최종 변경일자: 2015-04-09 11:58:42 Contributors


목차

1. 개요
2. 한국 최초의 공화헌정체제 수립
3. 제1공화국의 정책
4. 제1공화국의 영향
4.1. 긍정적인 영향
4.2. 부정적인 영향
5. 관련사건
6. 동명의 드라마

1. 개요

1948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6일까지의 11년 8개월 12일간 존속하였던 한국의 첫번째 공화국

한국 최초의 공화 헌정체제.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시기를 끝내고 대한민국의 시작을 알린 체제였으나 한국전쟁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장기 독재 그리고 좌우 이념 대립이 가장 심하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2. 한국 최초의 공화헌정체제 수립

1948년에 5.10 총선거[1]국회의원을 선출한 뒤에 국회의장으로 이승만(다른 유력한 후보로는 김구가 있었으나 김구가 처음부터 포기를 선언하면서 이승만 당선[2] 김구가 출마를 하지 않은 이유는 5.10총선거가 분단을 고착화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을 선출하였다. 7월 12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7월 17일에 헌법을 공포하였고 8월 15일에 공식 출범하였다.

3. 제1공화국의 정책

반공이 주요 국가 정책이었고 이를 빌미로 정권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경찰 및 극우단체와 결탁하여 인권을 탄압했다. 대북정책으로 북진통일을 열심히 홍보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3]

참고로 제1공화국 헌법상의 경제체제는 통제경제에 가까웠다. 그러나 헌법에 통제를 명시했지만 사실상 미국의 자유시장경제를 받아들여 금융이 자유화되었고 은행은 민영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나서 사실상 원조물자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경제를 통제하지 않아 서민들의 삶이 막장으로 치달았고 빈부격차가 극심했다고 한다.[4] 제3공화국 헌법에 와서야 자유시장경제를 헌법에 규정했다.


4. 제1공화국의 영향

4.1. 긍정적인 영향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은 외교면에서 대체로 옳은 방향으로 잡은 점이 있다. 일단 대한제국말 고종의 목표였지만, 실패하였던 '한반도에 영토적인 야욕은 없는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어 주변 러시아, 중국, 일본의 야욕에 대비할 만한 국력을 기른다'라는 대전략이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수십년간 국내를 떠나있었던 탓에 내치나 조직 운영에는 병크를 터뜨렸지만[5], 무시할 수 없는 외교 감각을 지녔던 이승만이 외교를 잘한 측면이 많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문제는 내치를 못해서 그렇지 확실하게 작전권을 넘겨버려서 미국 혹은 UN군이 발을 빼는 건 원천봉쇄하다시피 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시에도 미국과 의회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아는 입장에서 반공 포로 석방 같은 벼랑끝 전술로 아이젠하워 정부의 당면 목표였던 휴전을 훼방놓는 입장을 불사하며 체결을 성공하였다. 이걸로 모자라 아예 미군을 서울과 근교에 잡아두어, 북한이 남침한다면 미본토에서 위원회 통과다 의회 승인, 비준이다 하기도 전에 미군과 교전하지 않을 수 없어 자동으로 미군을 참전하게 하는 장치까지 마련하기 까지 하였다. 이걸 자주 입장에서 비판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는 데 문제는 이승만은 청년시절에 대한제국이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자기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6] 무슨 수를 써서도 이번에는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결국 이를 성공시켰다. 또한 주한미군이 남한에 있듯이 중공군이 북한에 남겠다는 주장도 개소리 말라면서 철회시킨 것도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비단 북한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아도 한미상호 방위조약 체결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실력을 기르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계속해주고 있는 것도 사실.참조

그밖에도 농지개혁법등 제정하고 개정한것에 커다란 치적이 있는데, 농지개혁이 만약 개정이 안 되었다면 한국전쟁때 수 많은 농민들이 북한의 토지배분 선전에 넘어가 북한편으로 붙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때문에 농지개혁법은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는데, 농지개혁법은 사실 대통령 이승만의 치적이라기보다는 농림부 장관이었던 조봉암의 치적이라고 해석하는게 옳다. 다만, 제대로 법제화가 되기 전에 이미 농촌 수준에서 밀어붙였던 것은 상당한 의의. 일각에선 당시 미국에게 엄청난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와 그 이후의 경제성장을 했다는 재평가가 일고있기도 한다.[7]문제는 원조비용의 상당수가 고위관료 잇속채우는데 쓰여졌다는거

제1공화국의 최대의 의의는 대한민국이 미국과 동맹한 서방 자본주의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루었지만, 포석 면에서 올바른 방향이었고, 이 구도하에서 이루어진 국력 향상의 혜택을 후손들이 보고 있다. 산업화와 근대화에 뒤쳐져,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했던 대한민국에게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북한 뿐만 아니라 중, 러, 일로 부터도 체제를 안정시켜 주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군사비 부담을 대폭 경감하여 결과가 증명하듯이 세계 유수의 산업강국으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다만 친미 외교노선에 대해서 단순히 친미적이었다고만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는것도 사실이다. 제1공화국 시절의 친미 노선은 35년이 넘는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통치에서 막 벗어나고, 이후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된 그야말로 최악의 특수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승만 대통령 본인도 '한국의 생존을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친미일 수 있어도, '미국의 뜻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의미에서의 친미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승만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미국과 마찰을 빚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이전의 여러 남침 징후를 무시하고, 에치슨 선언에다 한국군에 대한 지원에 미적지근했던 미국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키며 미국 대사에게 빨리 미군 참전 안시키면 남한에 있는 미국 민간인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깡을 부리기도 하였다[8]
반공포로 석방만 해도 미국을 제대로 물먹인 사건이라서 미국에서 길길이 날뛰었고 처칠도 열받아서 저런 인간이 통치하는 땅 지켜줄 필요없으니 영국군 철수시키자는 주장까지 했다. 미국 정부도 이승만을 몰아내는 쿠데타까지 획책했었다. 종이 위의 구상에서 그쳤지만.

요약하자면 조선 말,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통해 단순히 국제법이나 이상주의적인 시각으로는 국가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온갖 정치적 공작을 통해서 미국을 잡아두어 신생 국가인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했고 이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이를테면 동아시아의 이스라엘[9][10]

또하나 대표적인 예로는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치열해 지면서 병력이 부족해지자 미국은 구 일본군을 한국전쟁에 개입시키고 하자 이승만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 일본군은 공산군과 싸우기전에 먼저 한국군부터 싸워야할것이라고 반대해 무산시켰다. 물론 미국은 해양순찰이나 기뢰제거에 이승만과 한국정부 몰래 일본군을 투입시킨사실은 있다.

단, 이승만의 외교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도 있긴 있다. #

4.2. 부정적인 영향

제1공화국 정부가 외교정책에서 커다란 성과나 의의가 있다하더라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사회적으로등 여러면에서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결코 긍정적인 시각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학계, 지식인들(주로 뉴라이트 성향)이 제1공화국의 외교, 국방상의 치적을 앞세워 제1공화국 시대에 나타났던 국내의 정치, 사회적인 여러 문제점들에 일종의 면벌부를 요구하는독재 좀 하면 어때, 공산당만 막으면 그만이지 주장이 갖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

정부 수립 두 달 정도 뒤에 여순사건이 터졌고, 2년도 안되어 한국전쟁이 터졌다.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남침하자 국민들에게 국군들이 선전하고 있다는 방송을 틀고 열심히 도망한 뒤 한강철교를 폭파했고 부산에 임시 수도를 두었으며 그곳에서도 독재연장을 위한 권력투쟁이나 하였고 군간부와 행정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통솔하지 못 하여 국민방위군 사건이라거나 보도연맹 학살사건같은 끔찍한 병크도 터뜨렸다. 또한 애초에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제거하는 작업을 통해 세운 국가여서 민중합의에 의한 지지가 취약했던 탓에 체제 강화를 위한 기타 여러가지 뻘짓이 자행되었다.

우선 여순사건 직후 국가보안법이 제정[11]되었으며, 발췌개헌(부산정치파동)안이 통과되어 직선제를 통한 장기 집권이 실행되었고,[12]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없앤 초유의 병크 사사오입 개헌안도 이 때 통과되었다. 또한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처형하는 사법살인도 이 때 처음 시행되었다.[13] 또한 당시 여적필화사건으로 논란을 일으킨 비판적인 신문인 경향신문[14]에게는 무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용하게 12년간 집권했고 여기에 최종적으로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확고하게 당선시켜 계승을 명확히 하기 위해 3.15 부정선거라는 뻘짓을 하였으나 이 뻘짓은 도리어 멸망을 자초하여 언론탄압에 반발한 언론사들의 공격이 이어졌고, 군부가 등을 돌린 상태에서 무엇보다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각성한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민혁명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였고 체제는 종식되었다. 그리하여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요약하자면, 대한민국 초대 정권으로 국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있었던 대한민국을 뛰어난 외교적 성과로 보전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대한민국 역대 정권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병크를 내내 터뜨렸으며, 이에 분노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붕괴되어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한 정권. 덤으로 지금도 나라 현실을 개탄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 나라는 시작부터 글러먹었어라고 탄식하는 이유이자 그 자체. 근데 사실 과거 추축국에 점령당한 국가들이나 다른 식민지 출신 국가들도 반공 및 국가재건의 대의 하의 과거 식민제국, 추축국에 협력했던 사람 청산하지 않은 것이며[15] 이념대립으로 인한 학살, 부정부패, 독재체제 고착화에 있어서 더하면 더했다.(...) 바로 저 북쪽만 봐도... 대한민국의 경우 이런 큰 병크를 터뜨리고도 국민들의 의식변화와 후속정부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개선되어 오늘날이 이르긴 했지만.

물론 당시 사실상 국제적 미아 상황[16]이었던 대한민국에서 권력이 멀쩡히 유지되긴 상당히 어려웠다. 일단 당선되었다면 나라를 위해 잘 일하면서도 정권 유지를 해야하며, 정권유지가 중대 과제인 것이[17] 정치다. 장관을 임명할때도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능력 좋다고 가져다 놓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이승만의 전략은 여러모로 대한민국에 대대로 이익을 주고 있으나, 그를 행해야했던 제 1 공화국의 구성물이 매우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거지로 정권을 유지하려 한게 문제. 거기다가 제 1 공화국의 내치 능력은 정말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채택한 전략은 매우 우수했으나 정작 그를 실행해야했던 정권이 그야말로 어중이 떠중이 다 모인 병크 양산기였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신의 한수가 된 작전권 떠넘기기라도 하지 못했으면 그야말로 국가 막장 테크로 직행이었단 것이다. 이미 일제에 의해 개발살난 나라에 막장 테크면 답이 없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었던 그 기반은 이승만과 제1공화국 정부가 다져놓았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기까지는 이승만을 부정한 이들[18]의 공로가 더 큼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6. 동명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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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남한 내 단독선거
  • [2] 당시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김구,안재홍,서재필이었다.
  • [3] 북진 통일정책은 북한의 남침과 마찬가지로 국제법 위반이다. 게다가 그 당시 북한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남한보다 더 우세했다.(1960년 기준으로 남한의 1인당 GNP가 79$정도였고, 북한이 137$였다.) 그러므로 실천할 수 있을리가(…) 조선조 북벌론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 [4] 신자유주의를 실천한 제1공화국 대에는 경제가 파탄났고,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제3공화국 및 4공화국은 전형적인 통제 경제정책을 시전하였다.
  • [5] 하지만 내치도 못했다고 할수만은 없는 게, 이승만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하고 농지개혁법을 제정해서 농민들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선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등 업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 [6] 국제법을 믿었던 대한제국이 한미수호조약에 의거해 미국에 일본의 침략을 저지해달라고 요청하는 일행의 통역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미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국을 일본에 넘기고 자기들은 필리핀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이런 쓰라린 경험에다 이후 실제 수십년의 경험으로 이승만은 겉으로하는 미국의 립서비스에 관계없이 미국으로부터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또다시 버림받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 [7] 삼성이 제일모직, 제일제당을 설립한것도 제1공화국 시기의 일인데, 이들 두 회사는 6.25 전쟁 직후의 낙후된 한국경제에서 그나마 수입대체 효과를 통한 산업자립의 기반을 마련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 [8] 6.25 전쟁이전 이승만이 제의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요구는 미국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또한 미국은 근본적으로 에치슨 선언에서 드러나듯이 필리핀 일본 얄류산 열도를 잇는 선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남한의 군비는 국경 경비대 수준으로 둘려고 하였다. 장개석 정권을 포기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데서도 나타나듯이 적어도 1950년 전의 미국은 아시아나 한반도에서 육전도 불사한다기 보다는 일본이나 타이완 필리핀 같은 섬에 거점을 두면서 해공군으로 미국에 대한 위협을 막으려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이승만은 주한미군 철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진해에 미해군 기지를 유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gunsa/EEB03063N.pdf
  • [9] 하지만 이스라엘과 다르게 현 대한민국은 친미임과 동시에 친중이라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또한 러시아와는 대놓고 친러는 아니지만 공공연한 협력관계. 현 대한민국의 외교노선은 친미친중 반일반북 노선을 타고 있으며 친미국가임에도 이슬람 국가들과의 큰 마찰을 빚지 않는 정말 몇 없는 나라중 하나다. 그리고 은그슬쩍 푸틴과 쌰바쌰바 물론 제 1 공화국 당시에는 냉전 상황만 고려했갰지만, 결과적론 작전권 떠넘기기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당장 대한민국 여권의 범용성, 그리고 그로인한 수많은 대한민국 여권 위조(...)가 내는 악명(?)만 봐도 알 수 있다. 너무 매력적인 여권인 나머지 하도 위조와 도난이 잦아서 입국심사관을 골치썩이는 여권일 정도다.(...)
  • [10] 현재 점점 북한을 명목상의 혈맹으로만 취급해나가는 방향으로 나가며 대한민국을 주요 협력국으로 보는 중국의 상황과, 언제나 그러했듯이 가스 팔고 싶어서 안달이난 러시아, 강제로 떠넘긴 작전권(...)으로 인한 으리(...)와 여전히 버릴 수 없는 대중 견제역이라서 빠저나갈 수 없는 미국등 작전권 떠넘기기 하나가 내놓은 결과물이 참... 다만, 예나지금이나 맹점이 여전하다. 자칫 삐긋날 경우 이도저도 아닌 국제미아가 되어버릴 수 있다. 이건 아직도 대한민국이 제일 확실한 패인 이승만표 작전권 떠넘기기를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중 하나다.
  • [11] 당시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었지만... 프린스 이승만 박사의 권한이 워낙 막강했으니....
  • [12] 당시 부통령이었던 김성수는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며 강력히 반발하였고 부통령이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 [13] 진보당 사건을 지칭한다. 이 사건은 헌정 사상 최초로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정략적 차원에서 사법살인한 사건이다.
  • [14] 당시 경향신문은 천주교계 신문이었다.
  • [15] 프랑스의 나치 청산이 철저했니 어쩌니 하는 낭설이 돌지만 사실이 아니다. 친일파 항목 참조.
  • [16] 간단히 말해 전 세계가 버린 나라.
  • [17] 이 정권 유지가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 우선되게 되면 국가 막장 테크가 시작된다.
  • [18] 4.19 참여 세대를 위시한 민주화 열사들과 심지어 박정희 등도 여기에 들어간다.
  • [19] 시작은 미군정기이나 제1공화국 시절 사태가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