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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최종 변경일자: 2015-01-24 13:25:31 Contributors


曺薰鉉 1953.03.10~

목차

1. 개요
2. 입문기
3. 바둑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4. 현재
5. 이야깃 거리


1. 개요

불모지 한국 바둑을 1위로 만든 전설의 기사

한국바둑기사. 우리나라 최초의 九단이다. 일명 '조국수'[1] , '쿤겐'. 한국 바둑계의 역사 중 하나로 표현되는 정상급 기사. 이창호 九단의 스승이며, 한때 이창호와 라이벌 구도였던 적도 있었다.
통산 최다타이틀 (157회) 기록 보유자이며, 2위인 제자 이창호 九단과는 17개의차이가 난다 (이창호 九단은 140개), 그리고 한국기원 최다승 기록 보유자이자 세계 통산 최다승 기록 보유자 이기도 하다.

본관은 창녕 조씨. 같은 집안 사람으로 배우 조재현, 고려 말의 무신인 조민수,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가 있다. 참고로 이 창녕 조씨는 단일본으로 파가 많다. 혹시라도 조치훈 九단, 故 조남철 九단 이 두분과 헷갈리지 말자. 본이 다르다.[2]

2. 입문기

9세 7개월에 프로에 입문하여 이 부분 최연소 기록을 아직까지도 보유하고 있다.[3][4]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켄사쿠(瀨越憲作 1889.05.22~1972.07.27) 九단 밑에서 수학하였다. 이 세고에 九단은 그때까지 제자를 평생 2명밖에 두지 않았는데 일본인 1명, 중국인 1명이었다. 일본인 1명은 일본 관서기원 창립자 하시모토 우타로 9단, 중국인 1명은 '기성' 칭호를 받은 현대 일본 바둑의 개척자 우칭위엔(오청원) 九단이었다. 세고에 九단은 이미 고령인지라 일본 바둑계의 최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으며, 그래서 애초에는 단순히 인사차원에서 갔다고. 원래는 초청장을 보내는 등 여러가지로 신경써 주기도 했고 여러 한국 출신 기사들이 배우고 있던 기타니 九단 문하로 가게 되어 있었다.[5] 그랬는데 세고에 九단이 조훈현을 마음에 들어하여 지도기를 두세 판이나 두더니 확 낚아채버린 것(...).

결국 세고에 九단 문하에서 일본기원에서 데뷔하여 세고에 九단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이때 13세였는데 이는 일본 타이 기록. 신기록을 세우지 못한 것은 같은 스승을 둔 문하생끼리는 바둑을 그렇게 격하게 싸우지 않는데 비해 혼자 세고에 九단 문하에서 수련하였던 조훈현은 앞서 서술한 기타니 九단 문하생들과 모두 싸워야 했던 것. 또한 세고에 九단이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길게 내다보며 인성을 기르기를 유도하였던 덕분이기도 하다.


데뷔 후 신인왕을 차지하고 성장세를 보이며 활동하던 중, 군복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하였다.[6]비슷한 시기 역시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조치훈은 고민끝에 일본에 남았다. 당연히 병역법 위반이나 조치훈이 1980년대 일본바둑계를 평정하자 정부에서 특별사면시켜주고 불러서 국위선양했다고 훈장까지 달아줬다. 자기 문하에서 성장한 조훈현이 라이벌 스즈키의 제자인 기타니 문하의 기사들을 꺾고 일본을 평정해 주길 바랐던 세고에 九단은 군대 때문에 애제자를 빼앗기자 충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일부 바둑 팬들은 제자의 제자인 이창호가 세계 바둑계를 평정함으로써 비원이 이루어졌다고 평한다. 그런데 다르게 본다면 일본에서 내제자가 독립하는 때는 五단이 되거나 성인이 되었을 때로 하는 게 불문률인데 이미 조훈현은 당시 五단이었고, 곧 성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군대 문제가 아니더라도 세고에 九단 문하를 떠나야 할 때였는데[7]... 아마도 조훈현 국수를 아예 일본 기원 소속으로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일지도. 1972년 자살 당시 84세인데도 불구하고 정정했기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스승은 자신의 목을 직접 졸라서 자살을 할 정도로 스승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참고

귀국 후, 공군 사병으로 입대하며 국내에서 활동하게 된다.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터라 한국 생활에 적응도 해야 했고, 군 생활, 스승의 자살 등 여러 원인으로 명성에 비해 몇 년간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군 생활을 하면서 배속된 대대의 대대장이 바둑 애호가라 조훈현은 대대장의 도움 아래 외출 등을 통해 기전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 지면 위병소부터 오리걸음으로 돌아오는 것.(...)

3. 바둑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다행히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군대에서 체력 등이 보강되어 더 나아진 실력으로 드디어 괴수로 등극한다. 74년 최고위전에서 김인을 꺾고 첫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8], 76년 하찬석 九단을 제압하고 평생의 경칭으로 불리는 국수 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당대의 강자들을 모두 쓰러뜨리더니, 80년 7월 2일에 이르러 서봉수의 명인 타이틀까지 빼앗으며 전관왕을 달성한다.

그러나 80년 12월에 왕위전에서 그의 착수를 똑같이 따라하는 '흉내바둑'을 구사한 서봉수에게 4:3으로 타이틀을 빼앗겼다. 이때부터 15년간 조-서 시대로 불리는 양강구도가 지속된다. 이 조-서 시대가 한참이던 82년, 한국기원 최초로 '입신'(九단의 별칭)에 오른다.

팬들조차 지리하게 느끼던 이 양강구도를 깨고자 덤벼든 이른바 도전 5강-장수영, 서능욱, 김수장, 강훈, 백성호-으로 불리는 신흥 기사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언제나 조훈현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의 도전을 격퇴했다. 박치문 기자의 말에 따르면, 도전 5강이 조-서의 양강구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실력차에다, 도전 5강 스스로 실력차를 인정해버리고 조훈현, 서봉수의 기보를 연구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 영향이 크다고 한다[9]

결국 도전 5강은 조훈현과의 치수고치기 이벤트전에서 정선과 두 점을 오가는 굴욕을 겪을 정도로 조훈현은 커녕 그와 비슷하게 대결할 수준은 되었던 서봉수조차도 넘어서지 못했다. 이들 중 타이틀을 차지한 것은 강훈의 86년 박카스배 우승이 유일하며 그것도 조훈현이 아닌 김인을 꺾고 거둔 우승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실 조-서의 승률은 2대 1 정도로 조훈현이 더 앞선다. 단지 워낙 많은 기전에서 그들 둘이 결승전을 치렀기 때문에 인식이 그렇게 돼 있던 점도 있었고, 서봉수를 제외하면 조훈현을 그 정도로 극복해낸 사람도 없었던 것도 그 이유라 하겠다.[10]

뭐니뭐니해도 조훈현의 바둑 인생 최전성기는 89년 대만의 재벌 잉창치가 주최한 세계 최고 규모의 대회인 응씨배 결승에서 중국의 별 녜웨이핑 九단을 꺾던 순간이라 할 것이다.[11] 이 우승으로 당시 '조훈현을 제외하면 듣보잡' 취급을 받으며 응씨배 초청장도 격렬히 항의해서 간신히 조훈현 한 명만 초청받을 정도로 변방에 머무르던 한국 바둑계의 위상을 일거에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그리고 중-일 슈퍼게임 등 한국 바둑을 제외하고 중-일끼리만 하던 국제 기전들은 이때부터 하향세를 탔으며 이창호의 등장 이후 졸지에 2류 대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때 한국에서 20세기 최후로 국가 주도 카퍼레이드를 한 인물이 됐고,[12] 한국 바둑을 창시한 조남철 九단과 함께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거짓말같이도 바로 하향세로 접어드는데[13], 천하에 맞설 상대가 없어보이던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사람은 바로 내제자로 맞아들였던 이창호였다. 90년 2월 20년전에 처음 차지했던 최고위전에서 제자 이창호는 스승의 타이틀을 처음 빼앗았고, 이후 차례차례 조훈현의 타이틀은 이창호에게 넘어간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동안에도 조훈현과 이창호는 같이 지내고 있었다. 조훈현의 부인 정미화씨는 둘을 대국장에 함께 차로 싣고 가서는 밤에는 타이틀을 빼앗긴 남편과 그 타이틀을 빼앗은 제자를 같이 맞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시기 실린 신문 만평에 실린 조훈현의 2층 집에서 호랑이가 자고 있고, 그것을 조훈현이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 상황을 적절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이 상황은 91년에 조훈현이 이사를 하면서 이창호도 자연스럽게 분가하는 식으로 끝이 난다.

분야를 막론하고 보통 제자가 정상에 오르면 스승은 달이 지듯 점점 그 빛을 잃어가다 스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에 비하여, 조훈현은 한때 이창호에게 그 많은 타이틀을 다 잃어버려 대부분의 바둑팬들은 은퇴를 예상할 정도로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던 때도 있었으나, 하루 네댓갑씩 피우던 담배-다름아닌 장미-까지 끊어가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 결국 바둑 스타일을 일신하며 부활에 성공한다. 특히 2002년 만 50세의 나이로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를 우승.

예전까지의 바둑 스타일이 가벼운 행보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14] 제비라는 별명이 불릴 정도였다면, 부활후 스타일은 그야말로 화력 위주의 강한 싸움을 주무기로 하는 바둑. 여기에서 붙여진 별명이 전신(戰神)이다.

4. 현재

2009년 3월 기준으로 국제대회 결승전 승률은 64.7%. 이창호의 62.7%보다 오히려 높다. 과연 킹왕짱. 다만 국제대회 결승전 총전적 다승 랭킹으로는 이창호에게 압도적으로 밀린다. 이창호의 경우 52승 31패, 조훈현의 경우 22승 12패이다. (물론 위에 서술하였듯이 조훈현의 전성기에는 국제기전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한국 바둑이 듣보잡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출전수가 적은 원인도 있다.) 또한 전세계 최초로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기사이기도 하다. 1994년 후지쯔배에서 우승함으로써 당시 현존하던 세계대회인 응씨배, 후지쯔배, 동양증권배에서 모두 한 차례 이상 우승을 차지하여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그랜드 슬램이라고도 한다)는 2002년 유창혁, 2004년 이창호가 차례로 달성하고 그 이후에는 달성한 사람이 없다.[15] 또한 세계대회 결승에서 2차례 이상 우승했으면서도 외국 기사에게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유일한 기사이다.[16] 이창호나 유창혁, 이세돌 모두 세계 정상의 일각에 있으면서도 외국 기사들에게 우승컵을 내준 적이 있지만 조훈현 九단은 세계대회 준우승 2회가 있지만 이는 모두 유창혁 九단에게 졌을 뿐[17] 창하오, 왕레이, 녜웨이핑 등을 상대로 모두 이겼다. 심지어 제1회 춘란배에서는 이창호도 결승에서 꺾어서 이창호에게 세계대회 첫 준우승을 선사하기도 했다.[18] 그러나 '명실상부한 세계1인자'에 오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창호나 이세돌과는 달리, 의견이 갈리곤 한다. '이창호의 치세', '이세돌의 치세', '구리의 치세'가 분명히 있었던 것과는 달리, 세계바둑사에 '조훈현의 치세'라고 할 만한 시기는 없었다는 것.

5. 이야깃 거리

바둑 외적인 책을 내기도 했다. <戰神 조훈현, 나는 바둑을 상상한다>, <조훈현과의 대화>.

사적인 자리에서 체스 마스터와 체스를 둬서 이겼다고 한다. 스펀지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방송한 바 있다. 체스를 두기 이전에 다른 경기를 구경했었는데 우연히 그 경기와 똑같은 모양이 재현되어 보았던 대로 따라갔다고 조훈현 자신이 밝힌 바 있다.[19] 바둑 우위론자들은 이것을 '체스보다 바둑이 우월하다'라는 명제의 근거로 삼기도… 그런데 실제 그 사람이 한 말은 "바둑은 잘 못두지만 체스는 마스터"였다고 한다. 즉 자칭 마스터 . 애초에 체스에서 마스터라는건 흔히 생각하는 최고 실력자 단 1명이 아닌, 그만큼의 실력을 지닌 실력자 부류를 총칭한다. 즉 상대는 세계 최고수도 아니며, 심지어 진짜 마스터 등급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걸 가지고 바둑>>>>체스 라고 하는 건 어이없는 일일 듯. 다만 일본에서 수학했기 때문에 일본식 장기인 쇼기 실력은 수준급이며, 카드게임의 일종인 콘트랙트 브리지 실력도 상당하다고 한다.

전매청(현 KT&G) 사보에도 실릴만큼 지독한 골초였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금연 후 금연초의 광고모델을 맡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일.[20]그리고 이 굉장히 약하다고 한다. 심지어 86년 박카스배 당시 우승을 놓친 걸 두고 "대국 전에 나눠준 박카스 먹고 취한 거다"란 농담도 나왔을 정도. 담배는 예전에 나오던 장미 담배를 주로 폈었는데, 당시 담배인삼공사(현 KT&G)가 장미 담배를 단종하자, 바둑 동호인들이 엄청난 항의를 했다고 한다. 보통 한 명의 애호가를 위한 담배가 재생산 되기 쉽지 않은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취미는 등산. 하지만 조훈현은 동료들이 등산을 즐길 때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냐"고 하며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훗날 이창호 九단과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그 주요한 원인이 체력저하임을 깨닫고 금연과 동시에 광적인 등산광으로 변신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대부분 기사가 전성기가 한 차례에 그친다는 점을 볼 때, 조훈현의 경우 대략 3-4 차례 전성기가 약 30여년에 걸쳐 차례차례 왔으며 3차 전관왕 이후 전성기는 상대가 이론의 여지 없이 세계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던 이창호 九단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야말로 불세출의 기사라고 할 수 있다. 정상급에서 활약한 시간, 전성기의 횟수 등을 따진다면 교통사고 후 극적으로 부활하여 대삼관을 한번 더 차지한 일본기원의 조치훈 九단과 더불어 전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경력을 가진 기사다.

종종 자녀들의 컴퓨터로 인터넷 바둑을 즐긴다고 한다. 인터넷상이라는 점을 활용해 프로기사임을 숨긴 채 동료 프로기사를 발라버리는 일도 가끔 있다고… 드라마 올인의 실제 모델로도 유명한 차민수 四단이 기력을 속이고 인터넷에서 바둑을 두다가 어떤 수준으로 둬도 자신을 한집 반으로 이기는 기사를 만났는데, 이게 알고보니 조훈현 九단이었다는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다.

파란에서 연재하는 란 웹툰의 바둑삼국지가 조 국수를 다룬 작품이다. 상당한 수작이고 조 국수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면 한번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팔 부상으로 연재속도가 극악으로 늦춰지고 결국 연재 중단.


바투에도 선수로 참가하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바둑의 국수'가 아니라 '바투의 국수'로 거듭 나겠다"는 말도 하였다. 흠좀무.[21]

고스트 바둑왕의 토우야 명인은 어느정도 조 국수를 모티브로 가져온 듯 하다.[22] 그러나 일단 작중에서 조훈현 九단의 위치에 있던 인물은 서장원 九단. 외모도 판박이다. 연재 당시 작가들이 한국에 와서 조훈현 九단과 인터뷰를 했는데 본인도 고스트 바둑왕을 보고 있었는지 "나도 사이 같은 귀신이 나와 나를 도와주면 좋을 텐데" 하고 껄껄 웃었다고 한다.[23] 역시 범상치 않으신 분. 여담으로 이때 한국기원에서는 "한국대회에 사이를 위한 시드를 한 장 줄까요?"하고 작가들에게 농담을 건넸다고 했다. 이래저래 대단한 양반들이시다.

허영만 화백이 이태모라는 경마 고수 샐러리맨을 주인공으로 다룬 늘은 마요일 1권에서 '조운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바둑계의 제왕이면서 과천벌을 휩쓸던 '대걸'이라는 말의 주인인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바둑에서 무관이 되고 동시에 대걸도 무관이 됐을 때, 대걸을 믿어주던 주인공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걸 계기로 같은 아픔을 겪던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면서 자신도 재기한다.

바둑기사들과 바둑팬 사이에서 도는 숨겨진 별명은 조엄살. 바둑이 불리해질수록 엄살을 부리지만 결국은 승리를 따내는 모습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거기다 바둑에 몰입하면 중얼거리는 트래쉬 토크를 구사했는데[24], 심지어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 九단은 이 중얼거림이 듣기 싫다고 귀마개를 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25] 초 읽기는 어쩌려고?

특히 조 九단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기 때문에 일단 집중하면 한국어와 일본어가 섞여서 신경을 긁는 웅얼거림이 나온다고 한다. 서봉수 九단은 이에 대응해서 바둑돌을 엄청 짤그락거리면서 두기도 했다.

바둑계를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본 박치문 바둑전문기자의 말에 따르면,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도 젊은 기사에게 밀린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세계대회인 BC카드배에 출전, 대만의 1인자 저우쥔신 九단을 잡더니 노장의 관록을 보여주며 4강에 진출했다. 상대는 당시 LG배에서 이세돌을 잡은 잠깐1인자 구리 九단이었는데... 아깝게 반집으로 패하고 말았다. 32강, 16강, 8강에서 모두 어마어마한 역전승을 거두었다. 구리 九단에게도 위기를 딛고 좋은 국면으로 몰고 갔으나 막판 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재역전되었다.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다

가끔 스타크래프트그분을 조훈현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나이차가 많이 나고 상황도 다르지만, 개척자의 이미지와 초대 본좌의 이미지,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과 승부하는 모습 등을 겹쳐 보는 듯 하다. 여담이지만 조카의 글에 따르면 컴퓨터로 블랙잭과 고스톱을 하면서 덤으로 스타크래프트도 즐겨했다는 모양. 실제 어떤 인터뷰에서도 본인이 그대로 밝히기도 했다. 흠좀무. 스타2로 오세요 조국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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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국수를 비롯한 타이틀 칭호는 해당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동안에만 부르는 것이 관례이나, 조훈현의 경우 국수전 10년 연속 우승 포함 총 16회 우승이라는 엄청난 족적을 남긴 바, 아예 이 호칭이 굳어져 버렸다.
  • [2] 조치훈 九단, 故 조남철 九단은 풍양 조씨다.
  • [3] 하지만 조훈현 九단은 실제로 52년생이므로 이것을 감안한다면 10세 7개월에 입단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일위 기록인데 2위는 이창호의 11세 1개월이기 때문이다. 3위는 최철한의 12세 2개월 4위는 이세돌의 12세 4개월. 한국과 비슷한 입단 방식을 갖고 있는 일본의 경우 조치훈 九단이 최연소 입단 기록을 갖고 있는데 그는 11세 8개월때 입단하였다.
  • [4] 당시 조훈현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한국의 프로 初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소년 프로기사와 석점 치수의 실력차이가 났다고 하였다. 이창호가 입단했을때엔 일본 기사와의 차이가 거의 없었으므로 이창호의 기록이 더 돋보일 수 있다. 물론 당시 조훈현이 바둑 배울때의 인프라의 차이는 이창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었으므로 직접적인 비교는 무리이다
  • [5] 당시 조치훈 九단이 그의 밑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 [6] 그리고 훈병 시절 때 "좌로 가/우로 가"를 잘 못알아들어서 본의 아니게 몸개그를 했다고 회고했다(...).
  • [7]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맞을 때도 이 불문율을 지키려 했으나 이창호의 성장이 너무 빨라 한국 나이로 17세, 四단였을 때 내보내게 되었다.
  • [8] 이때 조훈현 국수를 유난히 아꼈던 작고한 정창현 七단(초창기 한국 프로바둑계에서 김희중(은퇴) 九단과 더불어 속기로 유명하였으며, 기왕전등의 타이틀 홀더이기도 하였다.)은 "드디어 조훈현의 타이틀 폭격이 시작되었다"고 말했고 실제로도 그대로 이루어졌다
  • [9] 단, 이것은 포기했다고 도전 5강을 무작정 비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서봉수는 한번 물면 놔주지 않는 미친개같이 끈덕지고 사나운 기풍의 소유자다. 개인차가 있다고 하나 어느 정도 정형화된 싸움을 기반으로 하는 기사가 서봉수 스타일을 따라하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기보를 연구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장점을 강화해 대항하려는 것이 당시 도전 5강의 생각이라고 보는 쪽이 좀 더 타당할 것.
  • [10] 굳이 부등호로 매겨보자면 조훈현>서봉수>>>>넘사벽>>>>도전5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로 바둑에서 3집 반 차이는 절대 역전할 수 없는 차이라고 여겨지는데, 정선만 따져도 6집 반 차이이다. 그 정도의 핸디캡을 줘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는 소리이니 넘사벽이라는 느낌은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 [11] 이 대국은 워낙 유명하여 웹툰 '바둑삼국지'와 '미생'의 배경대국이 되었다. 미생같은 경우, 매 웹툰이 시작될 때 마다 이 기보가 1수 씩 놓여진다.
  • [12] 바둑계를 통틀어서도 유일한 카퍼레이드였다.
  • [13] "나는 할 만큼 했다 뒷 일은 창호가 알아서 해주겠지" - 응씨배 우승 후
  • [14]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 - 중앙일보 박치문 기자의 묘사.
  • [15] 참고로 조훈현이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던 제7회 후지쯔배의 결승 상대는 유창혁, 유창혁이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제6회 LG배 세계 기왕전의 결승상대는 조훈현. 바둑계의 정명훈송병구
  • [16] 박정상 九단과 서봉수 九단도 마찬가지이지만, 박정상 九단은 딱 한 번 올라가서 우승하고 그 이후에는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해 본 적이 없고, 서봉수 九단도 제2회 동양증권배와 제2회 응씨배에서 모두 우승하긴 했지만, 제2회 동양증권배는 외국 기사 대여섯명만 초청해서 치른 대회라 세계대회라고 하기도 뭐하긴 하다.
  • [17] 제6회 후지쯔배와 제6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에서 졌다. 6가 낀건가. 당시 유창혁이라면 리즈 시절이었으니 질 수도 있지 뭐.
  • [18] 이창호의 첫 세계대회 준우승을 제2회 동양증권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당시 동양증권배는 본격 세계대회라고 하기 뭐하다. 하지만 제3회 대회부터는 동양증권배도 본격 세계기전이라고 보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다.
  • [19] 스펀지에서는 "세계 최고수"를 이겼다고 소개되었다. 이뭐병.
  • [20] 이 무렵에 KBS 일요스페셜로 편성된 담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금연은 의지의 문제일 뿐 금연초 같은 건 그냥 보조수단일 뿐이라고 증언하기도... 광고료까지 받고 이래도 되나?
  • [21] 이 때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바투에 대한 책을 내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정작 책은 발매되지 않았다.
  • [22] 토우야의 기풍이 스피드가 있는 발빠른 바둑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점도 그렇고, 작품속에서도 토우야 명인은 명인자리를 나오고 은퇴를 하지만 바둑은 계속 둔다. 오히려 그런 걸 벗어던진 뒤에 더욱 더 성장하고 변화했다. 작중 묘사를 보면 젊은 시절에는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과감한 바둑을 두는데, 황혼기에 스타일을 바꿔 전신소리를 들었던 조九단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 [23] 17권 날개에 수록
  • [24] 가장 심할 때는 '비 내리는 호남서언. 남행열차에엔'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 [25] 그런데 요다 노리모토 역시 조치훈과의 대국에서 볼륨 MAX의 트래쉬 토크를 시전한 적이 있다. 문제는 조치훈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트래쉬 토크의 달인인지라...해당 대국은 두 명인이 서로 "이런 바보!!" "으앗!!! 이런 짓을 하다니!!""아 뭘하는거야! 이게 뭐야!"하고 양 사이드에서 트래쉬 토크와 자학 탄성이 오가는 정신사나운 대국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