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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최종 변경일자: 2016-12-02 17:26:44 Contributors

목차

1. 개요
2. 소개
2.1. 서지
2.2. 역주본
2.3. 기타
3. 분석
3.1. 위서(僞書):서지적 비판
3.1.1. 원저자를 찾아라
3.1.2. 엮은이도 찾아라
3.1.3. 아, 편저자가 요기잉네?
3.1.4. 현재
3.2. 위사(僞史):고증적 비판
3.2.1. 양적 고증오류
3.2.1.1. 크고 아름다운 환상의 나라
3.2.1.2. 자꾸만 사라지는 영토
3.2.2. 질적 고증오류
3.2.2.1. 시대를 초월한 통치제도
3.2.2.2. 엉터리 방터리 사회상
3.2.2.3.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인
3.2.3. 이런저런 용어의 문제
3.2.4. 자기모순에 빠진 내용
3.3. 위식(僞飾):사상적 비판
3.3.1. 비뚤어진 애국심
3.3.1.1.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가?
3.3.1.2. 반민족적 탄압을 받았는가?
3.3.2. 만들어진 전통
3.3.2.1. 삼일신고를 대종교로부터 베꼈다
3.3.2.2. 천부경을 단군교로부터 베꼈다
3.3.2.3. 낭가사상을 신채호로부터 베꼈다
3.3.2.4. 삼신일체 사상도 베낀 것이다
3.3.2.5. 한눈에 보기
3.3.3. 창작 소재로서의 가치가 있나?
3.4. 결론
4. 기타
5. 관련 항목
5.1. 내용 관련 문서
5.2. 문헌 관련 문서
5.3. 인물 관련 문서

1. 개요

桓檀古記

1970년대에 이유립(李裕岦)이 창작한 위사(僞史)를 담은 위서(僞書)이다. 그나마 그 내용이 화랑세기처럼 소박한(?) 위사라면 귀엽게 봐주기라도 하겠는데[1], 신채호 이래의 국수주의 역사관[2]을 그대로 담아 한민족이 대륙을 호령했다느니 하는 허황되고 자위적인 역사 왜곡을 담고 있어서 가히 존재 자체가 흑역사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대한민국의 사이비 역사학에서는 바로 이것이 '한민족의 참 역사'라고 우기고 다닌다. 이들은 나름대로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들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러한 증거들은 위서 문서만 들어가봐도 모두가 반박 가능하거니와 이것이 위서(僞書)가 아니라고 해서 위사(僞史)도 아니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애당초 국가적 조직화나 사회적 분업과 같은 인류의 범지구적 발전 과정을 싸그리 씹어먹는 황당한 내용.

요약하면 환빠들을 양산할 위험이 높은 만악의 근원, 한국판 시온 의정서, 비뚤어진 애국심을 한가득 실은 쓰레기 책 정도가 되겠다. 각별히 주의할 것. 서지적 측면에서는 위서(僞書), 사실적 측면에서는 위사(僞史), 사상적 측면에서는 위식(僞飾)이라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책이다.

결론은 환단고기의 내용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

2. 소개

"환단고기는 그 성립되고 공개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문제점이 많은 그런 책입니다. 국사 연구와 국사 교육이 우리 사회 성원들한테 분명한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그런 요구는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료적 가치가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가지고 그것을 통해 접근하는 것은 마치 기초공사 없이 고층빌딩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고 무모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정영훈(정신문화연구원 사학과 교수)

"환단고기는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나라의 뿌리의 상고사 자체를 복원하는 데는 자료적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구에 쓰여진 책입니다. 그런 만큼 이 책은 이 책을 통해서 상고사를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단 이 책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후에 우리 선인들이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권력화하였느냐는 당시인들의 역사의식을 파악하는 데에는 유효한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 노태돈(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환단고기는 역사서로는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논리성을 결여하고 비합리적인 내용이 적지 않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역사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매개로 집단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왜곡시키고, 특정한 세계관을 비자발적으로 실천시킨 예를 많이 보아왔다. 우리는 그러한 흐름에 의해서 여러 번 희생당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3] 이러한 위험성을 가능한 한 제거시키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
- 윤명철(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2.1. 서지

기본적으로 환단고기의 내용은 구한말인 1911년에 계연수(桂延壽)라는 사람이 다섯 개의 문헌을 엮어서 낸 것으로 되어있다. 즉 이에 따르면 계연수는 저자(지은이)가 아니라 편자(엮은이)에 지나지 않는 셈인데, 설정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 중복되는 내용이 거듭해서 서술되고 있지만 어디에는 중복되는 내용이 빠져있기도 하고 각 문헌들 사이에 분명히 구분되는 서술 범주나 저술 지향이 따로 없어서 그 흩어진 내용을 통합적으로 파악하기가 몹시 어렵다. 기전체편년체의 단점만 모아놓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 어쨌든 계연수가 환단고기의 서두에 쓴 범례에 따라 그 내부의 문헌과 출전이라는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三聖記
삼성기
三聖記 全 上篇
삼성기 전 상편
안함로(安含老) 찬
계연수(桂延壽) 소장
정말 간단하게 쓰여진 바쁜 사람들을 위한 환단고기. 총 704자로 길이도 가장 짧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신화적인 원형(?)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에 따라 자연히 역사적 사실은 안드로메다로.(...) 문제는 문헌의 이름이 분명히 '삼성기'임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환인, 환웅, 단군의 3대 성인을 넘어서 해모수와 고주몽까지 거론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三聖記
삼성기
三聖記 全 下篇
삼성기 전 하편
원동중(元董仲) 찬
백관묵(白寬黙) 소장
神市歷代記
신시역대기
위의 삼성기 상편과 오십보백보지만, 지적한 해모수와 고주몽의 이야기가 잘려나갔다. 대신에 인류의 탄생부터 반고, 염제, 치우 등 중국 신화의 이야기들이 대폭 수록되어 폭은 훨씬 더 풍성해진 편으로, 이게 중요한 게 환국의 초현실적인 강역이 바로 여기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르는 김에 단군까지 덩달아 잘려나가서 여전히 제목인 '삼성기'와는 따로 놀고 있다. 그런데도 오히려 분량은 늘어나서 삼성기 자체로만 총 1214자, 부록인 신시역대기는 424자.
檀君世紀
단군세기
檀君世紀 序
단군세기 서
행촌선생(杏村先生)[4]
백관묵 소장
檀君世紀
단군세기
단군조선의 47대 단군에 대한 내용. 전반적으로 단기고사규원사화와 같이 역대 단군들의 연대기를 적은 내용이지만,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단군조선의 존속 연대부터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함정.[5] 47인이나 되는 단군을 일일이 기술하다 보니 분량은 꽤 되지만, 그렇다고 내용이 풍부한 것은 아니어서 37대 단군부터 43대 단군까지는 근 200년간 주욱 '즉위했다'와 '죽었다'가 기록의 전부다.(...) 도 이 정도는 아니다...
北夫餘紀
북부여기
北夫餘紀 上
북부여기 상
범장(范樟)[6]
백관묵 소장
이형식(李亨栻) 소장
北夫餘紀 下
북부여기 하
迦葉原夫餘紀
가섭원부여기
해모수 이래 북부여와 가섭원부여에 대한 내용. 환단고기의 설정에서는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 그런 거 없고, 단군조선이 공화정치를 거쳐 북부여로 넘어갔다가 다시 정통이 고구려에 계승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아니 중요해야 할 대목이나 어째서인지 환빠들 사이에서 취급은 그냥 쩌리.(...) 중국을 심심하면 쥐어패고 다니던 고조선이 위만 하나도 처리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인 듯하다.
太白逸史
태백일사
三神五帝本紀
삼신오제본기
이맥(李陌)[7]
이기(李沂) 소장
桓國本紀
환국본기
神市本紀
신시본기
三韓管境本紀
삼한관경본기
馬韓世家 上
마한세가 상
馬韓世家 下
마한세가 하
番韓世家 上
번한세가 상
番韓世家 下
번한세가 하
蘇塗經典本訓
소도경전본훈
高句麗國本紀
고구려국본기
大震國本紀
대진국본기
高麗國本紀
고려국본기
太白逸史 跋
태백일사 발
환인에서 고려에 이르는 통사적 성격을 띤다. 그런데 이 태백일사 최대의 미스터리는 단연 삼한관경본기로, 엄연한 기전체 사서에서 본기면 본기지, 본기 안에 세가가 들어있다는 전대미문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삼한이라면서 정작 진한본기는 어디로 실종되어서 이건 뭐 기전체도 아니고 편년체도 아닌 미친 구성이다.(...) 또 소도경전본훈에는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수록되어 있어서 환단고기의 종교경전적 면모를 보여준다.

2.2. 역주본

하지만 환단고기는 이처럼 환뽕을 한가득 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순수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다행히(?) 정작 1979년 이유립이 처음 출간하였을 때에는 별다른 호응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일단 임승국의 중역본이 등장하여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후에야 환단고기에 대해서 그 번역과 해석을 덧붙인 수십 종의 상품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왔는데, 나중에는 아예 번역은 빠지고 해석만 잔뜩 집어넣은 원본은 안드로메다로 보낸 무언가가 나오기도 했다. 또 작금에는 증산도가 뜬금없이 차라리 대종교가 이러면 이해라도 가지 환단고기의 보급(...)에 뛰어들어서 이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무 아깝다, 책 찍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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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수 주해본(가나출판사, 1985)
    최초의 환단고기 국역본이라는 데 의의가 있는 책. 하지만 그게 전부다.(...) 현재는 묘하게 그 존재조차 잊혀져 있는데, 그래도 교보문고 중고시장에 다수 떠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래도 출간 당시[8]에 제법 팔려나갔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다른 판본들과 비교할 때 도대체 무슨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본서를 접한 사람에 의한 추가바람. 다만 이딴걸 돈 주고 사면서까지 그럴 사람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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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승국 중역본(정신세계사, 1986)
    환빠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임승국(林承國)이 번역한 판본인데, 우습게도 정작 임승국은 고전 한문을 읽고 해석하고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에 일본의 유사역사학자 가지마 노보루(鹿島昇)가 일본어로 환단고기를 역주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즉 이중번역. 그런데 이 때문에 가지마 노보루가 쓴 '니기하야히의 모델(ニキハヤヒのモデル)'이라는 말을 이해 못 해서 '니기하야히노모데루'라는 명사를 만들어내거나, '외몽고 할하 경계 안(外蒙古喀爾喀界內)'이라는 말을 잘못 끊어읽어서 '외몽고(外蒙古) 고객이객계(古喀爾喀界) 안'이라고 해석하는 등 번역이고 각주고 죄다 괴악하기 짝이 없다.(...) 마도서중역하면 심하게 품질이 떨어진다더니만 정확히 그 짝. 누가 마도서 아니랄까봐 뉴에이지 계통의 도서를 주로 취급하는 정신세계사에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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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립 평주본(고려가[9]), 1987)
    역사스페셜에 공개된 바에 의하면 이유립은 그 자신도 환단고기에 현토와 평주를 달아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데, 이는 이유립이 죽기 직전까지 참여했고, 그의 사후 발간되었다는 유고집 격인 '대배달민족사'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바로 이 '대배달민족사'의 제1권 5장에 환단고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를 1500질 찍어냈다가 별로 팔리지 않았고 김낙천 사장이 운영하던 출판사는 부도크리를 먹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창고가 침수되어 재고는 전량 폐기.(...) 이에 따라 시중에서 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2014년에 한배달에서 다시 찍어 보급한다고 하나 어떻게 될지는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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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학회 역주본(코리언북스, 1998)
    단학회 연구부에서 번역한 판본으로, 위의 김낙천과 함께 이유립에게서 직접 환단고기를 배웠고 '대배달민족사'의 출간에도 참여했다는 창해출판사의 전형배 사장이 출간했다. 따라서 그 내용은 '대배달민족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대배달민족사'의 비극적(?)인 운명과 달리 이 판본은 2002년까지 거듭 발간되어 시중에서도 구할 수 있다. 즉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그나마 이유립이 생각한 의도와 원전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판본인 것이다. 전체 4권으로 구성되어 1권은 역주·장구본(환단고기 원문), 2권은 색인, 3권은 연표, 4권은 지도·도표인데 어째서인지 4권은 출간되지를 않았다. 판타지를 현실세계에 지도로 그리려니까 그릴 수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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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일동 해석본(정신세계사, 1998)
    제목은 한단고기인데, 정작 한단고기 원문의 번역 따위는 이미 뒷전이고 그 내용은 환빠 입문서에 더 가깝다. 그저 작가가 자기 할 말 하기에 바쁘다. 물론 마한의 월지국(月支國)을 월지와도 구분하지 못한다거나, 타클라마칸 사막이 '큰 나라 마한'으로부터 나왔네[10] 어쩌네 운운하는 것을 보면 그저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환단고기 본연의 내용 따위는 이미 초월해버린 것. 그런 주제에 퍼지기는 또 많이 퍼져서 어지간한 도서관에는 임승국의 중역본과 함께 나란히 꽂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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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재규 만화본(북캠프, 2003)
    제목은 한단고기라 걸어놨지만, 환단고기 본연의 내용을 이미 아득히 초월해버린 작가의 망상력이 일품이다. 인류가 진화의 결과물이 아니라 북방 감수(坎水)인 바이칼 호의 기운으로 탄생했다거나,(1권 140-161) 타클라마칸 사막이 '큰 나라 마한'으로부터 나왔다거나,(2권 41) 엔릴이 배달국의 장군 얹날로부터 나왔다거나,(2권 103) 치우가 티베트를 넘어 그리스까지 진출했다거나(3권 120) 하는 내용은 환단고기에도 그런 거 없다! 아오 과학적 공상소설은 니가 쓰고 있구만 이러한 면에서 이쪽도 '번역'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인 '해석'에 훨씬 가까운 편인데, 게다가 그걸 만화로 그렸으니 그 파급력이란 어떠할지는 능히 짐작된다.(...) 마개조의 마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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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동영 번역본(한뿌리, 2005)
    고동영이 번역한 판본으로 한뿌리[11]에서 발행되고 있다. 다른 번역본들과 달리 번역자의 주관적 해석이 거의 개입되지 않은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고, 한자로 된 원문도 수록되어 있지 않아서 만 원이 넘는 가격에 비해 300쪽에 불과한 상당히 심플한 크기를 자랑한다. 원문은 별도로 출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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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산도 역주본(상생출판, 2012)
    증산도의 교주인 종도사 안경전(安耕田)이 번역하고 주석을 단 판본. 2012년부터 증산도의 부속 출판사인 상생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환단고기 위서론에 종지부를 찍을 완역 결정본이라고 주장하면서 별의별 민폐를 다 끼치고 다니는데, 2013년 기준 길거리에서 보였던 환빠성 광고 및 유인물들은 그냥 죄다 이 작자들이라고 보면 된다. 으아아 이 나라의 앞날에 환뽕이 가득해! 어찌되었든 물량전에 가까운 전국 단위의 대대적인 홍보로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 주었으며, 크기도 B5용지 1415쪽에 달하는 크고 실용적인 충격과 공포를 자랑한다. 가격이야 뭐.(...)[12] 이 정도면 거의 경전 수준이고, 실제로 교주 안경전이 증산도 교리를 태백교에 가져다 비벼놓은 해제만 전체 분량의 절반이다. 환단고기 본문을 보기도 전에 지친다.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2.3. 기타

환단고기의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임승국, 김산호, 한재규를 비롯한 일각에서는 환인이 실은 하느님의 음차라고 주장하면서 환(桓)은 본래 하늘, 준말로서는 '한'이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임승국 이래 환단고기를 한단고기라 읽는 것이 오늘날까지 하나의 경향[13]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당운이나 광운에서 이미 桓을 '호관절(胡官切)[14]'이라 하면서 '소리는 환이다(音丸)'라고 못박아 두었으니 실제로는 환단고기라 부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운서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된 옥편에서도 역시 桓은 '호돤절(胡端切)[15]'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아닌 '한단고기'는 족보에도 없는 이름이다. 뭐, 어차피 위조지만.

이와 반대로 환단고기의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멸칭으로 '황당괴기'나 '황당고기'라고도 부르곤 한다. 제목을 환단고기라 걸어놓고는 본문에 부민산업의 한우 브랜드인 한단고기 짤을 싣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낚시 방법이고, 이로부터 아웃 오브 안중이라는 의미로 환단고기를 먹는 고기 취급하는 것도 흔한 광경. 한우 농가에 좀 보탬이 되나? 그래도 환단고기의 '고기(古記)'가 오래된 기록이라는 뜻의 보통명사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두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고기'가 등장하는데 이게 환단고기를 뜻하는 건 아니니까. 헌데 백괴사전에서는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하여 환단고기를 '먹는 것'으로 분류했다. 그것도 먹어선 안 될 것으로 지정된 것이 백미. 묘사를 보면 딱 마약이다.(...) 씹기는 좋지만 삼켜선 안 된다. ?

일반적으로 환빠들이 환단고기의 내용을 신봉한다고 알려져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애당초 환빠라는 멸칭 자체가 '환단고기 '의 줄임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로 정작 환빠라고 멸칭되는 사람들 가운데 이 책의 서지를 인정하지 않거나 내용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가 다소 복잡해진 감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환단고기를 부정하는데도 왜 '환빠'냐고? 이들은 스스로의 망상적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이보다도 더 황당한 책이나 더더욱 황당한 주장을 지어내고 또 믿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협의의 '환빠'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3. 분석

일부 재야사학 계열 인사들과 증산도, 단월드 등 일부 종교 단체에서 진실된 사서라고 주장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조작된 위서다. 이 점은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확실하게 위서인데, 애당초 위서(僞書)라는 것은 내용의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저자나 저술년도와 같은 서지사항을 속이는 것을 의미하고, 환단고기는 그런 면에 완벽하게 부합된다. 예컨대 지금 한문을 잘 하는 누군가가 고구려사를 열심히 공부한 뒤 그 내용을 기전체에 한문으로 정리해서 책으로 펴냈는데, 제목이 '신집'이고 필명이 '이문진'이라고 해보자. 물론 이 책 안에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서기 600년에 고구려 사람 이문진이 썼던 그 신집은 아닌 것이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환단고기는 확실히 위서(僞書)다.

반면 서지사항이 위조되지 않은 진서여도 내용은 지어내거나 왜곡한 위사(僞史)일 수 있기에, 진서라고 무조건 추종하거나 위서라고 무조건 배척하는게 아니라 사료 비판으로 내용을 검증해야만 한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들어있는 내용은 인류의 발전 단계에서 이루어진 국가의 형성과 탄생 과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1만 년 전에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에 달하는 12국의 대연방을 7대 4천 년 가까이 유지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이며, 그 밖에도 16세기가 되어야 만들어지는 영고탑(寧古塔)이라는 지명이 버젓이 등장하거나 신채호의 오류에서 비롯된 삼조선설을 차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중국의 사서에 그 시작이 분명한 흉노와 선비가 기원전 17세기에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면모에서 드러나듯, 환단고기는 확실히 위사(僞史)다.

또한 만들어진 의도 자체가 이미 비뚤어진 애국심에 부응하는 면이 있어서, 만주는 기본이고 활동 범위가 전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광활한 영토라든가, 강력한 무력과 중앙집권적 국가가 이상적으로 비추어지고 한족을 고대 한민족의 지파로 간주하는 등 중국에 대한 극단적인 비하와 혐오가 두드러진다. 여기에 단군교의 천부경(天符經)과 대종교의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가져다가 본문에 싣고 있는데, 정작 독자적이거나 자신만의 것은 보이지 않으면서 마치 자신이 그들의 원조인 양 과시한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사상적 체계는 어떻게 그 사회와 상호 조응하였는지 드러나지 않아 역사적 가치가 전무하다. 더욱이 이러한 내용이 담긴 책이 사대-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으니 환단고기는 확실히 위식(僞飾)이다.

그러니 마음껏 까자

3.1. 위서(僞書):서지적 비판


환단고기가 최초로 발행되었던 것은 1911년 3월 16일[16]에 단학회(檀學會)의 회장이었던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가 만주 관전현에서 초판 30부를 간행한 것이었다.[17] 이는 고려시대 이전에 저술된 여러 재야사서들이 조선시대에 유교 사대주의 사상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어찌어찌 전해지다가 하나로 묶인 것이었는데, 이는 다시 1920년에 당시 14세로 독립군 통신원으로 활동하던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岦)에게 넘겨져서 한 갑자 뒤, 그러니까 경신년(1980)에 공개하라는 당부를 받았다카더라. 이거 꽤 중요하다. 체크해 두자.

이미 네 살 때부터 중국 문화권에 의존하지 않는 한국사에 빠져있던 이유립은 오덕오덕거리면서 그걸 또 좋다고 책을 들고 다녔는데, 1948년에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일어나자 이남으로 왔다가 어째서인지 다시 이북으로 돌아가서 1년 동안 감옥살이한 것이 이거 찾으러 왔다갔다 한 것 같기도 하고, 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동복(同福) 오형기(吳炯基)에게 필사를 맡겼는데 베낀답시고 계연수의 초간본을 가져갔다가 그만 잃어버리고, 곧이어 6.25 전쟁이 터지자 금산에서 불난리, 성남에서 물난리로 그걸 또 잃어버린 것 같다고 그러고, 1970년대 초반에는 의정부의 셋방 주인이 책들을 냅다 팔아버려서 오형기의 필사본까지 죄다 잃어버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기억을 살려서 겨우 복원을 해두었다카더라.[18]

그런데 1979년에 조병윤(趙炳允)이란 제자놈이 광오이해사에서 그거 제멋대로 출판해서 오자도 많고 허접한 상태여서 좀 화내다가 이 자식을 파문하는 선에서 그냥 그려려니 했는데, 잠시만요, 위에서 1980년에 공개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쩌다가 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원고가 신토를 연구하던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鹿島昇)에게 들어가서 역으로 '한국의 선도는 일본 신토의 아류'라는 식으로 바뀌어버렸다.[19] 이에 분개한 이유립은 1983년에 자기가 직접 나서서 배달의숙에서 다시 자기가 여러 오류를 수정했다는 환단고기 100부를 찍어내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1979년 광오이해사본은 내버린 자식 취급하고 1983년 배달의숙본의 서지사항을 1979년으로 끌어올려 놓았다[20]...고 이 책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3.1.1. 원저자를 찾아라

환단고기 가운데 첫머리를 장식하는 삼성기(三聖記)의 두 저자인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은 그 어디에서도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두 사람의 이름은 세조실록에 실린 안함(安含)·노원(老元)·동중(董仲)이라는 세 성인[21]의 이름을 하나로 합쳐서 둘로 가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안함의 경우에는 신라 진평왕 대의 대당유학파 승려로 안홍(安弘)이라고도 하는데 그 사적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에 두루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고승이다.

먼저 안함의 행적을 살펴보면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중국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예언서를 한 권 지었는데 그 안에는 선덕여왕이 도리천에 묻힐 일,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할 일, 김인문이 고국으로 돌아올 해, 대왕이 대업을 이룰 해 등을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한다. 또한 동도성립기라는 글을 통해서 황룡사에 유명한 랜드마크구층목탑을 건설할 것을 진언하였고, 선덕왕 9년(640) 9월 23일에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62세로 입적하였는데 그날 귀국하던 사신이 바다 위에 돗자리를 타고 서방정토로 가는 법사를 보았다고 한다. 여러모로 기이한 행적을 남긴 고승이었던 셈. 때문에 사후에는 이차돈, 의상, 원효 등과 나란히 흥륜사 금당에 10성(十聖)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사람인 '노원'과 '동중'은 누구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함(安含), 원로(元老), 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언급이 있다. 즉 원로(노원)과 동중은 안함과 같이 동행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해동고승전에 인용된 최치원의 의상전에 따르면, 안홍은 중국에서 돌아오며 인도의 삼장(三藏) 세 사람[22]과 중국의 한승(漢僧) 두 사람을 동행했는데 여기에서 이름이 전하지 않는 중국의 한승 두 사람이 바로 원로와 동중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원씨와 동씨 모두 중국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성씨로 원씨는 북위의 국성이었고, 동씨는 그 유명한 동탁이나 이후 당나라 때의 재상 동진(董晉)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경우 다시 세조실록으로 돌아가보면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원로(元老) 두 글자가 세조실록에서는 노원(老元)으로 뒤집어져 있다는 것이다. 엄밀성을 기해야 할 왕조실록에서 이게 가능한가 반문할 수 있지만, 세조실록의 해당 도서 목록을 서로 비교해보면 '표훈천사'가 '표훈'으로 쓰이거나, '문태산'이 '문태'로 쓰이거나, '하사량훈'이 '하소량훈'으로 쓰이거나, '왕거인'이 '옥거인'으로 첨획되었던 등 크고 작은 오탈자가 보이기에 원로(元老)가 노원(老元)으로 뒤집어지는 일 정도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세조 3년 5월 26일 老元表訓河沙良訓文泰山王居仁道詵漢都讖記誌公記
예종 1년 9월 18일 表訓天詞河沙良訓文泰玉居仁 志公記
성종 즉위 12월 9일 表訓天詞河少良訓文泰王居仁道銑讖記志公記
기타 자료元老 王居仁

이에 맞서서 도대체 안함, 원로, 동중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세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르는가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는데,[23] 위에서 보았듯이 안함은 사후 신라에서 이차돈, 원효, 의상 등과 나란히 10대 성인의 일원으로 받들어졌으니 오히려 성인이라 지칭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이런 안함과 나란히 열거되었다는 사실에서 원로와 동중 또한 그와 동행하면서 신이한 이적을 남겼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세조실록에 등장하는 삼성기의 삼성(三聖)이란 바로 신이한 행적을 남긴 안함·원로·동중 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지 환단고기에 나오는 것처럼 환인·환웅·단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안함이 남긴 바로 그 예언서일 것이다.

이러한 점이 지적된 뒤에 출간된 안경전 역주본에서는 아예 안함로가 곧 안함이며 로(老)는 공경하는 존칭으로 덧붙여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저자가 글에 자신의 이름을 쓰면서 겸손의 뜻으로 어느 동네의 촌로라던가 필부라던가 하는 식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은 보았어도 스스로를 높여서 존칭을 덧붙이는 것은 정말로 별꼴이다. 더욱이 나머지 한 사람인 '원동중'의 실체가 불명이라는 점은 세 사람의 행적이 어느 정도 추적 가능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해 논리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일각에서는 고려말 조선초의 성리학자 원천석이 곧 원동중이라 카더라[24]마는 그래도 성리학자라는 인간이 천신이니 주술이니 운운하는 글을 썼다는 상상에서부터 무리수가 확연하다. 다음은 원천석이 지었다는 시 일부.

성스러운 임금께서 나라를 개화하시니
이윤과 여상 같은 신하들이 이웃해 있네
세상은 복희·헌원 세상 찾았고
백성은 요·순의 백성 되었네
- 원천석, <조정에 경하드림>

천자께서 동방을 중히 여기심인지
조선이란 이름은 이치에 적당하네
기자의 유풍이 장차 일어난다면
분명히 온 중국과 찬란함을 다투리
- 원천석, <새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다>

또 비단 원천석만이 아니라 이암과 범장도 역시 고려말 조선초의 성리학자들로서, 이암과 같은 경우에는 공민왕대에 문하시중까지 지낸 엄연한 제도권상의 핵심적 인물이었다. 그는 몸소 유교경전인 상서의 태갑편을 써서 임금에게 바치는 등 사상적으로 유교적 소양에 충실하였고, 또한 이색은 그의 묘지명에서 "이때 권세를 잡은 자가 우리 유가를 비방하고 비웃으매, 공은 고립무원이 되어 그 뜻을 끝내 행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암이 유가임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그는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낼 때 박거사라는 자가 비술(秘術)로 적을 쳐부술 수 있다고 장담하자 그를 체포해 수도로 압송하는 등 단호히 괴력난신을 배격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의 사상적 지평이 유가보다 한민족 전통의 도가에 가깝다는 말은 그야말로 사실무근이다.[25]

본명이 범세동이라는 범장은 더욱 가관인데, 다름아닌 그의 증조부 범승조(范承祖)가 바로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즉 환빠들의 논리에 따르면 환단고기는 중국에서 온 '오랑캐'에 의해 쓰여진 한민족의 정통사서인 것이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범승조는 본래 원나라에서 예부시랑을 지내다가 고려 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와 정착한 사람이었고, 더군다나 이 과정에서 주자의 사서집주를 들고 와 고려에 보급한 성리학자였다. 그 증손인 범장 자신도 성리학자인 정몽주의 문하생이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다음은 범세동이 지었다는 책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의 일부.[26]

우리 동방은 처음 오랑캐(九夷)에서 시작되어 단군이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웠는데, 우임금 때에 이르러 부루 세자가 도산(塗山)에 가서 중국의 제도를 대략 모방해 와서는 이를 약간 베풀어서 오랑캐 습속(夷俗)을 바꾸었다. 주 무왕에 이르러서는 은나라의 태사(太師) 기자가 주나라에 신속하지 않고 동으로 건너왔는데, 단군의 후대 임금이 그의 덕에 심복하여 도읍을 넘기고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 동편으로 국경을 옮기니 기자가 나라 받기를 사양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이에 그를 옹립하여 임금으로 삼으니 기자가 부득이 인심을 거스르지 못하여 왕위에 올라서는 팔조금법을 마련하였다.
- 범세동, <화동인물총기>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별다른 특기할 만한 정보를 찾을 수 없는데, 다만 이맥의 아버지는 이암의 증손자이고 어머니는 정몽주의 증손녀[27]라는 사실이 주목을 요한다. 그러니까 이맥과 이암은 모두 고성(固城) 이씨인데, 이외에도 환단고기와 관련된 해학 이기와 석주 이상룡 그리고 이유립이 바로 이 고성 이씨 가문이다. 그러니까 이유립은 환단고기를 창작하면서 그 저자로는 자신의 직계 조상을, 그 관련 인물로는 자기 집안 사람들을 내세움으로써 은연중에 민족사학의 마지막 보루이자 대통맥으로 자신이 속한 고성 이씨 문중을 선양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고성 이씨 문중 중 일부는 결국 여기에 낚여서 환단고기 전파의 선봉장이 되어가고 있다.(...) 막상 행촌 이암, 해학 이기, 석주 이상룡 등의 인물들은 환단고기와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문중이 낚여서 환단고기와 엮어 칭송하는 판이다.고성 이씨인 위키니트가 환빠에게 잠식당해가는 가문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3.1.2. 엮은이도 찾아라

계연수A.jpg
[JPG 그림 (Unknown)]
계연수B.jpg
[JPG 그림 (Unknown)]

좌측은 양종현이 그린 계연수 초상, 우측은 이일룡이 그린 계연수 초상. 둘 다 이유립의 증언에 기초했다.

사실 환단고기에 수록된 문헌들이 수백 년을 이어왔다는 증거는 고사하고, 구한말에 계연수라는 사람이 환단고기를 엮었다는 증거조차도 전혀 없다. 그보다도 애당초 계연수라는 사람이 실존 인물인지의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 추종자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이런저런 독립 운동에 동참은 하셨는데요, 실제 증거는 없어요(..)." 헌데 역사에 기록만 안 되었겠나? 국내 유일의 계씨인 수안 계씨 족보에도 계연수라는 사람은 보이지 않거니와, 전하기로는 1919년에 이상룡의 막하에서 참획군정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지만 정작 이상룡의 문집인 석주유고에는 계연수라는 이름도 안 나온다. 또한 민족대표부터 시작해서 난다긴다하는 독립지사는 전부 잡히면 재판을 받았지만 계연수는 참획군정이 되자마자 이듬해인 1920년에 일제의 밀정에게 암살당했다고 하니 재판기록도 있을 리 없다.[28]

무엇보다 이런 계연수에 대한 단군교[29]와 태백교[30]의 설명이 서로 배치된다. 단군교에서의 계연수는 1916년에 묘향산의 한 석굴에서 천부경을 발견해 자신들에게 보내준 일회성 NPC에 지나지 않지만, 태백교에서는 자신들의 전신이라고 주장하는 단학회의 2대 회장으로 초대 회장인 이기가 자살한 뒤 침체된 단학회를 유지 부흥시킨 인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단학회라는 게 존재했다는 증거도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31] 그런데 잠깐, 그런데 왜 1916년에 발견된 천부경이 1911년에 초간되었다는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벌써부터 실려 있는 것일까? 오오 타임머신 오오

덧붙여 계연수의 범례를 보면 계연수가 환단고기에 수록되는 여러 문헌을 보고서는 '자아인간의 주성발견', '민족문화의 표출이념', '세계인류의 대합공존'을 기뻐하는 구절이 있는데, 사실 1911년은 이제 막 신채호에 의해 민족사관 개념이 태동하기 시작하던 시점인데다가 무엇보다 바로 지난해에 나라가 망했다. 방금 나라가 망한 판국에 세계인류의 대합공존이라는 소리는 그냥 이대로 살자는 소리, 더 나아가서는 일제가 외치던 대동아공영권에 조력하자는 말이 되므로 그저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결국 민족문화니 세계인류니 하는 개념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실체로 구현되고 난 후에야 존재할 수 있는 것. 여기서도 잠깐, 왜 5월 5일에 쓴 범례가 3월 16일 발간되었다는 환단고기에 벌써부터 실려 있을까? 역시 타임머신은 실재했다니까!

이밖에도 계연수의 실존을 증명한다고 제시되는 자료로는 1920년에 편찬된 정신철학통편과 1960년대에 지어진 해동인물지가 있는데, 정신철학통편은 정훈모의 단군교와 관련된 인물로 언급된 것이고, 해동인물지는 그로부터 한참 뒤에 태백교가 만든 것이라 객관적 신뢰성이 전무하다. 증거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거냐? 또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민족사서라면 대종교의 교주 김교헌이 만든 신단실기나 신단민사가 고작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홍범도나 오동진의 지원을 받아서 찍어냈다는 환단고기의 존재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32] 또 범례에 보이는대로 한민족의 위대함을 증언하는 사서가 어지간한 집에는 발에 채이게 굴러다녔다면 하다못해 조대기나 진역유기와 같은 유사 자료라도 어떻게든 발견되었을 터인데, 실제로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만일 신채호가 환단고기를 보고 사료로 삼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쓰는 글마다 주구장창 사료의 부족을 한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부여는 왕검 이후 그 자손들이 서로 그 보장(寶藏)을 지켜서 태평하고 부유함을 자랑하였으니 볼 만한 사료가 많았으나 모용외의 난에 그 나라 이름과 함께 다 없어지고, 고구려에는 동명성제와 대무신왕 때에 사관이 조선 상고부터 고구려 초엽까지의 정치상 사실을 기재하여 유기라 이름한 것이 100권이었는데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난에 다 빼앗겼다. 단군 왕검의 이름과 삼한·부여의 약사(略史)가 위서(魏書)에 다 실려 있음은 위나라 사람이 유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뒤 백제 중엽에 고흥 박사가 서기(書記)를 지었고, 고구려 말엽에 이문진 박사가 신집(新集)을 지었으며, 신라는 진흥대왕 전성시대에 거칠부가 신라 고사(故事)를 저술하여 삼국이 다 한 세대의 전고(典古)를 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한 마디 말이나 글자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이는 천하만국에 없는 일인지라,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1편 제3장 <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略評>

뭐 굳이 따지자면 신채호가 주창한 삼조선설이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하기는 하는데, 정작 신채호는 환단고기를 바탕으로 삼조선설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중국과 한국의 사서들을 나름대로 해석함으로써 삼조선설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삼한의 진한, 마한, 번한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조선에도 진조선, 마조선, 번조선이 있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 위에서 사기 조선열전에 연나라가 진번조선(眞番朝鮮) 두 나라를 복속시켰다는 기록을 '진·번조선'으로 끊어읽었던 식이다. 이처럼 그 근거와 과정이 명백한 추론에 환단고기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즉 환단고기를 보고 삼조선설이 나온 게 아니라 삼조선설을 보고 환단고기가 나온 것.

그런데 이러한 신채호의 삼조선설도 여타 기록에서 진번(眞番) 또는 조선(朝鮮)은 나와도 진조선이나 번조선은 나오지 않는다는 점[33]에서 광복 이후의 사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오직 환단고기의 추종자들만이 환단고기를 근거로 삼아 삼조선설을 신앙하고 있을 뿐.(...) 증거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거냐?(2) 덧붙이자면 오히려 신채호는 나철 사후 김교헌의 신단실기와 신단민사에 보이는 비실증적, 종교적 역사관에 실망한 나머지 사실상 대종교와 결별하고 아나키즘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단군교의 경전인 천부경을 후대의 위작이라 깜으로서 간접적으로 계연수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聖言)이 되는 것이다.
-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제4장 <결론>[34]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태종의 분서 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거니와……
-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1편 제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35]

3.1.3. 아, 편저자가 요기잉네?

자, 그렇다면 이제 진짜 편저자가 누구인지 찾아볼 차례다. 찾긴 뭘 찾아 당연히 이유립이지 이유립은 1911년에 계연수가 간행했던 환단고기 초간본 30부는 어느샌가 소실되었으므로,[36] 환단고기는 그의 기억에 따라 필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유립은 환단고기를 열심히 익혔고 어려서 전령으로 활동하면서 암기력이 단련됐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기억에 의존해 기록을 복원한 여러 사례들을 봤을 때에는 설득력이 대단히 낮다. 그런데 1949년에 오형기가 마니산에 있는 태백교의 본당 대시전(大始殿)에서 환단고기의 필사를 부탁받았다는 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작 기억으로 복원했다는 판본은 어디가고 현전하는 환단고기는 모두 오형기의 필사본이다. 애당초 증언과 현상이 불일치하는 것.[37]

각설하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환단고기라는 게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1979년이 최초[38]인데, 사실 그전부터 이유립은 환단고기에 들어간 내용, 아니 환단고기에 들어 내용을 여기저기 마구 뿌리면서 수정하고 다니고 있었다.[39] 이건 뭐 한 갑자 뒤 경신년(1980)에 공개하겠다던 계연수와의 약속은 진작에 팔아먹었던 것인가. 아니, 환단고기의 출간 과정 자체도 이유립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니 정말로 어디다가 팔아먹었던 듯하다.(...) 각설하고, 그런데 이처럼 환단고기에 들어갈 내용을 아주 착실히도 여기저기 뿌리면서 수정하고 다녔던 덕분에 오히려 이것들이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창작'한 과정을 추적하는 데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환단휘기
1971
세계문명동원론
1973
동양문명서원론을 비판한다
1976.5
환단고기
1979
단군세기 단군가륵
十年
人叛, 命余守己, 斬其酋素尸毛利, 自此, 稱其地曰素尸毛利, 今牛頭州也. 其後孫, 逃於海上, 僭稱天王.
단군세기 단군가륵
戊申十年
叛, 命余守己, 斬其酋素尸毛利, 自此, 稱其地曰素尸毛利, 今牛頭州也. 其後孫, 逃於海上, 僭稱天王.
단군세기 단군가륵
戊申十年
豆只州叛, 命余守己, 斬其酋素尸毛, 自, 稱其地曰素尸毛, , 今轉音爲首國, 也. 其後孫, 有陜野奴者, 逃於海上, 據三島, 僭稱天王.
단군세기 단군매륵
三十八年
遣裵幋銘, 往討海上. 三道, 倭之有號始此.
단군세기
三十八年
新野侯裵幋, 往討海上. 十二月, 三道悉平, 倭之有號始此.
단군세기 단군가륵
甲寅三十八年
遣新野侯裵幋, 往討海上. 十二月, 三道悉平.
단군세기 단군매륵
甲寅三十八年
野侯裵幋命, 往討海上. 十二月, 三道悉平.
일본 진무 덴노의 형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러 동쪽 바다에 들어갔다는 전설을 한국에서 동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을 세운 것으로 이해. 이 사람의 이름이 이나히노미코토(稻飯命)인데, 이 이름이 한국어로 쌀밥이라는 의미이므로 같은 뜻의 '벼밥'을 음차하여 배반(裵幋)이라고 이름붙임.이나히보다 먼저 스사노오가 신라 소시모리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신화가 있으므로 첨가. 소시모리=소머리=우두주의 연상 과정을 거쳐 소시모리를 신라시대 우두주였던 강원도에 비정. 이천서씨의 시조 여수기가 단군시대에 강원도 예국(濊國)을 다스렸다고 하므로 첨가. 또 이때는 아직 신라가 없으므로 배반명을 '신야후'로 만들어 해결!역대 단군들의 연대 배분을 통해 갑자를 확정. 뭐 여기서 더 크게 손볼 건 없고, 스사노오가 추가되었으니 이나히부터 '왜'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스사노오와 상충되는 것 같아서 삭제.진무의 이름 가운데 하나가 협야존(狹野尊)이므로, 일본으로 건너가 처음으로 천왕을 칭했다는 자의 이름을 협야존, 아니 협야노(奴)라고 낮추어 씀. 한편 배반명도 진무와 오버랩시켜보고자 하는 의도로 호칭을 신야후에서 협야후(陜野侯)로 변경. 이렇게 해놓으니 보니 강원도는 그 무대로 너무 좁은 듯하여 '두지주'와 '우수국'이란 말로 위치를 흐림.
태백일사
昔有桓國, 衆富且庶焉, 初桓仁, 居于天界, 得道長生, 擧身無病, 代天宣化, 使人無兵, 人皆作力, 自無飢寒.
태백일사 환국본기
朝代記曰
昔有桓國, 衆富且庶焉, 初桓仁, 居于天, 得道長生, 身無病, 代天化, 使人無兵, 人皆力作以勤, 自無飢寒.
태백일사
桓雄, 亦以是日, 自天以降, 立檀祭天, 爲民祈禳.
(없음)
태백일사
伏羲, 旣受封於西鄙, 位職盡誠, 不用干戈, 一域化服, 遂代燧人, 號令天下.
태백일사 신시본기
三韓秘記曰
伏羲, 旣受封於西鄙, 位職盡誠, 不用干戈, 一域化服, 遂代燧人, 號令域外
환인은 역사적 지도자가 아니라 일종의 신격. 천계에 살면서 병들지 않는 몸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선천적인 완전성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존재. 사람은 저마다 능력을 지닌 유토피아적 세계. 환웅은 실제로 천계에서 내려온 신적 존재. 천하란 곧 중국!환인은 한민족의 역사적 지도자. 지상에 살면서 몸을 병들지 않게 잘 관리하며, 후천적으로 완전성을 만들어낸 존재. 사람은 열심히 일함으로써 먹고 살 수 있음.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은 삭제. 중국 까이거 오랑캐 아니여? 뽀대나게 조대기, 삼한비기 그런 데서 인용했다고 하자!

이외에도 단군시대에 만들어진 한글의 전신이라는 가림토(加臨土)가 원래는 원시 흉노의 의사소통 수단이었다거나, 직구다국의 이명은 구막한국(환단고기에서는 매구여국)이라거나 하는 환단고기와 사이비한 내용이 이유립의 입에서 직접 나오고 있다.(!) 이것이 이유립의 창작 과정이 아닌 단순한 실수라고 해도, 이렇게 혼란스러운 기억력과 논리력, 그리고 일단 쓴 글을 자기 마음대로 근본부터 뜯어고치는 사람됨을 가진 사람이 오직 기억만으로 되살려 썼다는 책이 과연 그 원본이라는 것과 얼마나 일치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또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판 환단고기에 실은 후기에 의하면, 환단고기를 신토와 접합시켜 일본에 유리하게 만들어버린 사건도 사실 이유립이 자신이 주필로 있던 <자유>지의 발행인이었던 박창암과 함께 직접 가지마에게 줬고, 가지마가 번역한 것을 나중에 감수까지 해주었다. 비록 가지마의 논리가 이유립 자신의 본의와는 일치하지 않더라도 일치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지 동아시아 역사를 통째로 떠다가 중근동에 옮겨놨는데 고유의 단군신앙을 일본 신도와 접합시키는 바보 같은 짓에까지도 가담한 것이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1982년 9월에는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출간한 것을 치하하는 시까지 지어주었으니 충격과 공포다! 이것만으로도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출간이 이유립과 무관하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잃고 만다.

국적은 비록 달라도 광거(廣居)에 거하니[40]
환단의 진의가 허무로 돌아가지 않겠네
두 기둥과 부교, 절로 엉긴 섬들은
삼한의 관경과 신시의 유적이라
천황의 가계는 부여족이고
일본의 문명은 오우(烏羽)의 글이니
지론은 다소 서로 다르더라도[41]
그 주장은 천추에 기여(起予)할 만하오[42]
- 이유립

하지만 이유립은 개정판을 내고자 하는 열망이 그토록 강렬했는지 애지중지하던 광오이해사본은 오형기와 조병윤이 제멋대로 낸 것이라 내버린 자식으로 몰아버리고, 1983년에 자신이 직접 나서서 배달의숙본 환단고기를 발간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는 1920년에 계연수로부터 직접 환단고기를 건네받으면서 한 갑자 뒤 경신년(1980)에 공개하라는 당부를 받았다는 증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천마산대 대장 최시흥(崔時興)과 서로군정서 이덕수(李德秀)를 거쳐서 이유립이 입수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전수 과정에서의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하지만 가지마 노보루 것을 엉망진창으로 중역한 임승국 때문에 정작 오류를 고쳤답시고 야심차게 낸 배달의숙본이 묻혀버린 건 참으로 뭐라 할지.(...)

시간은 흘러 제5공화국 시대가 되자, 이러한 자칭 재야사학쇼비니즘적 성향에 자극받은 비뚤어진 민족주의자들이 환단고기를 비롯해 이유립의 여러 글들을 모은 '대배달민족사'라는 책의 출판을 뒤에서 밀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유립은 자료 정리 중이던 1986년을 일기로 사망. 대배달민족사는 그 이듬해 출간되었다. 이 때문에 이유립이 제5공화국 당시의 파시즘적 국수주의 세력과 모종의 관계를 맺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도 존재. 하지만 <자유>지의 박창암이 5.16에 동참한 중요 인물이기는 했지만, 정작 제5공화국 시기 인물들과의 관계는 불명확하다.

3.1.4. 현재

  • 숙명여자대학교에 환단고기의 1911년 초간본이 있다?
    전산입력시의 부주의로 말미암은 오류. 숙명여대에 있는 것은 1911년 본도 아니고 심지어 1979년 본도 아니며, 연도만 1979년으로 끌어올린 1983년 배달의숙본이다. 이유립이 서지사항에 환단고기는 1911년에 초간되었고, 이 책은 1979년 재간한 것이라고 적어놓았기에 생긴 오류. 한국말은 끝까지 들읍시다 좀.

  • 동국대학교에 환단고기의 1949년 필사본이 있다?
    배달의숙본에 있는 발문으로 말미암은 오해. 1979년 배달의숙본의 말미에는 오형기가 1949년에 환단고기를 필사하면서 붙였다고 설정되어 있는 발문이 있는데, 전산입력 과정에서 이것에 따라 기재하였기에 1979년본이 졸지에 1949년본으로 바뀐 것이다. 책 상태가 깨끗한데다 결정적으로 필사본이 아닌 인쇄본.(...) #

3.2. 위사(僞史):고증적 비판

환단고기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한민족은 기원전 7197년 혹은 기원전 6만 7080년(?!)부터 아름답고 신비로운 환상의 나라환국(桓國)을 세웠고, 그 군주를 환인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환인은 모두 7명이 3301년 혹은 6만 3182년 동안(...)을 다스렸는데, 일반적으로 초대 환인은 안파견(安巴堅)이라고 하나 환국 말기에 환웅에게 태백산을 점지해주는 존재도 안파견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고유명사는 아닌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거발환(居發桓)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이 나라의 중심지는 흑수와 백산[43]이라고도 하고 천산이나 천해[44]라고도 하는데 그 영역은 자그마치 남북이 5만 리에 동서가 2만 리였다.(...) 이는 나누어 말하자면 비리국·양운국·구막한국·구다천국·일군국·우루국·객현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사납아국·선비이국·수밀이국의 12국이었다 카더라. 추종자들은 수밀이국을 수메르에 비정하여 인류 문명의 시원이니 뭐니 떠들지만 사실 수밀이국이 수메르라는 증거는 딱히 없다.(...)

이런 환국에 이어서 기원전 3989년에 일어난 것이 배달(倍達)인데, 도읍은 태백산의 신시(神市)이고 그 군주는 환웅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그 유명한 단군신화의 천강신화 그리고 웅녀 이야기의 주인공인 초대 환웅은 거발환(居發桓)이라고 하나, 이 또한 고유명사는 아닌 듯. 모두 18대 환웅이 1565년 동안 다스렸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 환빠의 주적인 중국과의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으로, 환웅과 나란히 환국에서 갈라져 나온 반고가 돈황 인근 삼위산(三危山)에 자리를 잡았고, 5대 태우의 환웅의 아들인 복희가 지금의 중국으로 이주하여 토착민인 수인씨와 유소씨를 밀어내고 일대 세력을 이루었으며, 그 뒤에는 역시 배달국에서 갈라져 나온 소전씨의 아들 신농이 중국의 우두머리가 되어 공상(空桑)을 경계로 배달국과의 국경을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전씨의 다른 후손이 바로 헌원이다. 가만, 그럼 얘네들도 다 우리 동포네?

이러한 중국과 배달국의 갈등이 터져나온 것이 바로 14대 환웅인 자오지 환웅 시기이다. 맞다. 바로 그 유명한 치우천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치우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자오지 환웅은 당시 기준으로 엄청나게 혁신적이었던 쇠(금속)으로 만든 갑옷과 무기를 병사들에게 장착시켰고,[45] 간지포스를 풍기면서 신농씨의 후손 유망을 때려잡고, 가는 곳마다 이기면서 황제 공손헌원을 마구 갈구고 다녔다고 한다. 이로써 유망은 쫓아내고 헌원에게는 항복을 받았으며, 이것으로도 모자라 황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전욱과 고신을 다시 갈구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광개토왕급 포스로 중국으로 널리 영토를 초토화시킨 개척한 결과 하북성과 산동성과 강소성과 하남성 지방을 다 먹어치우고 아예 도읍을 중국 땅으로 옮기기까지 했던 이 시절이 바로 한민족의 황금시대였다 카더라.

그러다 이번에는 마지막 환웅과 웅씨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불함산 아래에서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왕검의 지휘 아래 천하가 평정되고 조선이 세워졌는데, 도읍은 만주의 아사달이고 그 군주는 단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모두 47명의 단군이 2095년 동안 다스렸으며 영토를 진한(辰韓)·마한(馬韓)·번한(番韓)으로 갈라서 진한은 단군의 직할령이 되고 한반도에 해당하는 마한에는 웅씨의 후손이, 중국 방면에 해당하는 번한에는 치우의 후손이 대대손손 다스리도록 했다. 이번에도 역시 중국이 말썽이라, 단군 왕검은 요(堯)와의 전쟁이 이어지자 순(舜)을 지원해 주어서 요를 굴복시키고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선의 치수 기술을 중국에 전수해주었다.(...) 또한 순과 국경을 정해서 하북성을 조선의 영토로 인정받고 강소성에는 자치정부를 두어서 순에게 감독을 맡겼는데, 왕검의 뒤를 이어 즉위한 부루는 순이 하북성에 찝적거리자 혼쭐을 내 주기도 했다고.

단군 부루의 뒤를 이은 3대 단군은 독자적인 가림토 문자를 만들어서 훗날 한글의 모태가 되었다. 흉노몽골이니 선비니 하는 여러 북방민족들도 바로 이 즈음에 한민족으로부터 갈라져 나간 지파들이다. 기원전 1767년에 은나라하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는 단군이 슬쩍 군사를 출동시켜 겐세이를 놓자 은나라의 탕왕(湯王)이 놀라서 얼른 군대를 물려 단군에게 사죄하기도 했고, 이에 단군이 하나라로 출동시켰던 군사를 빼려고 하는데 여기에 하나라가 이를 막자 단군은 거꾸로 은나라를 도와서 하나라를 부숴버렸다.(...)

다시 인구가 1억 8천만 명(...)을 찍는 등 한참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조선은, 21대 단군에 들어서 개사원의 욕살이던 고등과 그 아들 색불루의 세력이 강성해져 이웃나라들을 침략하고 급기야 단군을 자칭하기에 이르자 스스로 단군위를 버리고 은거해버렸다고 한다. 이로써 22대 단군으로 즉위한 색불루는 백악산으로 천도하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는 등 국체 개조 사업에 들어갔으나, 변방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영고탑으로 몽진하던 중 객사하였고, 그 아들 아홀이 단군위를 이어받아서 가까스로 백악산으로 환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부사정이 어찌되었든 조선은 그 뒤로도 산동과 하북을 차지하고, 은나라를 갈궈서 강소성을 삥 뜯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를 평정하는 등 위엄을 떨쳤다.

그런데 '즉위했다'와 '죽었다'가 전부인 37대 단군부터 42대 단군까지 근 2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이를 기점으로 조선은 급속도로(?) 국세가 기울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43대 단군 시절에 벌어진 우화충의 난인데, 우화충이라는 사냥꾼이 무리 수만 명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깨져나갔던 것이다. 결국 단군은 배를 타고 송화강을 따라 몽진하던 중 객사하였고,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영웅으로 떠오른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44대 단군으로 추대되었다. 구물은 국호를 대부여로,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고 삼조선의 군권을 분할하였는데, 이에 서쪽으로 연(燕)·제(齊)와 공방을 거듭하다가 결국 상곡을 국경으로 화친을 맺었다. 하지만 번조선왕이 연나라의 자객에게 살해되고 기후(箕詡)라는 사람이 번조선왕을 자칭하면서 번조선은 기자조선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이런 와중에 진조선 내부에서는 다시 한개의 반란이 일어나 46대 단군이 몽진했다가 돌아온 직후 사망하였고, 이번에도 한개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영웅으로 떠오른 장군 고열가가 47대 단군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고열가는 나라의 국력이 쇠진하고 고구려 사람 해모수가 기자조선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우외환에 처하자,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하야하는 것으로 조선을 해체시켰다. 이후 진조선은 5가가 함께 공화정치를 펴다가 6년만에 해모수에게 정권을 이양하여 북부여로 전환되었고, 한편 기자조선은 중국에서 망명해 온 위만이 나라를 차지하면서 위만조선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자연스럽게 북부여는 이렇게 생긴 위만조선과 거듭 투닥거렸지만 그 결과는 영 신통찮았고, 결국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는 꼴을 손가락 빨며 보고 있어야만 했다. 이에 위만조선에 살던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46]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눈부신 활약으로 한나라를 몰아낸 뒤 졸본부여를 세웠고(...) 이러한 고두막한의 기세에 데꿀멍한 해모수의 증손 해부루는 순순히 수도를 바치고 가섭원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졸본부여는 북부여, 가섭원부여는 동부여가 되었다. 이후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는 동부여로부터 도망쳐 온 해모수의 다른 증손자인 고주몽을 받아들여 사위로 삼고 왕국의 후계자로 지정했으니,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시작이다.

이후 환단고기에서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비해 의외로 실망스럽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단일 기록인데다, 기전체고 편년체고 아무런 원칙 없이 사건 중심으로 구성되어 그저 한민족이 위대하게 보일 수 있는 떡밥에만 집중하는 티가 확연. 고구려왕을 열제(烈帝)로 호칭한다던가, 을파소조의선인을 조직하였고 을밀연개소문이 조의선인 출신이라던가, 고구려와 백제가 요서와 중국의 동부 해안을 돌아가며 장악했다던가 정도인데, 이렇다 보니 심지어 백제와 신라에 대한 것도 별도의 체재 없이 고구려본기로 끌어다가 서술하고 있다. 그래도 역시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건 7세기 중국과의 대전쟁. 그런데 이것도 1차 고구려-당 전쟁의 화려한 승리까지만 서술하고 끝내버려서 보는 이로서는 뭐 어쩌란 거지(...) 싶을 정도.

그 뒤로 이어지는 대진국본기나 고려본기도 뭐, 이와 마찬가지다. 오히려 국제정세가 비교적 안정된 시대다 보니 덩달아 떡밥도 줄어서 개설서만 봐도 이만큼은 알겠다 싶은 수준. 다만 특징적으로 일본에 대한 서술이 묘하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는 정도? 고려본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궁예안승의 먼 후손이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안 그래도 많지 않은 분량에 고려 후기 이존비(이암의 조부)와 이암과 이강(이암의 아들)의 이야기가 비교적 상당한 분량으로 나오는데, 무엇 때문에 이 두 사람이 강조되는지는 어허, 이쯤 되면 말 안 해도 아셔야지.(...) 그리고 최영요동 정벌군의 팔도도통사로 임명되는 대목에서 고려본기를 끝으로 모든 환단고기 분량도 끝난다. 끝부분은 정말로 성의 없이 쓴 것을 알 수 있다.

3.2.1. 양적 고증오류

3.2.1.1. 크고 아름다운 환상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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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환국과 환인에 대한 이야기는 초장부터 환인을 신(神)이라고 칭하는 데에서 보이듯 신화적인 성격이 짙게 깔려 있다. 실제로도 이유립은 1976년까지만 해도 환국을 신화적인 유토피아로 묘사하고 있었지만, 환단고기를 출판하면서 이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개변했던 것이다. 물론 정말로 큰 문제는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려는 사람들이겠지만.

일단 환국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그리고 보는 이들에게 가장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는 환국의 강역 문제부터 따져보자. 환단고기에서는 환국의 강역에 대해서 삼성기 전 하편과 태백일사 환국본기에 두 번이나 거듭해 동서 2만 리, 남북 5만 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어마무지한 기록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아서 머릿속에서 그 크기를 보정해 위와 같이 환국의 지도를 크고 아름답게 그리지만, 엄밀히 말해 위 지도는 크게 잘못되었다. 거듭 강조되는 바이지만 헷갈리지 말자. 환국은 동서 5만 리, 남북 2만 리가 아니다. 동서가 2만 리, 남북이 5만 리다. 가로축(위도선)보다 세로축(경도선)이 두 배 이상 길다. 따라서 정말로 환단고기 본문에 입각해 환국의 지도를 그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지도가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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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Unknown)]


지도 안에 표시가 다 안 된다.(...) 남북 5만 리를 현대의 미터법으로 환산해보면 2만여km(19636.36…km)가 산출되는데, 애당초 1km의 정의가 극점에서 적도까지 자오선의 1만분의 1이다.[47]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환단고기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환국은 남극에서 북극까지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면 아문센 VS 스콧 문서를 강추. 동서 2만 리라는 거리도 또한 러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라시아를 가로질러서 터키 앙카라까지의 직선 거리가 약 2만 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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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Unknown)]


그렇다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정하는 것처럼 동서 5만 리에 남북 2만 리로 거리 방향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하지만 이것도 지도 안에 표시가 다 안 되기는 마찬가지. 동서 5만 리에 남북 2만 리는 아예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고도 남는 거리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라도 정복할 기세.(...)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여기에 단위 환산의 문제를 제기해서 환단고기의 도량형이 오늘날보다 훨씬 작았으리라는 가정을 제기한다면 모르겠는데, 문제는 그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도 아닌 자그마치 기원전 7197년에 자그마치 수만 리에 달하는 거리를 과연 어떻게 측정할 수 있었을지를 먼저 의문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는 애당초 문자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던 당시에 리(里)라는 단위를 어떻게 사용하고 그 정보를 후세에 전달할 수 있었을까? 언어도 통일되지 않고 교통과 통신 수단도 거의 전무한 상황 속에서 그 인구가 아무리 수만 명에 불과하다 해도 산과 바다와 강과 밀림 등 수많은 지형적 난관이 있는 이 엄청난 영역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모종의 인물을 중심으로 결합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에덴의 조각이라도 쏘아올린 모양이죠

더불어 환단고기에는 7명의 환인이 3301년 혹은 63182년을 이어서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 이유립이 추산하였던 구석기 후기와 구석기 전기의 기간이다. 그러니까 결국 환국의 존속 기간은 석기시대에 대입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 그런즉 이처럼 망상에 논리를 끼워맞추려다 보니 무리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라, 후자에 따르면 환인 한 명에 평균 9026년, 전자에 따르면 환인 한 명에 평균 472년을 다스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추종자들은 한 명의 환인이 하나의 왕조이지 단일인이 아니라고 역설하지만, 1000년을 갔던 왕조2200년을 갔던 나라는 알아도 9026년을 갔다는 왕조는 정말로 전무후무하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초고대문명이냐?

따라서 환국과 관련된 이야기는 故이윤기씨의 말처럼 절대로 과학적·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20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신화'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애당초 절대적인 신화의 영역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고. 덧붙여서 환국을 이루고 있던 12국가와 영역이라는 것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서 사이전과 광개토왕릉비문을 주로 섞고 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걸 적당히 짬뽕해서 연성해낸 것. 충격과 공포의 5만여 리라는 거리도 사실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참 간파하기 쉬워서 좋다.(...)

1 비리국(卑離國)진서 사이전숙신의 서북으로 말을 타고 200일을 가면 있다. 2만 호.
2 양운국(養雲國)진서 사이전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50일을 가면 있다. 2만 호.
3 구막한국(寇莫汗國)진서 사이전양운국에서 말을 타고 100일을 가면 있다. 5만여 호.
4 구다천국(句茶川國)삼국사기대무신왕 5년에 개마국이 정복되자 구다국(句茶國)이 항복.
독로국(瀆盧國)삼국지 동이전변진 12국의 하나로 지금의 부산 동래이다.
5 일군국(一群國)진서 사이전구막한국에서 150일을 가면 있다. 여기까지 숙신에서 5만여 리.
6 우루국(虞婁國)신당서 북적전말갈의 불열, 철리, 월희부와 나란히 열거된다.
필나국(畢那國) 우루국을 환국의 동쪽 끝(畢)에 있는 나라(那)로 보았던 듯하나 불분명.
7 객현한국(客賢汗國)광개토왕릉비문수묘인연호로 객현한(客賢韓)이 등장한다.
8 구모액국(句牟額國)광개토왕릉비문수묘인연호로 구모객두(勾牟客頭)가 등장한다.
9 매구여국(賣句餘國)광개토왕릉비문수묘인연호로 매구여민(賣句余民)이 등장한다.
직구다국(稷臼多國) 위 구다국(句茶國)의 파생형으로 보이나 불분명.
10 사납아국(斯納阿國)이유립 총서남시베리아의 사얀 산맥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확인바람.
11 선비국(鮮裨國)삼국지 선비전선비족에서 따온 것이다.
시위국(豕韋國)북사 사이전실위에서 따온 것이다.
통고사국(通古斯國)혁명군마전졸퉁구스족에서 따온 것이다.
12 수밀이국(須密爾國) 수메르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되나 불분명.

3.2.1.2. 자꾸만 사라지는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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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줄어드는 위대한(?) 한민족의 강역. 비참할 정도(...)[48]

게다가 정작 위 지도의 영역도 환단고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의 내용을 그 추종자들이 제멋대로 부풀린 것이다. 환단고기에서 묘사하는 한민족의 강역은 의외로 좁다. 치우가 정복한 영토는 고작해야(?) 탁록과 회하를 넘지 않았으며, 고조선의 강역이라는 것도 만주와 요서 지방에 그치고, 진출 범위를 멀리 잡아도 전기에는 티베트까지 넘나들다가 나중에는 항산(恒山)까지도 못 가서 헥헥거리는 모습이 비치니 그저 안습.(...)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환단고기의 내용은 무조건 큰 영토를 추구하는 '대물빠'적 관점에서 보면 실망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고, 대륙설에 도취된 사람의 시선에서 읽어보면 굉장히 실망스럽다.

우선 환국에서 배달국으로 넘어가면서 위에서 살펴보았던 광활한 영토(...)가 사라진 것부터가 미스테리. 그래도 환단고기에 보면 "이때 족속의 호칭이 한결같지 않고 풍속이 점차 달라졌다"는 내용이 있기는 한데, 이제 막 분화되기 시작한 민족들의 반발에 자비롭게 독립을 인정해주고 땅을 떼어주다 보니 점차 줄어든 것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작은 부족 시절부터 조그마한 땅덩어리 두고 피 터지게 싸운 것이 인간의 역사인데 저런 세계구급 땅덩어리를 자비롭게 포기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헛소리인지. 하다못해 그렇게 불가피하게 영토를 떼주더라도 최소한 봉건제처럼의 주종관계를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나마 가장 설득력 있게 구성할 수 있는 스토리는 전세계적으로 환국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 환국이 해체되거나 환국이 가지고 있던 초고대문명스러운 교통·통신망이 한순간 증발하는 등 어떻게든 국가 막장 테크를 탔다는 설정이다. 이 모든 걸 해소할 수 있는 떡밥은 에덴의 조각입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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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진시황제는 환웅에게 불로장생을 물었다 카더라
환국의 뒤를 이어 즉위한 배달국의 초기 영역이 정확하게 묘사된 바는 없지만, 그 중심지가 태백산 신시이고 이후 중국의 비옥한 땅을 탐내어 이주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만주에서 요서를 넘지 않는 선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후 5대 태우의 환웅에 이르러서는 막내 왕자 복희가, 8대 안부련 환웅에 이르러서는 소호와 소전이 이주해가는 등 지속적인 확장으로 배달국의 강역은 급속도로 뻥튀기되었고, 급기야 10대 갈고 환웅은 중원의 패권을 잡은 소전의 아들 신농과 강역을 정해 공상(空桑) 이동을 배달국의 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즉 기원전 30세기 즈음에는 위와 같았다는 말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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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로부터 300년 뒤에 치우가 정복했다는 영토를 보면 이로부터 이미 자기 땅인 동네를 재정복하고 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치우가 차지한 영토는 기(冀)·연(兗)·회(淮)·대(岱)라고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회와 대가 새로 정복한 땅으로 여섯 번이나 강조되고 있는데, 문제는 이곳은 이미 300년 전에 배달국에 귀속된 공상 이동의 바로 그 땅이다. 또한 탁록 서쪽으로 요서 지방까지는 창힐의 영역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역시 배달국이 창힐에게 자비롭게 독립을 인정해주었다는 소리가 된다. 요약하면 배달국의 영역은 300년 사이에 요서와 산동-강소 지방이 소리 없이 증발해버렸다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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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단군시대에도 영토 증발 신화는 계속된다. 초대 단군인 왕검의 외할아버지 웅씨왕(熊氏王)이 전사하자 왕검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서 온 한민족을 통일했다고 하니 배달국 말기에 모종의 난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다른 기록들에서는 아주아주 평화롭게도 백성들이 알아서 복종하며 임금으로 추대했다고 서술되어 있으니 이 무슨 인지부조화.(...) 우리의 배달국이 막장이었을 리 없잖아! 이에 단군 왕검은 자신이 통일한 땅을 셋으로 갈라서 진한·마한·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하는데, 단군 왕검 자신은 진한을 다스리니 수도는 송화강 유역의 아사달이고, 마한에는 웅씨왕의 일족 웅백다를 책봉하니 수도는 대동강 유역의 달지국[49]이고, 번한에는 치우의 후손 치두남을 책봉하니 수도는 요서의 험독[50]이었다고 한다.

또한 앞에서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했던 회·대 지방은 또 어느새 흘리고 다녔는지,(...) 단군 왕검 재위 67년에 다시 제후들을 평정하고 일종의 자치정부라 할 수 있는 분조(分朝)를 낭야성에 두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에 대해서도 단군세기에는 순임금에게 분조를 감독시켰다고 하고 태백일사에는 번한이 분조의 정무를 겸했다고 해서 환단고기 안에서도 말이 상충된다. 그래도 절충하자면 번한이 맡아 다스리지만 순의 조언이나 의견을 수렴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위에서 치우가 애써 차지했던 하남성 공상, 하북성 탁록 일대는 어느새 증발해버려서 더 이상 조선의 영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즉 단군이 개국한 기원전 22세기 즈음에는 위와 같았다는 말이 되겠다. 아 자비롭다 덤으로 티베트까지 원정하여 중앙아시아의 강거(康居)에 원정한 사실이 있으나 영토를 확장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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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개조된 조선

이로부터 다시 천여 년이 지나서, 기원전 13세기에 힘으로 단군이 된 색불루가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고는 은나라를 갈구어서 회·대 지방을 얻었다고 한다. 거꾸로 말해 이 즈음이면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 왕검이 평정했던 회·대 지방이 어느새 다시 증발은나라 땅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때 번조선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남국(藍國)이 크게 흥기해 엄독홀로 이주하고 은나라와 국경을 접했는데, 바로 그 남국의 왕 금달이 또다시 은나라를 갈구어서 회·대 지방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작 44년 만에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 왕검이 평정하고, 색불루가 뜯어냈던 회·대 지방이 어느새 다시 증발은나라 땅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덤으로 다른 한 갈래는 멀리 서쪽으로 가서 관중에 여(黎)라는 나라를 새로 세웠고, 이로부터 조선의 세력이 멀리 항산까지 미쳤다고 하는데 티베트까지도 원정가시던 분이 갑자기 항산 정도를 가지고 멀다고 말씀하시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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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500년 정도 이대로 영토가 유지되어오는 듯 보이다가, 기원전 8세기가 되면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고조선의 영토가 찌그러든다.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 왕검이 평정하고, 색불루가 뜯어내고, 금달이 정복했던 회·대 지방은 더 이상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증발한 듯하고,(...) 대신 이제는 그 자리에 연나라제나라가 등장해서 조선의 세력과 투닥거린다. 조선은 이들과 상곡·조양을 국경으로 삼고 나중에는 만·번한까지 밀렸다고 하지만, 번한이 번조선의 수도 험독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건 밀린 것도 아니고 상곡·조양이나 만·번한이나 애당초 거기서 거기다.(...)

이는 춘추시대 이래의 고조선이 요동에 머물러 있었으며, 국력도 전국시대의 2류 강국인 연나라와 티격태격 하는 수준의 나라였는데, 환단고기에서는 나의 크고 아름다운 조선이 그랬을 리 없다는 생각으로 번조선이라는 허수아비를 내세웠던 것이다.[51] 맞는 건 번조선이 하고, 때리는 건 단군조선이 하고.(...) 이밖에도 때때로 가끔 (齊)와 싸운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진짜 강국이었던 진(晉), 진(秦), 초(楚)와는 아예 충돌한 기록 자체가 없다. 여기까지 영토가 뻗어나간 적이 없는 것. 따라서 의외로 환단고기의 단군조선은 그렇게 까지 강대한 나라가 아니며, 국력은 영토와 별개로 잘 쳐줘서 전국칠웅과 비슷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52]

정리하자면 단군시대까지 환단고기의 영토 주장은 이런 바보짓거리가 되겠다.

  • 갈고 환웅이 하남성(兗), 하북성(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확보(BC 30c)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
  • 치우 천왕이 하남성(兗), 하북성(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BC 26c)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
  • 단군 왕검이 하북성(幽),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확보(BC 2267)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
  • 단군 색불루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BC 1285)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
  • 남국왕 금달이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BC 1236)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
    ※ 요서 이동의 남은 영토는 내휴 8년(BC 902)에서 사벌 66년(BC 707)간에 마저 증발하고 연나라제나라가 들어선다.

분명히 내용을 보면 이기기만 하고 있는데 객관적인 영토는 쪼그라드니 그야말로 이뭐병.(...) 이거 뭐야... 대체 뭐냐고!![53]

3.2.2. 질적 고증오류

3.2.2.1. 시대를 초월한 통치제도
이와 더불어,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단군조선을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조선이 일개 읍락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는 단군조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읍락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단군조선은 그러한 수많은 읍락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읍락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단군조선을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단군조선의 뒤에 등장한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등 한국의 국가들도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읍락국가군으로 구성된 국제 사회의 대표적 읍락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상고사』의 신채호 등 후대의 민족주의 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년 전의 단군조선에 투사하여 단군조선을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이다.[54]

사실 조금이라도 생산수준과 정치체제의 발전 정도를 관련지어 사고할 수 있다면, 위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는 기원전 수천년 즈음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런 광대한 영토를 엄밀한 역사적 개념의 '국가'로 다스리는 건 어디의 누구라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은·주라고 하는 중국사의 첫머리에 위치하는 나라들 또한 말이 '나라'지 그 크기는 고작해야 오늘날의 읍 단위 도시 하나와 그를 둘러싼 공동체 정도[55]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만이 아니라 고대 수메르, 이집트, 그리스, 인더스 등도 역시 수없이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난립한 모습이었고, 한국사에서도 수천 호 단위의 78개 소국들이 집합된 삼한이 있다가 단계적으로 통합되어갔다. 즉 이러한 과정은 정치사적인 발전 단계에서 보편적이고도 당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환단고기에 묘사되는 국가체제는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있다. 환단고기를 해석해보면 조선은 만주에서 하북성 및 산동성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봉건제와 군현제를 병행하였던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 보이는 봉건제라는 것 자체도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관료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직위를 세습하고 일정한 외교, 인사, 군사권을 행사했지만 기본적으로 분급된 영역을 단군을 대신해 '관리'하는 것이었으며, 군사권이 단군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그 처신에 따라서 단군으로부터 상이나 벌을 받았고, 나아가 단군이 일방적으로 책봉하거나 폐위시킬 수도 있었다.

통치자보다 관리자에 가까움웅녀군(熊女君)이 천왕의 신임을 얻어 세습하여 비서갑(斐西岬)의 왕검(王儉)이 되었다. 왕검은 속언에서 대감(大監)인데, 영토를 관리하고 지키면서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돕는다.
웅씨왕이 그의 신성함을 듣고는 뽑아 비왕(裨王)으로 삼았으니 대읍(大邑)의 국사를 섭행하였다.
정사는 천왕으로부터 말미암고 삼한이 모두 하나되어 명령을 따랐다.
군사권이 단군에 종속개사원욕살(蓋斯原褥薩)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로 귀방(鬼方)을 습격하였다.
웅갈손(熊乫孫)을 보내 남국군(藍國君)과 더불어 남정(南征)한 병력이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폈다.
화친하고 전쟁할 권리가 일존(一尊)에게만 있지 않게 되었다.[56]
평가와 상벌의 대상제한(諸汗)들의 선악을 살펴서 상벌에 지극히 신중하였다.
비를 세워 열성군한(列聖群汗)들의 공로를 새겼다.
열양욕살(列陽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게 하였다.
일방적으로 책봉 또는 폐위 가능군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고 다 쫓아버린 뒤 그 군(君)으로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책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열양욕살(列陽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게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고 그 땅에 봉하였다.
우사(雨師) 소정(小丁)을 내보내 번한으로 보임시켰다.
서우여(徐于餘)에게 정무를 위임하고자 하여, 살수(薩水) 둘레 백 리에 그를 책봉하고 …… 서우여(徐于餘)를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명하여 여원흥(黎元興)을 마한(馬韓)으로 삼아 막조선(莫朝鮮)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徐于餘)를 번한(番韓)으로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리게 하였다.

BC 22C처음에 우순(虞舜)이 유(幽)·영(營) 두 주(州)를 남국(藍國)의 이웃에 설치하였다.
BC 2267국경을 헤아려 정하니 유(幽)·영(營) 두 주(州)가 우리에게 속했다.
BC 2173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이 반란하였다.
BC 1767주현(州縣)을 정하여 세우고 직제를 나누었다.
BC 1180뭇 주군(州郡)을 순시하였다.
BC 426서북방 36군(郡)이 무너졌다.
BC 409감찰관(監察官)을 보내어 주군(州郡)의 이민(吏民)을 규찰하였다.
BC 380연나라 사람들이 변군(邊郡)을 침탈하였다.
BC 290주군(州郡)에 명하여 현량(賢良)을 천거시켰다.

간접통치의 봉건제가 이러하니, 직접통치의 군현제를 실시했다는 기록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단군조선의 행정 구획으로는 가장 먼저 주(州)가 확인되는데, 중국의 우공구주(禹貢九州)에 비추어보면 단군조선에도 주가 존재했다는 게 납득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중국의 '구주'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구획된 각이한 아홉 개의 주가 있었다는 게 아니라, 단순히 많은(九) 고을(州)[57]을 뜻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광역적인 실체가 부여되고, 이에 기반해 한무제가 전국을 13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주가 실제적인 행정구획이 되었던 것이다.

즉 주(州)라는 것은 전한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광역적 행정단위의 의미로 정착되었으므로 단군조선 시기에 벌써부터 행정구획으로서의 주가 존재했다거나, 순임금에 그러한 행정단위로서의 주가 설치되었다는 내용이 실린 환단고기의 기록은 자연스럽게 역사상의 실제와 어긋나는 엉터리 소리가 된다. 창작할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독자적인 명칭을 만들 것이지, 그걸 또 굳이 중국의 주라는 명칭을 가져다 써서 그 의미가 형성되고 변동된 과정과 시기를 추적하면 환단고기의 내용이 거짓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으이구 한심

또 기원전 1767년에는 단군흘달이 주(州)만이 아니라 현(縣)도 설치했다고 나오는데, 이러한 현이라는 제도 또한 중국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충분히 그 기원이 추적 가능하다. 현이라는 것은 춘추시대에 처음 등장하는데 기원전 6세기에 진(晉)에서 현대부(縣大夫), 초(楚)에서 현공(縣公)·현윤(縣尹)을 통해 멸망시킨 읍을 변경을 방위하는 군사 거점으로서 다스렸던 것이 그 시초가 된다.[58] 물론 이 시기의 현은 아직 봉건제의 변형으로서 후대와 같이 군주의 직접지배라는 성격을 띤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제후가 측근에게 준 봉읍이나 마찬가지로 사유적인 영지였다. 즉 종래의 간접적인 봉건지배체제에서 직접적인 군현지배체제로 전환되는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그런 거 없고, 그냥 내가 직접지배 하겠다는데 뭔 상관(...)이라는 수준이다. 주나라 여왕(厲王)이 산림천택을 국유화하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고, 초나라 영왕이 진(陳), 채(蔡)를 현으로 삼았다가 반란이 일어나 패가망신한 것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큰 영토를 단번에 현으로 만들었다가는 나라가 수십 번은 더 뒤집혀도 모자랄 상황이다. 때문에 단순한 군사거점을 넘어서는 본격적인 군현제의 실시를 위해서는 생산력의 획기적 개선, 중앙의 절대적인 힘의 우위, 지방의 씨족적 공동체 질서 와해, 군주권을 보좌하는 측근 집단의 출현 등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도대체 환단고기 어디에 그런 거대한 변화의 묘사가 나오나?(...)[59]

3.2.2.2. 엉터리 방터리 사회상
각 시대의 사회 상태는 우리 대에서 각 분야의 자료에 의해서 항상 그 개략적인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아무 책에서 그 시대 상황을 말한 것이 사리에 있어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라면 바로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 량치차오(梁啓超), 『중국역사연구법』

이와 같은 제도적인 측면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 바로 당대의 사회구조, 즉 통치와 생활의 중심이었던 각 읍락 내부의 사회적 모습이다. 물론 단군시대 당시의 사회적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문헌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지만, 대신 환단고기에서 상대적으로 봉건세력의 활동이 제약되고 군현제가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기술한 기원전 8~7세기[60]의 청동기시대 사회구조를 현재까지 축적된 고고학적 정황을 통해 추적하고 환단고기의 내용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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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에 표시된 한국 관련 청동기문화권(1~11)에서 기원전 8세기에 군장사회[62] 단계에 도달한 것은 가장 서쪽에 있는 십이대영자 문화(1)밖에 없었다. 십이대영자의 대형 석곽묘군은 주위의 다른 중소형 고분들과 별도로 대릉하 근처 언덕 위에 독립적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청동검·청동거울·청동도끼 및 각종 위세품이 다량 부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주위의 다른 중소형 고분들이 피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이 거의 부장되어 있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단수로 소량 부장된 것과 대조적이다. 따라서 기원전 8세기에 십이대영자 문화는 전문적인 수공업과 사회적 위계화가 진행된 군장사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지역들은 여전히 부족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타 지역에서 청동기물의 발견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정되고, 그러한 청동기물이 발견된 고분이 입지상이나 크기상으로 다른 고분들과 구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서단산 문화(6) 등에서 토기 및 석제 부장품의 다양화를 통해 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성이 심화되어가는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요동과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거대 지석묘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의 재분배와 집단의 공동 의식을 주재하는 지도자로서 발전된 부족장의 면모 정도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십이대영자 문화(1)와 여타 지역들 사이의 사회 발전 격차는 기원전 6세기 중반에 대릉하 유역의 십이대영자 문화에서 일군의 집단이 요하를 건너 심양에 정가와자 유형을 형성하면서부터 비로소 좁혀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만주의 서단산 문화는 취락의 숫자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지만 여전히 청동기물의 독점적 소유 등은 보이지 않다가 기원전 5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양한 청동기물의 소유 차등,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거주공간 분리 따위가 일어나게 된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서는 금강 유역에 간석기, 쌀농사, 환호취락, 송국리형 주거, 송국리형 토기로 특징되는 송국리 유형이 발전하였지만 기물이나 공간이 독점화된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고,[63] 기원전 4~3세기 충청남도 일대의 남성리 유형이 정가와자 유형의 영향하에 군장사회로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서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환단고기의 내용과 심하게 배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군현제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는 기원전 17세기는 고사하고, 그로부터 천 년 가까이 지난 기원전 7세기에조차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는 균질적인 영토라던가 통일적 집권국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환단고기에서 당시 단군조선의 중심지라 주장하는 송화강 유역의 길림-하얼빈-영고탑 일대[64]가 그 부속국인 번한이 위치하고 있는 요서보다도, 아니 만주 일대에서 가장 정치적 경제적 통합이 미진한 후진지역이었다.(...)

BC 38C네 집이 정(井)을 함께하고, 20에 1을 세금으로 냈다.
본래 신시의 구정균전(邱井均田)의 유법(遺法)이었다.
BC 2240매 봄과 가을마다 국내(國中)를 순시하며 예로써 하늘에 제사지냈다.
BC 2231구정(邱井)을 긋고 전결(田結)을 삼아 백성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했다.
BC 2175명하여 차등 있게 조세(租稅)를 감면하였다.
BC 199420에 1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였다.
BC 1993농지(田)를 나누어 땅을 주었다.
BC 1990단군이 미복하고 국경(國境)을 나가 하나라의 정세를 관찰하고 돌아왔다.
BC 1833단군이 국내(國中)를 순시하다 요하(遼河)의 좌안에 다다라서는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웠다.
BC 166280에 1을 세금으로 내는 제도를 고쳤다.
BC 1501단군이 오가(五加)와 함께 국내(國中)를 순력하다 개사성(蓋斯城)의 경계에 다다랐다.
BC 1286단군이 국내(國中)를 순수하여 남으로 해성(海城)에 다다랐다.

더욱이 이러한 사회적 여건 위에서는 '나라'라는 개념 자체도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단적으로 춘추시대에는 나라의 중심에서 제후가 거주하는 중심적 읍을 가리켜 국(國)이라 불렀고, 교(郊) 밖으로 이러한 국을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원야를 가리켜 야(野)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원야의 여기저기에 점점이 존재하는 소읍락이 비(鄙)이며,[65] 이밖에도 읍락의 성격이 국에 가까운 도(都)가 공족과 귀족의 채읍으로 존재하면서 주변의 비읍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 안에 거주하는 지배집단은 국인(國人), 성 밖에 거주하는 피지배집단은 야인(野人) 또는 비인(鄙人)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66]

따라서 초기에 국(國)이라는 개념은 중층화된 읍락들의 정점에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읍락을 가리키는 것일 뿐, 일정한 선으로써 존재하는 국경의 안이라던가 하다못해 지배력이 미치는 영역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조차도 아니었다. 이는 생산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읍락의 외연에 존재하는 농지(野)와 농지(野) 사이에 광대한 규모의 미개간지, 일종의 공백지대가 존재하였고 이 때문에 읍락국가는 아직 영역국가로 발전할 수도, 발전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일국의 속읍이 타국을 초월하여 존재할 정도로 이 시기 국경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았고 오직 속읍에 대한 영유권만을 확보할 뿐이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이러한 초기 국가의 사회상을 무시하고 '국(國)'이라는 글자를 명백하게 지배력이 미치는 일정한 경역으로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토지세(田結·租稅)를 걷는다거나 백성들에게 농지를 분급했다는 데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노릇이다. 토지에 세금을 물렸다는 것은 노역에 의해 공동경작하는 씨족공동체가 해체되어 사적 토지점유의 불균등이 발생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 밖으로 미개간지가 널려 있는 상황인데 토지를 분급하기는 왜 분급한다는 말인가?[67]

3.2.2.3.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인
국가의 형성과 탄생이라는 측면에서도 환단고기에 실린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환단고기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환국과 배달과 조선 모두 어떤 위대한 신인(神人)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오오 하느님 오오'하고 알아서 와서 모셨다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의 역사 이해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종교적 영웅주의가 대단히 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발적으로 윗사람으로 모시는 것도 모자라 알아서 가진 걸 주기적이고도 정기적으로 가져다 바치는 게 말이 되는가.(...)

또한 환국이 성립되었다는 기원전 670세기는 제껴두고 기원전 72세기는 이제 막 초기 농경 사회가 시작될 즈음이었다.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93-75세기에는 요르단 강에서 야생 밀과 보리가, 기원전 80-45세기에는 장강에서 야생 쌀이, 기원전 65-55세기에는 황하에서 야생 기장이 곡물로 개량되었다. 그런즉 이제 막 사람들이 초보적인 정착 생활을 시작하던 시점에 환단고기는 졸라게 위대한 성인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절로 모여서 자그마치 한 대륙을 넘어서는 규모의 제국이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저런 전제와 부연을 더한다면 환단고기의 기록을 꿰어 맞추는 것도 가능은 하겠으나, 그렇다면 지배하지 않고 징세하지도 않으며 균질적인 공동체 의식은 물론 정부조직도 없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과 나라가 없었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 상고사 안의 환국

그리고 환국이 수메르부터 바이칼, 몽골, 중국, 만주, 일본을 모두 지배했다면 관련 유적이나 유물이 나와야 하지만 당연히 그런 거 없다.[68] 환단고기 신봉자들은 중국과 일본이 감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나 세계사가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 중국과 일본 외에 환국의 본고장인 시베리아, 그리고 심지어 한국에서도 유물은 나오지 않는다. 국가 권력으로 자그마한 지역 문명도 아니고 커다란 제국을 숨긴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며, 그것이 부끄럽다면 일본은 고대 한국을 통해 넘어온 문물 또한 숨길 것이나 그것을 증명하는 유물과 사적은 일본내에 널리고 널렸다.[69]

더불어 환국의 중심지로 지목되는 시베리아 남부 바이칼 호 일대는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농경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기원전 120세기에 뷔름 빙기가 끝나고서도 한동안 빙하기의 연장선상에 있던 이 지역은 기원전 60세기가 되어 온난습윤한 아틀란틱기가 도래함에 따라 기후가 호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마저도 여타 지역들에 비해서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고 이는 대체로 농경보다는 삼림자원의 증대라는 측면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되어서도 중석기 시대의 수렵·채집 경제가 지속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정기적인 수입과 중장기적 저장성 그리고 무엇보다 순환적인 생산력 증대를 보장하는 농경과 목축으로 부(富)의 등장과 계층의 분화가 일어날 일은 없었다.

이처럼 온갖 문제점을 안고 있는 환단고기에 비해 고고학의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둔 현대 역사학이 제시하는 국가의 형성 과정은 훨씬 더 설득력 있다. 수많은 논의가 있지만 이를 개략적으로 정리하면 신석기 시대에 빙하기가 끝나고 정주생활이 시작되면서 여러 가족이 한 지역에 모여서 마을 단위로 응집되었고, 이후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한정된 자원의 독점을 바탕으로 위계질서가 고착화되어 국가 단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청동기와 같은 금속 기술의 출현은 채굴, 정련, 조형, 주조, 보수 등 전문적인 분업체계를 발생시켰고 자원의 독점과 맞물려 자원 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상업의 등장, 전쟁의 격화, 생산의 증대, 그리고 부가적으로 환경의 악화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마침내 최초의 계급적 고대국가가 배태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읍락'을 넘어서서 '국가'가 탄생했다는 관념은 바로 이러한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진화 과정을 그냥 싸그리 무시하고 반대로 환국에서 배달국으로, 배달국에서 고조선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영토가 축소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도리어 극단적으로 '좋았던 옛날'이라는 비과학적인 신비주의 역사관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군주들의 수명도 환웅들은 기본이 100세이고, 최장기록은 자오지환웅으로 무려 151세에 달한다. 재위기간만 109년.(...) 괜히 진시황이 불로초 구하러 사람 보낸 게 아니다. 다음 통계를 참고.

왕조 재위기간 수명 출전
총계 평균 최장 최단 평균 최장 최단
환인1~7 63182 9026 환단고기
3301 472
환웅1~18 1565 87 109 48 118 151 82
단군1~47 2096 45 93 8
1 93 93 93 93 130 130 130
마한1~34 2028 60 96 1
번한2~71 1855 27 73 1
북부여1~4 153 38 49 25
동부여1~3 108 36 41 28
졸본부여1~2 51 26 49 2
고구려1~28 708 25 93 4 55 118 ±22 고자묘지명
삼국사기
11~28 441 25 78 7 50 98 ±22

  환단고기 단군 재위년(연도) 집계
90왕검(93) 1
80솔나(88) 1
70아홀(76) 1
60흘달(61)고불(60)여을(68)추로(65)사벌(68) 5
50부루(58)한율(54)노을(59)도해(57)아한(52)대음(51)위나(58)구모소(55)소태(52)매륵(58)마물(56)여루(55)고열가(58) 13
40가륵(45)동엄(49)고홀(43)색불루(48)다물(45)보을(46) 6
30오사구(38)달문(36)아술(35)마휴(34)나휴(35)추밀(30)두홀(36)물리(36) 8
20두밀(26)해모(28)등올(25)감물(24)오루문(23)음차(20)구물(29) 7
10구을(16)연나(11)달음(18)을우지(10) 4
00우서한(8) 1

  삼국사기 고구려왕 재위년(연도) 집계
90태조대왕(93) 1
80 0
70장수왕(78) 1
60 0
50 0
40고국원왕(40) 1
30유리명왕(36)산상왕(30)미천왕(31)평원왕(31) 4
20대무신왕(26)동천왕(21)중천왕(22)서천왕(22)광개토왕(22)문자명왕(27)영양왕(28)영류왕(24)보장왕(26) 9
10동명성왕(18)차대왕(19)신대왕(14)고국천왕(18)소수림왕(13)안장왕(12)안원왕(14)양원왕(14) 8
00민중왕(4)모본왕(5)봉상왕(8)고국양왕(7) 4

3.2.3. 이런저런 용어의 문제

일단 수백 년 내려왔다는 역사서에 근대의 한자가 왜 있는데?[70] 단적으로 일본에서 서구의 언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세계(world), 인류(human), 국가(nation), 권리(right), 산업(industry), 공화(republica), 유신(reformation), 문명(civilization), 개화(civilize), 문화(culture), 개체(individual), 자유(liberty), 평등(equality), 평화(peace)와 같은 것들이 그대로 실려있다. 유신과 같은 한자 조어들은 애당초 고전으로부터 차용된 것이며 한자 자체가 한 글자에 하나의 의미가 부여되는 만큼 이러한 조어들이 전근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을 수는 있지만, 그 하나하나가 굉장히 근대적인 의미를 띠고 있으므로 이러한 단어들이 동시에 하나의 문헌에 다발적으로 출현하였다 함은 내용상의 문제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국가(nation)국가에 큰일이나 재이가 있으면 늘 여기 기도하니 민지(民志)가 하나로 정해졌다.
국가가 유사시에는 몸을 버려 의를 보전하며
장차 국가에 이롭지 않으리라
그 저서 단군세기는 시원국가(原始國家)의 체통(體統)을 밝혔다.
국가가 이미 여러 기씨들을 주살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기로 하였다.

  • 전근대의 '국가'는 하나의 군주를 정점으로 공유되는 수직적인 공동체로서, 오늘날과 같이 사회 각 개인이 상호 교류를 통해 내적으로 투영하는 등질적 공동체와는 분명히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국가'와 '민족'이 서구에서 들어온 nation의 번역어로 채택됨에 따라 비로소 국가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71] 때문에 전근대의 국가란 군주의 소유하에 있는 실재적·비실재적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각 개인에게 1대 1로 투영되는 충성의 대상이나 주체성 및 객체성을 가진 무언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는 근대적 국가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권리(right)화친하고 전쟁하는 권한(權)이 일존(一尊)에게만 있지 않게 되었다.
남녀의 권리(權)가 평등하고 노소의 역할을 나누며
의식을 고르게 함에 또한 권리를 평등히 하며
각기 직권이 있으니 서로 침범하여 넘지 말라.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聖朝)에게 돌아왔다.

  • 본래 '권(權)'이라는 글자는 저울을 뜻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통치자가 담지하는 기준이나 판단의 의미로 확장된 말이었다. 즉 본래 이것이 뜻하는 말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right)가 아니라 기준적인 판단을 가리키는 권력(power)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전통 사회에서 익히 사용되었던 권도(權道)라는 단어는 상황에 맞추어서 행동을 판단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것이 지금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권리'가 서구에서 들어온 right의 번역어로 채택되면서부터의 일이다.

공화(republica)5가가 비로소 공화의 정치를 거두었다.

  • 본래 '공화'라는 말은 기원전 9세기에 주나라에서 여왕(厲王)이 쫓겨나고 귀족 공백화(共伯和)[72]가 왕 없이 정무를 맡아 본 것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공화'가 본격적으로 왕 없는 공동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어로 쓰이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이것이 서구에서 들어온 res-publica의 번역어로 채택되면서부터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문자 그대로 '함께 화합한다'는 의미로 쓰였다.[73]

문명(civilization)
개화(civilize)
문화(culture)
물길을 준설하고 농잠을 권장하며 집을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여
문명으로 다스리고 개화하여 평등하니
환도 문명의 성대함이 나라 밖에 소문났다.
세계 문명에서 우리가 가장 오래되었다.

  • 본래 '문명', '개화', '문화'라는 말은 정신적인 맥락에서 성현이나 군주의 가르침을 밝혀서 백성들이 바르게 사는 상태로 이끈다는 교화(敎化)의 뜻이었다. 이것이 정신적이고 사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을 포괄하는 인간의 성취나 생활 양식 전반을 가리키는 단어로 확장되는 것은 근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문명'과 '개화'가 서구에서 들어온 civilization의 번역어로, '문화'가 서구에서 들어온 culture의 번역어로 각각 채택되면서부터의 일이다.

개체(individual)비고 성김은 한 몸이고 개체(個)와 전체는 하나 같으며

  • 본래 '개(個)'는 오늘날과 같이 전체와 반대되는 각각의 특수성을 가진 존재들을 가리키는 의미의 말이 아니라 단지 수를 셀 때에 붙이는 수량사로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에 들어 서구의 언어가 들어오면서 중국어로 먼저 individual을 일개(一個)라는 의미로 번역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비롯되어 일본에서는 individual에 상응하는 것으로 인민각개(人民各個)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그러다 개인주의라는 조어의 확산과 함께 개인이라는 말이 독립적 의미를 지니게 되면서 비로소 '개'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단어로 정착되어 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명에서도 이런 문제가 드러난다. 환단고기에서 고조선의 중심지로 자주 등장하는 영고탑(寧古塔)[74]은 본래 만주어 닝구타(ningguta)의 음역으로써 청나라 초기인 17세기가 되어서야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지명이다. 당시 이곳에 유배되었던 오조건(吳兆騫)의 영고탑기략에 따르면, 만주어로 닝구타란 '여섯 명'이라는 뜻으로 옛적에 형제 여섯 명이 각기 한 지방을 점유한 데에서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인 기오창가(覺昌安)와 그 형제들 더사쿠(德世庫), 러오단(劉闡), 소오창가(索長阿), 보오룽가(包朗阿), 도르지(寶實)의 여섯 명을 가리켜 여섯 버일러(六貝勒)라 일컬은 것과 연결짓기도 하지만, 이들 일족은 이미 고조부 대에 남만주로 이주해 왔던 이들이므로 직접적으로 영고탑의 유래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 이곳이 영고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실제로 발해 시기에는 이곳에 경 용천부가 있었음에도 홀한성(忽汗城)이라고만 일컬어졌지 영고탑이라고 불리지는 않았고, 원나라 때에는 고주(古州)가 있었지만 역시 영고탑이라고 불리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궁지에 몰린 환빠들은 이곳에 과거 실제로 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뿐이라고 강변하거나 이건 뭐 화살 쏘고 과녁 그리기도 아니고 증산도 역주본에서는 영고탑이 '영고터'라는 우리말이 와전된 것이라고도 하지만, 신당서에도 잘 나오듯 이곳은 본래 영고를 치르던 부여가 아니라 숙신의 땅이었다.

이밖에도 환단고기에는 영고탑과 같은 시대착오적 지명들이 수두룩하다.

  • 송화강(松花江) - 1462년부터 사용[75]
  • 시베리아(斯白力/斯庀廲阿) - 16세기부터 사용[76]
  • 해성(海城) - 1653년부터 사용[77]
  • 혼춘(琿春) - 1714년부터 사용[78]
  • 세토내해(瀨戶內海) - 1872년부터 사용[79]
  • 하얼빈(哈爾濱) - 1898년부터 부각[80]

비단 지명만이 아니라 수메르(須密爾)[81]라는 말은 본래 북쪽의 아카드 인들이 부르던 타칭이고 수메르에서는 자신들을 키엔기(ki-en-gi)라고 일컬었는데도 환단고기에는 마치 수메르가 자칭인 것처럼 버젓이 써있으며, 수메르는 이미 기원전 1700년 경에 함무라비의 바빌로니아에 의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700년이 지난 기원전 996년에 여전히 고조선으로 사신을 보내오고 있다. 예토전생 또한 선비(鮮卑)라는 이름도 동호가 기원전 206년에 흉노묵돌 선우에게 대파당한 뒤 일파가 선비산으로 달아난 데서 유래한 말이었고, 몽골(蒙古里)도 1206년에 칭기즈 칸이 초원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만주에서 밀려난 실위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적절하지 못한 시점에 분별없이 자꾸만 튀어나와서 문제가 된다.

3.2.4. 자기모순에 빠진 내용

환단고기가 크게 네 개의 문헌을 취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특히 가장 분량이 많은 태백일사는 오만 잡다한 기록들을 조금씩 가져다 묶어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그 내용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피기 십상이다. 예컨대 단군조선에 대한 내용은 단군세기만이 아니라 삼성기 전 상편,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도 흩어져 있고 특히 단군왕검에 대한 내용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도 한 마디 거들고 있다. 이렇다 보니 환단고기라는 하나의 책 안에서도 서로 하는 말이 엇갈리는 모순이 발생한다.

환국의 위치와 같은 경우 삼성기 상편에서는 환국이 만주에 있었다고 하면서 환웅은 그 땅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삼성기 하편과 태백일사에서는 바이칼호(天海)의 동쪽으로 시베리아 중앙 고원이나 천산산맥(天山) 혹은 파미르고원(波奈留山) 부근[82]을 환국이 있던 자리라 가리키고 있다. 또 환웅은 여기에서 별도의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즉 지금의 백두산 아래 만주 땅으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부싯돌의 최초 발명에 대해서도 삼성기 상편에서는 환인이 돌을 부딪쳐 불을 일으키고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는데, 태백일사에는 규원사화를 따라 환웅 초기 고시례가 부싯돌을 발명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띄워주는 게 환인인지 환웅인지 둘 중 하나만 확실히 해라잉?

거기다가 흠좀무하게도 그토록 중요한 치우의 행적에 대해서도 환단고기 안에서 서로 말이 다르다! 삼성기 하편에서는 치우가 탁록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하지만, 태백일사에서는 이와 더불어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시무시한 인해전술에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고 중원으로 나오지 못하게 길목을 틀어막는 선에서 그쳤다는 기록이 함께 나온다. 여기에 이미 전에 함락시켰던 탁록을 함락시키고, 또 함락시키고, 다시 함락시키는 것을 반복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건 마한세가의 기록으로, 치우가 전군을 탁록에 집결시킨 상황에서 헌원에게 경고서한을 보내자 헌원이 알아서 숙이고 끝난다. 한마디로 전쟁은 없고 그저 해피엔딩 해피엔딩.

삼성기 전 하편 태백일사 신시본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① 염농(炎農)의 힘이 쇠퇴하자 치우가 중원으로 진군하여 회(淮)·대(岱) 지방을 점거. 이후 헌후(軒侯)가 등장하자 탁록에서 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고,(결과A) 나중에 오(吳)장군을 보내서 더 서쪽의 고신씨도 마저 정벌함.
② 이때 탁(涿)을 중심으로 천하가 삼분되어 북쪽에는 대요(大撓), 동쪽에는 창힐(倉頡), 서로는 헌원(軒轅)이 있었는데, 헌원이 치우에게 밀려 대요와 창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미 두 나라는 모두 치우를 섬기고 있었음.
③ 유망(楡罔)의 정치가 쇠퇴하자 치우가 중원으로 진군하여 탁록을 함락하고 연전연승.(탁록전 1) 유망이 소호(少昊)을 보내서 치우를 막아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대패하고 달아남. 치우는 유망의 수도 공상(空桑)을 접수하고 다시 탁록을 포위해서 이들을 멸망시킴.(탁록전 2)
이 소식을 들은 공손헌원이 군사를 일으켜 치우에게 도전하자, 치우는 자신에게 항복한 소호를 보내서 탁록을 포위하고 헌원군을 멸망시킴.(탁록전 3) 그럼에도 근성가이 헌원이 굴하지 않고 계속 치우에게 도전하자, 치우가 직접 탁록의 유웅(有熊)벌에서 헌원군을 몰살시킴.(탁록전 4) 기(冀)·연(兗)·회(淮)·대(岱)의 땅을 모두 점거하여, 헌원의 무리가 모두 신하를 칭하며 조공을 바침.
④ 치우가 더욱 군대를 정비한 뒤 진군하여 10년 동안 헌원과 73회를 싸웠지만, 근성가이 헌원은 오히려 각종 무기와 갑옷을 만들어 계속 치우에게 도전. 이에 열받은 치우가 다시는 대들지 못하게 밟아버리겠다면서 헌원과 결전을 치루는데, 여기서 그만 치우비(蚩尤飛)가 죽었슴다.(...) 환단고기 세계관에서 헌원이 죽였다는 치우는 사실 이 치우비라 카더라.(탁록전 5)
이에 치우는 부들부들 떨면서 최첨단 무기인 투석기를 가져다가 헌원에게 진짜 싸움 맛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었고,(탁록전 6) 이에 군대를 보내서 서쪽으로 예(芮)·탁(涿)의 땅을 지키고 동쪽으로 회(淮)·대(岱)에 성을 쌓아 헌원의 침공를 봉쇄함.(결과B)
① 신농(神農)의 힘이 쇠퇴하자 치우가 중원으로 진군하여 회(淮)·대(岱) 지방을 점거. 이후 헌원(軒轅)이 등장하자 탁록에서 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고,(결과A) 나중에 오(吳)장군을 보내서 더 서쪽의 고신씨도 마저 정벌함.
⑤ 헌구(軒丘)가 복종하지 않자 치우가 정벌하여 탁록(涿鹿)에서 대결. 싸우기 전 치우의 형상을 드러내보이고 격문을 지어 헌원을 꾸짖으니, 이에 헌구가 곧 평정되어 복종함.(...)(결과 C)

그리고 태백일사에서는 22대 단군인 색불루가 힘으로 꼬장을 부린 끝에 단군 자리를 선위받으면서 종래 고조선 내의 삼한을 삼조선으로 개편했다고 나오는데, 단군세기에서는 그보다 한참이 지난 44대 단군 구물이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한 뒤 진한을 대부여로 고치고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왜 삼조선이야? 이조선과 대부여지(...) 일단 소도경전본훈에 따르면 색불루의 삼조선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구물에 이르러서야 삼조선이 완성되었다고는 하나 도대체가 아무리 불완전하기로서니 공식 이름이 이렇게 되는지는 영문을 모르겠다.[83]

이 가운데 백미는 단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번한세가 상편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도산회의의 결과로 낭야성에 감우소(監虞所)를 두고 뒤에 번한을 세워서 감우소의 정무를 맡겼다고 하는데, 그런데 정작 도산회의는 단군조선의 2대 번한인 낭야 시절에 있던 일이다. 도산회의로 말미암아 번한이 세워졌는데, 번한이 세워진 뒤에 도산회의가 열렸다니 이건 또 무슨 순환논증의 오류인지.(...) 모순도 아니고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치우 관련 기록들처럼 여러 부분에 흩어진 게 아니라 한 기록 안에서 이런다는 것이다!

단군세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A B
단군왕검 67년에 태자 부루를 보내서 도산회의를 소집하여 치수법을 전수. 우순(虞舜)과 국경을 정해 유주와 영주가 조선에 귀속되고, 회(淮)·대(岱)에는 우순에게 통치가 위임된 분조(分朝)를 둠.9년 간 홍수가 일어나자 단군왕검이 태자 부루를 보내 도산회의를 소집하여 치수법을 전수. 이에 낭야성(琅耶城)에 감우소(監虞所)를 두어 구려(九黎)를 분정(分政)하고, 치우의 후손 치두남을 초대 번한으로 삼음.2대 번한 낭야가 낭야성(琅邪城)을 쌓음. 태자 부루가 도산회의를 주관하기 위해 가다가 이 낭야성에 머물러 민생을 살핌. 이후 태자 부루가 도산회의에서 치수법을 전수.
도산회의 개최 → 구려분정 → 초대 번한 책봉 → 2대 번한 세습 → 낭야성 축성 → 도산회의 개최(이하 무한반복)

이밖에도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를 자세히 대조해보면 몇 가지 연대상의 문제가 있다. 단군세기에는 고등을 우현왕으로 삼은 게 임진년(BC 1289)이라 되어 있는데, 마한세가에서는 무오년(BC 1323)이라 되어 있다거나, 번한 계전이 경신년에 삼신단을 탕지산에 쌓았다는데 정작 계전의 재위기간 안에는 경신년이 없다거나.(...) 망한 지 200년이 넘은 수메르가 고조선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역시 북부여기에 보면 경진년(BC 221)에 연나라가 진개를 보내 고조선을 침공하는데 연나라는 이미 작년(BC 222)에 망한 나라다.(...) 진무양은 졸지에 할아버지보다 일찍 태어난 후레자식이 되어버렸다. 거봐, 타임머신은 존재한다니까?

3.3. 위식(僞飾):사상적 비판

끔찍하고_무시무시한_생각_환빠판.jpg
[JPG 그림 (Unknown)]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이라는 자가 저런 소리를 하고 다녔다! 아! 이 얼마나 무서운가

추종자들 일각에서는 결국 환단고기가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적극적 민족주의 운동의 산물이므로, 그 진위여부가 어찌되었든 간에 일정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환단고기에는 한민족이 지향하고 되찾아야 할 진취적 기상, 애국정신을 심어주는 한민족 고유의 우수성, 한민족이 단순한 약소민족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민족정신을 내재화시킴으로써 종래까지의 축소지향적이고 자기비하적인 소한사관(小韓史觀)을 타파하고 희망적이고 자존적이고 주체적인 대한사관(大韓史觀)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하나된 온 인류를 꿈꾼다.(...) 역사왜곡이면 어떠냐 애국심만 기르면 그만이지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공정이나 일본 우익사관을 상대로 벌어지는 동북아 역사전쟁에서 환단고기로 상징되는 자주적 역사관을 내세워 승리를 쟁취하자고, 아니 환단고기를 통해서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외친다. 다만 고구려사, 독도, 위안부 문제는 그렇다 쳐도 한민족의 조상인 치우를 중국에 빼앗긴다던지, 일본은 한민족이 건너가서 개척한 땅이라던지, 심지어는 잃어버린 만주 고토를 되찾아야 한다던지(!) 하면서 길길이 날뛴다.(...) 어따 대고 신성한 우리 역사에 왜곡질이야? 어디 맞설 테면 맞서 보자. 아예 뼈도 추리지 못하게 진짜 역사왜곡이 어떤 것인가 똑똑히 보여 주겠다. 하지 마라.

다음은 증산도 역주본 해제에 실린 '환단고기를 읽어야 하는 11가지 이유.'

  1. 환단고기는 인류 창세문명과 한민족 시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주는 유일한 사서이다.
  2. 환단고기는 단절된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맥을 가장 명확하고 바르게 잡아 준다.
  3. 환단고기는 환(桓)·단(檀)·한(韓)의 광명 사상이 실현된 상고시대 인류와 동북아 역사의 전체 과정을 전하고 있다.
  4. 환단고기에는 한민족의 고유 신앙이자 인류의 시원 종교이며 원형문화인 '신교'의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5. 환단고기는 천지인을 삼신의 현현(顯現)으로 인식한 한민족의 우주사상을 체계적으로 전한다.
  6.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역사 개척 정신인 낭가(郎家)사상의 원형과 계승 맥을 전하고 있다.
  7. 환단고기는 한민족이 '천자(天子) 문화의 주인공'이요 수(數)를 발명한 민족임을 밝히고 있다.
  8. 환단고기는 한민족이 천문학의 종주임을 밝히고 있다.
  9. 환단고기는 삼성조 시대의 국가 경영 제도를 전하여 만고불변의 '나라 다스림의 지침'을 담고 있다.
  10. 환단고기는 배달과 고조선이 창제한 문자를 기록하여 고대 한국이 문자 문명의 발원처임을 밝혀 준다.
  11. 환단고기는 중국, 일본, 몽골, 흉노의 시원과 고대 수메르 문명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담고 있다.
    요약: 환단고기는 한·중·일의 시원 역사에서부터 북방민족의 역사, 서양 문명의 근원 역사까지 총체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이다. 고로 대한의 아들딸은 물론 70억 전 인류가 반드시 읽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인류 모체 문화의 역사 교과서인 것이다. 니들이 만든 거 다 우리가 원조니까 니들은 우리한테 감사하며 꿇어야 하는 거 알쥐?

3.3.1.1.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가?
김교헌사학은 1930년대 이후 최남선 등의 대동아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대동아공영권론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민족의 외연을 자의적으로 확대하는 태도는 김교헌 당대의 강렬한 민족주의적 의지와는 달리 후일 단군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이 일제의 황국사관(皇國史觀)과 결합하면서, 대동아공영권 이론체계에에 흡수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였다. 1930~40년대에 출간된 것으로 판단되는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 등은 모두 김교한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단군족 범위를 한층 확대하여 일본민족까지를 단군족의 일부로 설정하고 있다. 특히 1930년대에 유포된 『규원사화』는 동이의 여러 종족이 연합하여 중국을 정벌할 것을 제창하고 있어 일제의 중국침략을 방조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김교헌사학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우리나라 사상계를 지배했던 사회진화론적 민족팽창주의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던 점과 관련이 있다. 결국 대종교 민족주의는 서구 부르조아 의식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를 한국사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강렬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제국주의의 식민지 이론에 흡수될 소지를 스스로 만들어낸 약점도 안고 있었던 것이다.
- 전우용 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제4장 「김교헌·이상룡」, 115~116쪽.

사실 환단고기는 그 발간 시점(1911)이 이제 막 국권이 피탈당한 일제강점기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당시 막 첫걸음을 내딛은 한국 민족주의의 화두는 '한민족은 왜 독립해야만 하는가'였고, 이는 곧 다른 민족들(특히 일본)과 대별되는 한민족의 배타적인 민족 구성을 발견하는 작업이 민족주의적 역사 연구의 목적이었음을 뜻한다. 실제로 신채호는 아직 민족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구한 말부터 한국(한민족)에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고유하고도 우수한 정신인 '국수(國粹)'의 보전을 통해 국가정신(민족정신)을 고취할 것을 역설하였고, 대종교는 바로 이러한 '국수'의 상징으로 단군을 내세운 종교집단으로 창시된 것이었다.

하지만 환단고기의 내용은 동시기 신채호의 '국수보전론'보다 정신줄 놓은 독일 제3라이히일본 제국이 자신들의 고대사를 위대하게 보이도록 왜곡하던 확장적 민족주의에 더욱 가깝다. 무엇보다 나라가 망하던 말던 세계 인류의 대합공존을 운운하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 계연수가 대표적인 예. 환단고기는 한민족으로부터 일본·중국·몽골·흉노가 나왔다고 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적 독창성을 흐려 놓고 있으며, 특히 일본을 한민족의 갈래라고 서술한 것은 여기에서 양자간의 관계만 역전시키면 곧장 일본 식민사관의 일선동조론, 나아가 대동아공영권론과 부합된다. 이걸 단적으로 보여준 게 바로 그 가지마 노보루.(...)

실제 동아시아의 밝음산(불함산) 숭배 사상이 존재하는 지역을 불함문화권으로 묶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이 환단고기의 주장과 흡사한 전철을 밟았다. 당초 최남선은 한국인에게 문화적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식민사관의 주장을 타파하기 위한 의도로 불함문화권을 주장했지만, 불함문화권은 한반도와 만주만이 아니라 중국 대륙,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와 일본까지 지나치게 넓은 범위를 포괄하여 결국 일본의 일선동조론과 대동아공영권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결국 광적인 친일로 변절한 것은 이렇듯 확장적 민족주의 경향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확장적 민족주의 역사관은 언제나 주종관계가 사람 입맛에 따라 뒤바뀔 위험을 안고 있으며, 그것을 가장 쌈박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이 불함문화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
- 김창숙, 최남선의 글 「일선융화론」을 집어던지며

때문에 환빠들은 환단고기 등 자기들이 신봉하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친일파라는 식으로 매도하지만, 실상 환단고기를 쓴 이유립부터가 친일 행적을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 유림에서는 황도유교(皇道儒敎)라고 해서 충(忠)의 대상을 일본 제국의 덴노로 왜곡한 적이 있었는데, 이유립은 바로 이러한 친일유림단체 조선유교회[84]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월간지 <조선>에 시를 투고하며 20대를 보낸 이유립은 1933년 조선유교회의 1기 강습생이 되었고, 졸업한 뒤에는 조선유교회 기관지 <일월시보>의 주필로 활동하다 또 고향인 삭주에서 유교청년회 지교부장을 지냈다. 아래 그의 글에서는 적어도 몇 가지 정보가 도출된다.

오직 자반이축(自反而縮) 심광체반(心廣體胖)의 의리적 진용을 가지고 43세기[85]의 문화전선의 선봉대장이 되라.
그것은 조선문명의 원천이 유교에 있고 민족의 생명도 유교에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 적어도 성교화육(聖敎化育) 중에 자라난 청년 용사, 더욱이 의의(意義)를 가진 우리는 조선유교의 동지가 아니냐.
신유교의 건설!
각 종교의 통일계획!
대동주의 하에서 신경제축성!
아! 조선유교회! 만세!
- 이유립, 「청년제현에 檄함」, 1927

우선 위의 발췌된 글 가운데 1행과 2행에서는 당시의 이유립이 민족주의적 단군신앙에 일정하게 경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3행의 성교화육(聖敎化育)이라고 말한 데에서 그가 당시 일본 제국의 통치를 성교(聖敎)라 긍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유립이 적극적 친일 찬양은 하지 않았더라도 당시 일본 제국이 설정하고 조선유교회가 구상하던 '신유교(아시아주의적 황도유교)' 질서를 내재화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즉 그는 민족주의에 기반하되 그 주적을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 설정함으로써 현실에 순응한 유교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단군신앙의 친일화 경향대종교로부터 국내교단을 이끌고 갈라져 나온 정훈모(鄭薰模)가 친일파와 결탁하고 친일유림단체인 조선유교회가 세워준 건물에 얹혀 살았던 점에서 잘 드러나는데, 심지어 단군이 일본 신화의 스사노오와 동일인물이거나 그 후손이라 주장하는 경향도 있어서 남산 조선신궁메이지 덴노, 아마테라스와 함께 스사노오=단군을 모시려는 움직임도 존재하였고[86] 중간의 불안정한 국혼신(國魂神) 개념을 거쳐 마침내 1930년대에는 최남선에 의해 단군신앙(불함신앙)이 일본 신도의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접목되기도 했다. 물론 조선총독부에서는 단군신앙을 가차없이 잘라냈지만, 대신 국혼대신을 조선신궁에 합사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짝사랑일 뿐...

결론적으로 환단고기의 내용은 본래 친일화된 황도유교(안순환의 조선유교회) 출신 인사가 친일화된 단군신앙(정훈모의 단군교)을 받아들인 것을 기반으로, 그 위에 다시 일본 제국의 확장적 민족주의(최남선의 불함문화론)와 대종교의 신앙적 특수사관(김교헌의 신단민사)을 결합시킨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비록 세부적인 것은 신채호와 정인보의 것을 받아들여 손보았다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경향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민족정신 비스무리한 게 고취되기는 하는데, 실상은 일본 제국에 기원을 둔 전혀 불건전한 선민사상이라고 정리되겠다.

3.3.1.2. 반민족적 탄압을 받았는가?
당신이 왕 같으면 이런 황당무계한 책을 당연히 탄압하지 않겠는가? 나라도 탄압한다.

일각에서는 환단고기를 반민족적 사대주의, 식민주의, 공산주의, 독재정권 세력에 탄압을 받으면서도 근근이 그 맥을 이어온 민족사서로 호도한다. 근데 사실 여기에다가 독재정권을 끼워넣기에는 어폐가 있는 게, 안호상이니 임승국이니 하는 원조 환빠들은 공산주의와 대결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천적인 울트라-민족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주의주장이 독재정권에 채납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안호상은 이승만 정권에서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며 전국민이 이승만 밑에서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는 나치즘적 일민주의를 강변한 인물이고, 임승국은 박정희의 유신체제제5공화국을 적극 찬양하였던 바 있다.

일민주의는 우리 3천만의 최고영도자이신 이승만 박사의 밝은 이성의 판단과 맑은 양심의 반성과, 그리고 또 굳센 의지의 결정으로서 단군 한배검의 홍익인간의 정신과 신라의 화랑도의 사상을 이어받아, 현대의 모든 이론체계를 없애 가진 가장 깊고 큰 주의다. …… 3천만 겨레는 재래의 모든 주의들과 주장들을 모조리 다 버리고, 오직 이 일민주의의 깃발 밑으로 모여야 된다. 우리는 일민주의를 위하여 일하며 싸우며 또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한겨레인 일민은 반드시 한 핏줄이다. 이 한 핏줄이라는 것이 일민에는 절대적 요소다. …… 핏줄이 같고 운명도 같은 이 일민은 생각도 같고 행동도 같아야만 한다. …… 일민에는 동일성과 통일성이 생명인 까닭에 동일성과 통일성은 일민주의의 주장이며 목적이다.
- 안호상, 『一民主義의 본바탕』, 1950.

근세 이후 국수주의다운 국수주의 한번도 못해본 한국사의 치욕은 차라리 국수주의가 숙원 섭리일지도 모른다. 항차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서 국가안보를 추구하려면 공산주의의 사상적 철학적 천적인 강력한 민족주의(그것을 국수주의라 혹평해도 좋다)와 그 토대 위에 뿌리박은 강력한 체제철학의 필요성은 차라리 숙명적이오, 필수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철학 있는 독재는 설득력을 갖는다'는 정치철학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오늘날 한국정치엔 철학을 필요로 한다. 국수주의 독재면 어떠냐 반공만 하면 그만이지
- 임승국, <자유> 1980년 11월호, 1980.

시간을 거슬러 일제강점기로 올라가 보자. 문정창[87]을 비롯한 환빠들은 이 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이름도 알 수 없는 한국의 재야사서 20만 권을 몰수해 불태웠다면서 이것들이 단군 관련 기록으로 환단고기와 비슷한 내용을 담은 민족사서들이었다[88]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그 실상이 어떤지 살펴보게 되면 무척이나 안습해지는데, 일제가 1910년에 금서로 지정하고 20여만 권을 불태운 서적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이름을 알 수 없긴 뭐가 알 수 없어?

분류 서명 서지 특기사항
역사 초등대한역사정인호 편, 1908단군부터 조선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술한 개설서. 배일, 애국사상 고취.
보통교과 동국역사현채, 1899대한제국 학부에서 편찬한 중학교 교과서. 전 8권 3책. 단군조선 기술.
신정동국역사유근·원영의, 1906
대동역사략국민교육회, 1906대한제국의 교과서. 단군조선, 기자조선, 마한, 신라 등의 역사를 소략하게 기술.
을지문덕(한문)신채호, 1908을지문덕 위인전기. 민족자주성 고취.
을지문덕(국문)신채호, 1908
이태리 건국 삼걸전양계초, 신채호 역, 1902이탈리아 건국의 세 주역인 가리발디, 마치니, 카보우르의 전기.
헤수스 전양계초, 이보상 역헝가리 애국자의 전기.
워싱턴 전이해조 역, 1908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전기.
폴란드 말년 전쟁사1905폴란드 왕국 말년의 독립전쟁을 기술.
미국독립사현은, 1899
이집트 근세사장지연 역, 1905서문을 박은식이 썼다.
지리 대한신지지장지연, 1906한국의 자연지리와 풍속, 물산 등 인문지리를 다룸.
대한지지현채, 1899총론과 13도편으로 구성되어 대한전도와 각 도의 지도를 붙이고 각 지역을 설명.
최신 고등대한지지정인호, 1909동해를 조선해로 표기.
문답 대한신지지노익형
최신 대한초등지지정인호
사상 음빙실문집양계초
음빙실자유서양계초
민족경쟁론양계초
국가사상학정인호
국가학강령요하네스 블룬츨리, 안종화 역, 1907
국민자유진보론유호식 역
국민수지김우식, 1906국민계몽서.
세계 3괴물스미스 골드, 변영만 역, 1908금권정치, 군국주의, 제국주의 비판 서적. 서문을 신채호가 썼다.
20세기 대참극 제국주의변영만, 1908제국주의 비판 서적.
강자의 권리경쟁가토 히로유키, 유문상 역진화론을 통해 천부인권설, 이상주의 관념적 종교적 세계관 등을 소개.
대가론집유문상 역
청년입지편새뮤얼 스마일즈, 유문상 역
남녀평권론최학조, 1908남녀평등 사상을 다룬 책.
애국정신이채병, 1908서우학회(西友學會) 기관지에 연재되었던 글
애국정신담이채병, 1908
몽현제갈량유원표, 1908사회비판과 계몽주의 논의.
종교 준비시대천도교 중앙총부, 1905천도교 해설서.
교재 최신 초등소학정인호
고등 소학독본장지연
국문과본원영의
초등소학국민교육회, 1906
국민 소학독본대한제국 학부, 1895자연현상과 이치, 세계 주요 도시 문명화 파악, 중상주의 등 기술.
소학 한문독본원영의
여자독본장지연, 1908여성용 교과서.
부녀독습강화석, 1908
고등 소학수신서휘문의숙 편집부, 1907
초등 윤리학교과서안종화, 1907
중등 수신교과서휘문의숙 편집부, 1908
초등 소학수신서유근
독습 일어정칙정운하, 1907
정선 일어대해박중화, 1909
실지 응용작문법최재학, 1909
소아교육임경재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제가 단군을 인정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조선총독부는 단군이라면 발작을 해대었으니, 단군을 조선신궁에 모시려다 끝끝내 무산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조선사는 연월일 순서로 중요 사건에 관련된 사료를 정리해서 편찬한 편년체 사서로, 사실 어떠한 결론으로 유도하는 개설서라기보다도 차라리 '조선사료집성'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일종의 사료집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학계의 연구 수준으로는 광범위한 한국사 사료를 섭렵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원사료의 제시에만 충실함으로써 식민사관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89]

보다 더 올라가서 이제는 조선이 교조적인 사대주의로 말미암아 자주성을 표현하는 사서들은 눈에 불을 키고 말살해버렸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는 극단적인 안티 유교, 안티 사대주의 정서를 가지고 있던 신채호가 '이조 태종의 분서(조선상고사)'를 운운한 데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실체는 '태종이 유교로써 건국의 정신을 삼고자 해동비록을 태워버렸다(조선상고문화사)'는 것이다. 이게 뭐가 문제냐면 해동비록은 1106년에 왕명으로 엮인 음양도참과 풍수지리를 집대성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군시대의 기록을 담았다거나 한 역사서가 절대 아니라는 것.[90]

그러다가 1936년에 정인보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오천년간 조선의 얼'로 말미암아 이 루머의 주체는 태종에서 세조로 교묘하게 바뀌었는데, 곧 세조가 상고시대의 일을 기록한 사서들을 모아다가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表訓), 삼성밀기(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 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삼인기록(文泰山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의 수찬기소(修撰企所) 1백여 권,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蝨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수장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권하고 원한다면 서책을 회사받을 것이다. 이를 공사(公私)와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고 하였다.
세조 3년(1457) 5월 26일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志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옥거인·설업 삼인기(文泰玉居仁薛業三人記) 1백여 권,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지리·음양의 뭇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서울 안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승정원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읍에 바치도록 하라. 바친 자는 두 품계를 높여주고, 상을 받고자 원하는 자 및 공사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 50필을 상으로 주라.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를 다른 사람이 고발하면 고발한 자는 위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이를 중외에 속히 유시하라."고 하였다.
예종 1년(1469) 9월 18일

뭇 도의 관찰사에게 하서하기를 "전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志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하소량훈(智異聖母河少良訓), 문태·왕거인·설업 삼인기(文泰王居仁薛業三人記) 1백여 권,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지리·음양의 뭇 서적들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올려보내는 일을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위에서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 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의 하유에 의거하여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하지 말도록 하며, 그 이미 수납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성종 즉위(1469) 12월 9일

하지만 이 기록을 자세히 보면 초장에 '원한다면 서책을 회사받을 것'이라던가, 마지막에 '그 이미 수납한 것은 돌려주라'고 한 데에서 도저히 이것이 분서와 같은 극단적인 기록 말살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정작 환단고기에 실린 삼성기라든가 상고사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되는 문헌(밑줄)들은 성종 대에 올려보내도록 한 12책에서 제외되어 있어서 성종 대에는 대부분 돌려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애당초 실록에서 분서라는 말도 거의 안 나오는데, 나오는 것도 족족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다. 즉 왕이 분서를 했다는 건 자신이 진시황과 동급이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또한 여기에 나열된 서적들의 면모를 보면 실상 '명경수'나 '태일금경식'과 같은 천문서, '지화록'과 같은 지리서, '표훈천사'나 '도선참기'와 같은 도참서이고 국왕 자신도 이것들을 천문·지리·음양의 뭇 서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즉 여기에 나열된 서적들은 원래부터 그 내용이 역사를 전달하려는 것과는 무관한 이적(異跡)이나 비결(祕決)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은 혹세무민을 배격하였고 이런 비결이나 술서들은 정감록처럼 현 조선의 체제 붕괴를 바라는 의도가 담긴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이런 비결류 서적들은 단순한 미신 타파 이전에 체제 유지를 위해 반드시 타도해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책 갖고있다 걸리면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조치에도 충분히 이유가 있다. 예컨대 해리와 몬스터아마존에게 바치는 노자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같은 게 조선시대에 모조리 금서 처분되었을 뿐이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환단고기

우엇보다고 세조가 어떤인물인가? 진양대군이던 시절부터 아버지(세종)를 도와 각종 연구와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으며 집현전 학사들과의 교류도 잦았으며 그자신이 월인 천강지곡,석보상절을 짓기도한 유학자 치고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91] 그가 단지 성리학에 어긋난다고 책을 불지를만한 위인이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그자신이 쿠데타로 집권한 만큼 복술서,각종비기류는 바로 자신의 집권을 위협하는 직접적 위험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조선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설공찬전"의 저자인 이수도 그 내용의 반 정권적 요소때문에 그 자신은 탄핵,파면되어 죽을뻔하였고 책은 금서로서 수차례 조선왕조실록에 그제목을 올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3.3.2. 만들어진 전통

3.3.2.1. 삼일신고를 대종교로부터 베꼈다
대종교의 삼일신고 봉장기에 의하면, 단군이 백두산에 내려와서 교화한 가르침을 석판에 새겼는데 부여가 보관하다 전란으로 잃었고, 이를 고구려에서 번역한 판본이 발해 태조를 거쳐 문왕에게로 전해졌다고 한다. 이에 문왕은 삼일신고 진본을 백두산 석실에 봉장하였고, 이를 19세기 말 백봉(白峯)이 10여 년의 기도 끝에 얻어서는 제자 백전(伯佺)을 시켜 1906년 나철에게 전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삼일신고가 어떻게 조선 중기에 편찬되었다는 태백일사에 실려 있나?[92] 이는 명백히 한 쪽이 다른 쪽을 베낀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대종교와 태백일사의 삼일신고를 서로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대종교의 삼일신고는 1918년부터 敕을 勅으로, 1949년부터 著를 着으로 한자를 바꾸어 쓰고 있는데 태백일사에는 1949년 이후의 대종교 판본처럼 勅과 着이 쓰이고 있다. 이는 태백일사가 적어도 1949년 6월 이후[93] 시점에 대종교의 삼일신고를 보고 베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양자가 장의 구분에 차이가 있는데, 내용상 천(天)을 논의하고 있음에도 천훈(天訓)이 아닌 허공장(虛空章)으로 이름한 것이나, 삼일신고 본문에서 시종 신(神)을 (⿰示⿱旬且)[94]로 쓰고 있음에도 일신장(一神章)이란 이름에서는 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이유립이 작위적으로 개작한 것을 시사한다.

또한 대종교의 삼일신고에서는 '有善惡(心)', '有淸濁(氣)', '有厚薄(身)'인 삼망의 단계를 거쳐서 '無善惡(性)', '無淸濁(命)', '無厚薄(精)'인 삼진의 단계로 나아간다고 하였는데, 이와 달리 태백일사의 삼일신고에서는 삼진을 '善無惡(性)', '淸無濁(命)', '厚無薄(精)'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유무를 대비하는 대구법으로 보면 전자가 더욱 원본에 가깝고, 삼일신고의 삼진은 性·命·精보다는 善·淸·厚라고 지칭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내용상으로도 전자가 더욱 자연스럽다.[95] 더불어 대종교의 삼일신고가 태백일사의 삼일신고보다 그 서술 구성에 있어서 훨씬 간명하고 원시적이기에 대종교의 삼일신고가 더욱 이른 시기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종교 삼일신고만물에 본디 삼진(三眞)이 있으니 성(性)·명(命)·정(精)이고,
사람이 미혹되어 삼망(三妄)이 뿌리내리니 심(心)·기(氣)·신(身)이고,
삼망으로부터 삼도(三途)가 만들어지니 감(感)·식(息)·촉(觸)이다.
태백일사 삼일신고삼진(三眞)이 미혹되어 삼망(三妄)이 뿌리내리고 삼망으로부터 삼도(三途)가 만들어지니
성(性)·명(命)·정(精), 심(心)·기(氣)·신(身), 감(感)·식(息)·촉(觸)이다.

3.3.2.2. 천부경을 단군교로부터 베꼈다
위에서 말한 바 있듯이, 한일합방 직후 대종교로부터 갈라져 나온 단군교에서는 1917년에 계연수로부터 천부경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단군교는 1921년에 잡지 <단탁(檀鐸)>을 발행하면서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단군교당에 보낸 편지와 천부경의 전문 81자를 소개했는데, 이는 1916년에 계연수가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탁본하고 1917년에 단군교단으로 천부경을 우송한 지 4년 뒤의 일이다.[96] 이 <단탁>에는 계연수의 편지를 빌어 그가 천부경을 얻게 된 정황과 시일이 꽤나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단군신인께서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쥐고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덕화를 크게 행하시니 지금까지 4천여 년, 태곳적의 일이라 삼인(三印)이 도대체 무슨 물건이며 어떠한 보물인지 알지 못하였나니 …… 제가 이를 마음속에 새겨두고 이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 지난 가을에 태백산에 들어가 외진 골짜기를 한가로이 거닐다가 인적이 닿지 않은 곳에 걸음이 미치니, 시내 위 돌벽에 고각(古刻) 같은 게 있는지라 손으로 이끼를 쓸고 보니 자획이 분명하여 과연 천부신경(天符神境)이었습니다. ……
고운선생(孤雲先生)의 기이한 족적에 기뻐하여 …… 돌아와 종이와 먹을 가지고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니, 전날에 지났던 곳이 아닌지라 동으로 찾고 서로 뒤지다가 마침내 가만히 산령(山靈)에게 빌며 사흘 밤을 지내고 비로소 얻었으니, 이때가 9월 9일이었습니다. …… 스스로 돌아보건대 학식이 짧고 총명이 노멸(老滅)하여 거듭 연구할 도리가 없이 단지 입으로 외울 뿐이었는데, 마침 경성에서 온 사람이 있어 말하길 경성에 단군교가 있다 하는지라 …… 길에서 경성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 이 탁본을 헌상합니다. ……
성심으로 수도하시길 빌면서 정사년(1917) 정월 초10일
묘향산 유객(香山遊客) 계연수(桂延壽) 재배.

그런데 이런 천부경이 어떻게 조선 중기에 편찬되었다는 태백일사에 실려 있나? 게다가 이에 따르면 계연수는 스스로를 학식이 짧고 총명이 쇠퇴한 촌로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해학 이기의 뒤를 이어서 단학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1911년에는 환단고기를 엮어냈다는 태백교 측의 계연수 묘사와 완전히 배치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던 인간이 국내 묘향산에서 한가롭게 산이나 오르고 있지를 않나, 대종교로부터 떨어져나온 것으로 사촌격(?)에 해당하는 단군교[97]가 존재하는지 어떤지도 몰라서 서울에서 온 사람에게 그런 게 있다고 전해 듣고 비로소 '아 그런 게 있구나'라면서 탁본을 보내 주는 등 엄연한 이론적 체계를 지닌 단학회의 우두머리치고는 실로 무식하기가 짝이 없다.(...)

그런데 정작 단군교의 교주 정훈모는 1913년에 쓴 단군교종령(檀君敎宗令)에서 천부경을 운운하고 있다. 즉 사실 정훈모는 계연수가 천부경을 발견하기도 전부터 이미 천부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역시 최치원이 신지의 전자를 해석한 것이라 하고 있으니 정훈모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계연수에게 천부경을 받고 돌아왔다는 말이 된다. 결론은 둘 다 거짓부렁.(...) 천부경은 1913년 이전에 정훈모가 최치원이 신지전(神志篆)을 풀어쓴 것이라고 가탁하여 지어낸 것이며, 그 전수 과정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들어오자 이후 다시 1921년에 최치원이 신지전을 풀어 묘향산 석벽에 새긴 것을 1917년 계연수라는 사람이 탁본을 떠서 전해주었다고 덧붙였던 것이다. 그게 최치원이 신지전을 풀어쓴 것인 줄은 어찌 알았을꼬?

또한 단군교의 천부경은 <단탁>(1921)만이 아니라 정신철학통편(1920)에도 전하는데, 정신철학통편의 저자 전병훈(全秉薰)은 1918년 11월경에 단군교 간부 윤효정(尹孝定)으로부터 계연수의 천부경을 전해받았다고 한다. 이는 태백일사의 천부경과 몇 글자가 다른데, 즉 이를 종합해보면 단군교의 천부경은 1921년부터 万을 萬으로, 迬을 往으로 한자를 바꾸어 쓰고 있다. 이는 태백일사가 1921년 이후 시점에 단군교의 천부경을 보고 베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3.3.2.3. 낭가사상을 신채호로부터 베꼈다
무력집단으로서의 조의선인이라는 존재는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처음으로 설정하였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는 '선배(先人·仙人)'란 것으로써 이른바 조선 전래의 '수두교(蘇塗敎)'와 표리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수두교'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수두교란 원시 조선족이 우주의 광명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불함산(백두산)을 광명신이 사는 곳으로 이해하였는데, 때문에 사는 곳마다 태백산(백두산)의 숲을 본따 만들고 수두(蘇塗)라 하였다고 한다. 매년 5월과 10월이 되면 정기적으로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주로 뽑힌 사람은 수두의 중앙에 앉아서 하느님 천신이 되어 제사를 받으니 이가 바로 단군(檀君)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신채호의 수두교관은 단순히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를 인류학적 시각으로 읽은 데 지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신채호는 삼국사기에서 단군왕검을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 한 바에 착안하여 선인을 순우리말로 '선배'라 읽고 이것이 수두교 신자의 보통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선배'는 고구려에 들어서 무사단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스승들은 검은 천으로 옷을 지어 입었기에 조의(皂衣)라 불리었고, 다시 신라에서 이것을 본따 만든 것이 화랑이라고 함으로써 이들을 한민족의 고유한 정신사상과 상무정신의 담지자라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신채호는 고구려의 조의·선인이 화랑과 같은 무사단이라고 보았던 근거로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고려도경을 제시한다.

재가화상(在家和尙)이 …… 조백(皂帛)으로 허리를 동이고 …… 전쟁이 있으면 스스로 단결하여 한 단체를 만들어서 전장에 나아갔다.
- 고려도경

따라서 그 요점은 최영전에 나오는 고구려의 승군을 승(僧)을 매개로 고려도경의 재가화상과 연결시키고, 다시 이를 조백(皂帛)을 매개로 고구려의 조의와 연결지은 데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오늘날 신채호의 이러한 논리는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고구려의 사자·조의·선인이 각 대가들마다 거느리는 가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나오고, 실제로 천남산묘지명에서 남산이 영지를 받아 오졸·사자·예속·선인을 다스렸다(理)고 전하고 있어 삼국지의 기록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의·선인이 실제로 고구려의 독립적인 무사단이었고 볼 수 없게 한다. 즉 신채호의 무사단으로서의 조의선인설은 실제와 동떨어져 있으며 오직 신채호라야만 생각해낼 수 있는 독창적인 학설인 셈이다.

하지만 태백일사에는 신채호가 주장한 바와 같은 무사단으로서의 조의가 마치 실제인 것처럼 쓰여 있으며, 그 특성도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가 서술한 바에서 종교성이 강화되었을 뿐 대체로 동일하다. 상징성만 강하고 존재감이 거의 없는 것도 비슷 다만 신채호가 태조왕 80년조에 조의(皂衣) 양신(陽神)이 있으므로 조의는 태조왕 때 설치되었던 듯하다고 보았던 것과 달리, 태백일사에서는 고국천왕 때 을파소가 조의·선인을 설치했다고 해서 조의 양신의 존재가 붕 떠버렸다.(...) 반대로 신채호는 수양제의 4차 침공에서 '어떤 장사'가 수양제의 가슴을 쏘아맞혔다고 서술했는데, 태백일사에서는 그 장사의 이름을 조의 일인(一仁)이라 추가로 전하고 있어서 가필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3.3.2.4. 삼신일체 사상도 베낀 것이다
이렇다 보니 환단고기의 사상적 대종을 이루고 있는 삼신일체 사상도 당연히 환단고기가 원조가 아니다.

단군신앙에 있어서 초기적 삼신일체 사상은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던 신채호의 동국고대선교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98] 그는 여기에서 최초로 한민족 고유의 고대 사상을 선교(仙敎)라 지칭하면서 그러한 선교의 내적 교리가 어떠하였는지를 어림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환웅·단군을 삼신(三神)이라 일컫고, 단군은 실재적인 추장사회의 대지도자이지만 환인과 환웅은 실재하였던 인간이 아니고 추상의 신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이것이 대략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같은 것이라고 부연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신채호의 고대선교관이 작년에 막 창시되었던 초기 대종교의 이론적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대종교에서는 신채호가 동국고대선교고를 발표한 지 6개월 뒤에 초보적인 삼신관을 담은 대종교신리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는 환인⋅환웅⋅환검 삼신(三神)은 각개가 아니라 일체(一體)인 상제에 포함된 삼위(三位)이자 일체의 쓰임으로서 용(用)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듬해 1월의 신리대전에서 환인은 주재주(主宰主), 환웅은 조생주(造生主), 환검은 교화주(敎化主)라는 교리로서 확립되는데, 이것을 더욱 구체화한 것이 바로 대종교에서 삼일신고와 나란히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경전이 1918년에 최초 간행된 신사기(神事記)이다.

신사기를 통해 초기 대종교의 삼신일체관을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신사기의 제1장은 주재기로 우주의 창조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세계를 이루는 각종 속성으로부터 구성요소가 탄생하는 과정, 상제(환인)이 여러 신장과 신관들을 임명하여 세계의 운동을 주관시키는 과정이 서술된다. 제2장은 조생기로 생명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최초의 인간인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으로부터 인간의 오색족(五色族)이 분화되어 나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그 나반과 아만이다.(...) 제3장인 교화기에서는 환검(단군)에 의한 건국과 제도 정비 및 통치를 이야기하는데, 풍백과 우사와 운사와 신지와 고시와 팽오와 숙신과 비서갑신녀가 각기 명령, 치병, 선악, 기록, 곡식, 토지, 형벌, 길쌈을 나누어 관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과 같던 초기 대종교의 교리는 나철의 뒤를 이어 김교헌이 2대 교주가 되고, 1920년대 초에 만주에서 불안정하던 입지가 굳어지면서 일부 변경이 가해졌다. 환인은 조화주(造化主) 천부(天父), 환웅은 교화주(敎化主) 천사(天師), 환검은 치화주(治化主) 천군(天君)으로 그 위격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이에 따라 단군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던 삼일신고가 환웅의 가르침으로 변경되면서 환웅은 단순한 추상신이 아닌 모종의 역사적 실재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대신 환검이 3선관(풍백·우사·운사)와 4신령(신지·고시·팽오·숙신)에게 직분을 나눠주고 인간의 366가지 일을 맡아 다스린다는 내용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한편 김교헌에 의한 대종교의 신비주의화 경향에 실망한 신채호는 인류학적 관점을 받아들여, 1931년에 연재한 조선사(조선상고사)에서 '수두교'라는 이름으로 기존 대종교에서의 신비주의적 관점을 탈피하고자 시도했다. 즉 삼신에 대해서 사기 봉선서의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을 끌어옴으로써 대종교의 환인·환웅·환검에 보이는 인격신적인 면모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르면 천일은 '말한'이니 상제를 의미하는 것이고, 천일이 지일을 낳으니 지일은 '불한'으로 천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지일이 태일을 낳으니 태일은 '신한'으로 독존무이의 절대자를 의미한다. 또한 다시 이로부터 조선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서는 어떠한가?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태백일사의 삼일신고가 단군시대가 아닌 신시개천 시대의 가르침이라 기술되어 있고, 삼신이 각기 주조화(主造化)·주교화(主敎化)·주치화(主治化)를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태백일사가 적어도 1920년대 이후의 대종교로부터 교리를 베낀 것임을 시사한다. 또한 삼신을 천일(天一)이 주조화, 지일(地一)이 주교화, 태일(太一)이 주치화한다고 하는데 이는 1931년 이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로부터 베껴온 내용임을 시사한다.

3.3.2.5. 한눈에 보기
  1907 1910 1912 1918 1922~1923 1931 1949 환단고기(1979)
삼일신고
天訓 天訓 天訓 天訓 虛空
(示+旬+且)訓 (示+旬+且)訓 (示+旬+且)訓 (示+旬+且)訓 一神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善無惡
淸無濁
厚無薄
단군의 교시단군의 교시환웅의 교시 환웅의 교시환웅의 교시
삼신일체 환인
환웅
단군
환인
환웅
단군
환인
환웅
환검
환인
환웅
환검
환인
환웅
환검
천일(말한)
지일(불한)
태일(신한)
환인(한배임)
환웅(한배웅)
환검(한배검)
천일(상계주신)
지일(하계주신)
태일(중계주신)
천신
귀신
인신
추상신
추상신
실재인
주재주
조생주
교화주
조화주
교화주
치화주
상제
천사
절대자
조화주
교화주
치화주
주조화
주교화
주치화
천부경
낭가사상 태조왕대 시작 고국천왕대 시작
어떤 장사 조의 일인

3.3.3. 창작 소재로서의 가치가 있나?

그래도 환단고기를 창작 소재로 쓰면 좋지 않느냐는 주장이 있는데, 환단고기를 안 읽어봐서 하는 말이다. 환단고기가 환빠들에 의해 한민족 일만년 3류 환타지소설 역사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어마어마하게 홍보되는 것에 비하면 그 내용은 의외로 대단히 허술하고 단조로운데다 무미건조하다.

공간적으로 더 크게, 시간적으로 더 길게 몸집 불리기만 하다 보니까 다루는 시간은 엄청나게 긴데 정작 내용상으로는 밀도가 떨어져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꼴이다. 평균 수십 년을 헤아리는 단군 치세에 잘해야 대여섯 개 기사만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 그 기사들 역시 '어느 역사서에서나 평범하게 나올 법한 별 흥미없는 기사들' 밖에 없으며, 창작 소재로 생각해볼만한 특이한 일화나 사건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40대나 있는 단군들 가운데 반수 이상의 단군은 '즉위했다. 죽었다.'수준의 기록만 있다.

그나마 내용이 많고 떡밥으로서 맛있어보이는 부분은 기존의 한국 신화중국 신화, 규원사화(...), 옛날 도교 서적 등에서 베낀것에다 조금 살을 붙이거나 설정을 조금 바꾼 정도라서 독창성도 없다. 기본적으로 저자로 추정되는 이유립의 문화 교양 수준이 그리 대단치 않았던 증거이다. 비중 있게 하는 말이라고는 자기 멋대로 쓸 수 있는 종교적인 내용이 대다수. 애당초 태백교의 경전용으로 쓴 종교서적이다!

애써 판타지소설이나 대체역사소설로 생각하고 보려고 해도 문체가 소설체가 아닌, 기존의 연대기적 사서들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하고 무미건조한 한문 번역 문체라 어지간해서는 재미를 느끼기도 힘들다. 문학적으로 보자면 내용 자체가 엉망이라 도저히 써먹을 거리가 없는데, 예컨대 한번 함락시킨 탁록을 함락시키고, 또 함락시키고, 또또 함락시키고, 또또또 함락시키는 등. 고만해 미친놈들아! 탁록성의 라이프는 이미 제로야! 결국 사서로서의 진실성도 없고, 소설로서의 대중성도 없는 망작이다.

결국 이 밀도와 다양성의 부재가 환단고기가 소재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뭐, 그 내용이란 요즘 세상에는 씨알도 안 먹히는 뭔지 모를 종교적인 소리뿐이라 밀도가 높아봤자지만.(...) 차라리 역사서인 척 폼잡지 말고 처음부터 소설로 씌어졌다면 어떠했을지? 다만 그렇다손 쳐도 설정상 이쪽 분야의 본좌인 반지의 제왕 세계관하고 비교하면 많이 조잡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일정한 팬덤이 없이 표류하는 한국형 판타지가 채용하는 설정 세계관 소재로는 부분적으로 많이 쓰이는 편이다. 퇴마록이라던가, 치우천왕기라던가, 고구려라던가. 그런데 이것들도 따지고 보면 치우 관련해 환단고기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순전히 '공상'에 가까운 내용이다. 누구 치우에메랄드 타블렛을 썼다는 내용을 환단고기에서 본 사람?(...) 거듭 말하지만 애초에 소재로 될 꺼리가 별로 없다.

사실 창작물이라는 관점에서도 환단고기를 격침해버릴 작품이 이미 존재하는데, 바로 남당 박창화화랑세기남당유고에 실린 작품들이다. 화랑세기는 '위서'라고 본다고 해도 얼핏 소소하게 여겨질지도 모르는 독특한 제도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거리, 시대적으로 있었을 수도 있을 법한 사회상 그리고 세...쎾쓰! 등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 내용 측면에서 여러모로 초라한 환단고기와는 달리 수상할 정도로 자세하다.너무 자세해서 위서같다.

화랑세기남당유고가 그 내부적인 밀도와 흥미가 환단고기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것. 화랑세기도 위서이며 소설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박창화유립보다는 소설을 잘 썻다'는 정도에 불과할 수 있으니, 문학으로서 가치를 보자면 그래도 '소설이라도 흥미롭게 쓰긴 썻다'고 볼 수도 있다. 적어도 창작물로서의 가치, 문화적으로 활용될 가치가 환단고기보다 보다 높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처럼 막장 드라마를 적극적으로 결합시킨다면 꽤 재밌을지도 모른다.

어라? 언제 위서가 판타지물로 환골탈태했지?

3.4. 결론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설명한 귀선(龜船)의 제도를 보건대, 배는 널빤지로 꾸미고 철판으로 꾸민 것이 아닌 듯 하니, 이순신을 장갑선의 비조라고 함은 옳으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옳지 않을 것이다. 철갑선의 창조자라 함이 보다 더 명예가 되지마는, 창조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진화(進化)의 계급을 어지럽힐 뿐이다.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을 발명하였다든가, 고려의 어떤 명장(名匠)이 증기선을 창조하였다는 문구가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신용할 수 없는 것은, 남들을 속일 수 없으므로 그럴 뿐만 아니라, 곧 스스로를 속여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물론 사학도 사회과학이기에 '모든 과학은 반증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열린 사고로서 모든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보아야 하나, 환단고기는 이미 숱하게 검증되어 위서로 판명 되었고, 그 내용들도 단 하나도 증명이 안되고 있으니 이것을 개연성은 고사하고 사학의 한가지 가능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조차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열린 사고로 과학을 한다해도 영구기관이니 피라미드 파워니 하는 헛소리마저 과학으로 인정해줄 수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아니 피라미드 파워가 차라리 나을지도. 그리고 영구기관은 공돌이의 로망이라고

이윤기는 이 책에 대해 '19세기에 새로 만들어진 신화'라 했는데, 상당히 적절한 평가다. 덧붙이자면 악의와 배타성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환단고기를 믿는 제1의 이유인 '작은 것은 초라하고, 짧은 것은 비루하다. 고로 기존의 한국사는 초라하고 비루하다'는 생각 자체가 본디 일제로부터 주입된 것임을 명심하자. 작다고 초라한 것이 아니고, 짧다고 비루한 것이 아니다.[99] 정말로 초라하고 비루한 것은 정작 내 자신은 발전이 없이 부심과 허세만 부리면서 남을 헐뜯고 배척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따르면 한민족은 발전은커녕 쇠퇴해왔다는 게 함정. 아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 없다!

4. 기타

  • 환단고기를 부정하려면 육하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누가 이유립(李裕岦, 1907~1986)이
언제 1960년대(환단유기)에서 1971년(환단휘기) 사이부터
1976년까지 초고 작성(동양문명서원론을 비판한다)
1979년에 1차 출간(광오이해사본)
1983년에 2차 출간(배달의숙본)하여
어디서 처음에는 대전 은행동(1963~1976)에서
나중에는 의정부 자일동(1976~1980)에서
무엇을 환단고기를
어떻게 날조하였다.
① 자신이 이끄는 태백교(커발한교)의 경전으로 쓰기 위해
② 자신이 속한 고성 이씨 가문을 선양하기 위해
③ 자신의 이력과 사상을 민족투사로 포장하기 위해

  • 오성취루 현상으로 환단고기의 신빙성이 증명된다?
    환단고기에서 흘달 50년(BC 1733)에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실제로 BC 1734년에 비슷한 천문현상이 있었다. 하지만 오성취합 현상은 5세기 무렵에 계산해서 역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즉, 실제 그 현상을 관측하지 않았더라도 고중세 중국의 천문관들이 충분히 계산해서 언제 일어난 것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
    환빠들은 이 반박에 대해서 이유립이 그걸 정말로 계산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오성취루는 실제 고조선의 천문 기록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헌데 반전은 그 오성취루 현상이란 게 이미 단기고사, 단기고사 이전에는 금본죽서기년에 기록되어 있었다. 참고로 금본죽서기년은 명나라 시대부터 전해오고 있던 것. 즉, 이유립은 그냥 단기고사를 베낀 것이지 그걸 실제로 계산한 것조차 아니다.

  • 일본서기가 진서면 환단고기도 진서다?
    일본서기는 '진서'가 맞다. 진서와 위서의 구별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서지사항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진서라도 내용이 극히 일본중심적이고 그런 부분들이 중국이나 한국에서 정사로 불리는 사서들과 맞지 않는 서술이 많기 때문에 취급에 주의해야 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신화적 내용, 천황가 미화, 외교적 입장, 연대의 문제, 그리고 기타 등등그냥 전부만 주의하면 일본서기의 내용은 꽤 신뢰성 있게 기술되어 있다. 즉,일본서기가 사서로서는 문제가 많은서책이라지만 책자체는 진짜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환단고기는 내용뿐만아니라 서책자체의 진위가 문제인 상황이다.

  • 서지사항은 위서이나 알맹이는 사료를 참고했다?
    제목 그대로 책 자체는 조작이나 그 내용은 현전하지 않는 사료들을 보고 베껴서 사료적 가치가 있을수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나 과거 이글루에 이를 조목조목 논파한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수많은 고유명사가 기존 사서에 나오는 것들을 적당히 변형한 것이라는 글. 물론 진성 환빠들은 이런 주장도 안 한다. 오히려 이유립이 이렇게 사료들을 세세하게 뒤져서 자료를 모았을 수 없다면서[100] 진서임을 방증해주는 자료라고 주장한다.(...) 아 닥치고 진서라고. 그래서 확실히 위서라는 증거는 되지 못하지만 적어도 환단고기의 수많은 명사들이 이유립의 온전한 창작(불가능한)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또한 이야말로 환단고기가 일정한 목적하에 제작된 위서임을 증명한다. 그 까닭은 위조에 가장 중요한것은 "보고 싶어하는것을 보여준다."라는 것이다. 물론 그 위조의 제작목적은 "보이고 싶어하는것도 보여준다"에 해당한다. 즉, 누가 위조지폐를 만든다면 그것이 진짜지폐체럼 보이게 만드는것이 목적이므로 최대한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하는것이다. 이것은 특징적 사실을 아예 퍼옴으로서 가능하다.
유능한 사기꾼이 거짓70%에 진실 30%를 섞듯.....

명사 출처와 변용
赫胥桓仁장자 마제편 '혁서씨(赫胥氏)'
波乃留山
波乃留國
波奈留山
波奈留國
해동역사 풍속지 인용 화한삼재도회 '하나루(波乃留)'[101]
養雲桓雄진서 사이전 '양운국(養雲國)'
瀆盧韓桓雄삼국지 동이전 '독로국(瀆盧國)'
檀君扶婁삼국유사 기이편 인용 단군기 '부루(夫婁)'
斐西岬河伯女단군세가(허목) '비서갑녀(非西岬女)'
彭虞한서 식화지 '팽오(彭吳)'
藍國후한서 동이열전 '남이(藍夷)'
高豆莫
豆莫婁
위서 물길열전 '두막루(豆莫婁)'
烈帝수서 동이열전 '소열제(召烈帝)'[102]
高登주서 이역열전 '고등신(高登神)'
素尸毛犁해동역사 교빙지 '증시무리(曾尸茂梨)'
대동역사(신채호) '소호무리(素戶茂梨)'
蓋斯城
蓋斯原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개사수(蓋斯水)'
于西翰
烏斯含
삼국사기 지리지의 '오사함달(烏斯含達)'
解慕漱
慕漱離
高慕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해모수(解慕漱)'
黎洪星대동역사(신채호) '여씨(黎氏)'
芮戈관자 지수편 '예과(芮戈)'
雍狐之戟관자 지수편 '옹호지극(雍狐之戟)'
安夫連桓雄광개토왕릉비문 '안부련(安夫連)'
陜野奴일본서기 '협야존(陜野尊)'

  • 나중에 출토된 자료들로 환단고기의 정확성이 입증되었다?
    1915년에 확인된 고구려의 건흥(建興) 연호, 1923년에 확인된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자유(子遊)는 1979년에 처음 나온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물론 위서라는 확증도 되지 못하지만. 허나 문헌상으로 충분히 확인되는 발해 문왕의 연호 대흥(大興), 고구려 유민 절도사 이정기(李正己), 은나라의 귀방(鬼方) 정벌을 근거로 환단고기 진서론을 펴는 사람들은 반성 좀 하자.(...)

  • 해모수가 종실(宗室)이란 것은 군더더기 문구이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의 종실(宗室) 대해모수, 태백일사의 종실(宗室) 해모수에 종실이 왜 붙은 것인지에 대해 단학회 역주본에서는 이를 '군더더기'라 하여 단순한 미스테리로 남겨두고 있었는데,[103] 이후 단재 신채호의 대동역사=대동제국사(1907)가 발견되면서 미스테리가 해결되었다. 단재가 해모수를 가리켜 종실(宗室) 해모수라고 표현하고 있었던 것. 즉 이유립이 이걸 보고 베꼈단 이야기인데, 나중에 단재가 '소싯적 썼던 대동제국사는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이불킥한다'고 했던 걸 보면 단재는 저승에서도 편히 쉬지 못할 듯.(...) 영원히 고통받는 신채호



  • 환단고기가 여러 유사역사학 계열 위서 중 지명도와 지지도가 가장 높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규원사화는 완성도와 일관성은 더 높지만 이 바닥 원조답게 환단고기보다 내용이 소박하고 짧으며, 단기고사는 환빠의 눈으로 봐도 지나치게 황당하기 때문.(...) 대다수 환빠의 입장에서는 환단고기가 그나마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먹음직스럽다는 말이다.

  • 대륙설 계통의 주장은 환단고기를 직접적으로 근거로 삼지 않고,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다가 억지를 쓰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대륙설로 가면 환단고기는 거의 인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 때문에 그나마 이유립의 의도 그대로 환단고기 지도를 만든 환단고기 판본은 상생출판에서 펴낸 환단고기 번역판에 실린 지도가 유일하다고 할 정도다. 다만 그마저도 요수난하설에 경도되어 있다는 게 한심한 노릇. 이게 최선입니까 한뿌리에서 펴낸 환단고기 번역본의 경우 이를 대충 인정하는 직역 수준의 본문이지만, 지도는 없다. 애초에 환빠들은 환단고기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는 증거다.

  • 전국의 도립이나 시립 도서관을 가보면 이 책이 어김없이 꽂혀 있다. 그것도 종교서적이나 한국소설(811)이 아니라 한국상고사(951.2)로 분류되어 있어서 이걸 가지고 이용자와 도서관장이 실랑이를 벌인 적까지 있다. 하지만 이는 뭔가 특정 단체에서 조직적으로 관여했다기보다는, 전국에 산재한 환상아빠들이 기증 혹은 구매 신청을 내서 수용한 것. 심한 경우에는 매일마다 동네 도서관에 출퇴근하면서 자신이 기증한 환단고기가 역사 분야에 잘 꽂혀 있는지 확인하고 가는 사람도 있고, 안 보이면 즉시 컴퓨터로 대출 여부를 확인해서 장기 미반납일 경우에는 한 권 더 구입해 두라고 요구하거나 자신이 직접 구매해 기증하기도 한다.(!)
    이따금 개념 있는 사서는 매분기 도서 분류 때 한국소설로 밀어 버리기도 하고, 사서는 물론 도서관장까지 합심해서 환단고기를 안 들여놓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경우 시민의 장서 구입 요구를 무시한다며 사방팔방에 민원이 들어가버린다. 단순히 무관심해서 환단고기를 역사 분야에 두는 경우 말고도 이렇게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두는 경우도 많다. 사실 도서관의 목적은 발간된 서적을 소장하고 보관하는 것에도 있는 만큼,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것 같은 명백하게 국가가 금지한 서적이 아니고서야 민원이 있는데도 들여놓지 않을 수는 없다. 지역도서관에 환단고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는 결론을 올바르게 이끄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명심하자.

  • 중국어 위키문고에 환단고기 전문이 올라가 있다. # 으악! 나라망신!



  • 2011년에 증산도 교주 안경전이 환단고기를 교리화한 이래, 증산도가 환단고기 전파 활동을 대단히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다. 각 서점마다 양장본을 잔뜩 쌓아놓았거니와, 전국을 돌면서 환단고기 세미나를 벌이고 다녀서 오다가다 쌓인 책이나 걸린 현수막을 본 사람들에게 OME를 선사했다. 기본적으로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인 환단고기 운운 찌라시는 볼 것도 없이 일체 증산도에서 뿌리고 다닌 것이다. 이하는 2012~2013년 사이에 증산도에서 환단고기 관련 활동을 어떻게 벌이고 다녔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 증산도 부속 방송인 STB상생방송에서 역사 특강을 한다면서 환단고기 특강을 한다. 사실 상생방송은 2011년 이전부터 이미 사이비 역사학자들을 불러다가 사이비 역사를 마구 뿌리고 다니고 있었던 전력이 있다. 백제가 조신하고 도의적인 문화였다느니, 신라의 탑돌이 문화가 현대의 홍대 클럽과 같다느니, 신라의 문화는 모다 백제로부터 배워 간 것이라느니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도 충분히 아스트랄했지만, 2011년 이래로는 엄연히 환단고기라는 텍스트를 얻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막장.(...)

  • 사단법인 대한사랑이라는 단체에서 학교를 돌며 참역사(?)를 강의한다. 개소리 집어쳐! 무슨 참역사를 만난다는 거야? 사단법인 운운하니까 종교단체인 증산도와는 무관한 것 같지만, 속지 말자. 내미는 환단고기 판본이 죄다 증산도 역주본이다. 수많은 환빠 단체 가운데에서도 신교문화 운운하는 건 증산도밖에 없다. 과거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순회했지만 학생들이 시험에 안 나오면 안 봐준다는 걸 깨닫고 최근에는 좀 더 성인층을 대상으로 포항공대나 국회 대회의실(!) 등에서 지방 순회 강연을 벌이는 듯. 참고로 강의는 대충 이렇게 진행된다고 한다. 비단 증산도만이 아니라 단월드 등 다른 곳에서도 통용되는 방법이다.

    1. 청중들의 분노를 끌어올린다.
      - 요령: 질풍노도의 시기인 학생들은 단순하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비난하자.
      - 심화: 반응이 기대에 못 미치면 위안부 문제일본군의 만행과 같은 보다 자극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 이 경우에는 남한 대토벌 작전 당시에 의병을 처형하는 장면이 찍힌 사진이나, 철로 건설 당시에 철로를 부수려던 사람을 목매단 사진이나 하여튼 뭐라도 자극적인 시각자료가 있어야 한다.

    2. 그렇게 끌어올려진 분노를 기성사학계로 돌린다.
      - 요령: 일제가 한국의 역사서 20만 권을 수거해서 불태웠다고 자극하라.
      - 발전: 식민사관의 거두 이병도가 최태영에게 설득되어 단군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강의하라.
      - 세부: 요수난하설을 들먹이며 한사군은 사실 한반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고 강의하라.
      - 결과보고: 학생들이 국사 교과서와 선생님에게 의심을 품는다.

    3.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대안이라며 환단고기를 제시한다.
      - 요령: KBS 역사스페셜이 1999년에 방영했던 '추적! 환단고기 열풍'에서 환단고기의 내용을 잠시 틀어주도록 하라. 당신이 잠시 쉴 수 있게 된다.
      - 주의: 제한된 부분만 틀어주도록 하라. 해당 방영분에는 환단고기를 옹호하는 내용만 있는 게 아니다.
      - 발전: 환단고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로 홍산문명을 들어라. 모든 증거가 단군신화의 웅녀에 꿰어맞춰진다.

    4. 우리나라가 세계 문명의 원조라고 주장한다.
      - 발전: 환국 12국 가운데 수밀이국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수메르라고 끼워맞추라.
      - 요령: 지도를 적극 활용하라. 환국의 광활한 영토가 부수적으로 세뇌된다.

    5. 우리나라가 대단히 오래된 나라고 큰 나라였다고 세뇌한다.
      - 세부: 우리나라가 환국→배달국→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1만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라.
      - 세부2: 삼한이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 중국, 한반도 세 나라 전체에 걸쳐 있었다고 하라.
      - 발전: 삼한이나 대한민국의 '한'이라는 말이 크다, 밝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에게 내재한 광명, 또는 광명이 깃든 신성한 존재로서의 인간 등을 의미하는데 사람이 이러한 경지에 다다르면 무병장수하게 된다고 꼬드겨라. 뭐가 뭔 소리인지 몰라도 '한'이 뭔가 대단한 거라고 세뇌되기엔 충분하다.
      - 결과보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나라였으며, 이것이 진짜 역사라고 세뇌된다.


  • 최근에는 환단고기 독후감 대회를 벌이는 듯하다. 참고로 대회에서 주는 상마다 다 하나씩 환단고기가 있다.(...) 이게 아직도 팔린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환빠 제조 프로젝트인소닷에서도 이걸 독후감 대회로 걸어 놓았던 적이 있다. 판타지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데 뭐가 문제야? 상관없다 충북 청주시 의 한 고등학교에 걸려 있던 이 독후감대회 팜플렛 옆에 누군가가 이 항목을 인쇄해 붙여 놓은 적도 있다. 그 옆에는 '위키니트야 용돈벌이나 해라'라고 쓰여있긴 했지만

환송왕.jpg
[JPG 그림 (Unknown)]


  • 심지어 환단고기판 암송왕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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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고로, 화랑세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주장도 학계에서 나름대로의 근거를 갖추고 제기되고 있다. 본 항목에 나오는 허섭쓰레기와는 달리, 화랑세기는 '학자들 가운데 간혹 진서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카더라' 라고 생각해두는 것이 바람직.
  • [2] 참고로 국수(國粹)라는 말 자체가 신채호가 만들어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단어이니, 신채호는 국수주의자가 맞다. 다만 이 국수가 원래는 '민족의 고유한 장점'이라는 의미였는데, 이유립 같은 후세인들이 악용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부정적 뉘앙스로 굳어졌을 뿐.(...)
  • [3] 일본의 황국사관,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
  • [4] 1297~1364. 이름은 이암(李岩).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공민왕 치세의 재상이었다.
  • [5] 환단고기 BC 2333~BC 238년 2096년간, 단기고사 BC 2512~BC 416년 2096년간, 규원사화 BC 2333~BC 1128년 1205년간
  • [6] ?~1397?. 호 휴애(休崖)를 복애(伏崖)의 오기로 보아, 고려 말의 문신으로 정몽주의 제자였던 범세동(范世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7] 1455~1528.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연산군에 의해 유배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었다.
  • [8] 198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단군神話 바람"에 의하면 당시 인기몰이를 하던 국뽕소설 '단'으로 이미 이런 게 팔릴 밑밥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 [9] 고려원의 자매회사. 1990년에 고려원미디어로 변경.
  • [10] 실제 '타클라마칸'이란 뜻은 위구르어로 '산-사막(타클/라마칸)'이라는 뜻으로, 북으로는 천산산맥, 서로는 파미르 고원, 남으로 쿤룬산맥, 동으로 치렌산맥에 둘러싸인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묘사한다. 위구르어로는 타클리마칸(تەكلىماكان)이라 한다.
  • [11] 참고로 이 출판사는 규원사화나 신단실기 및 한재규가 그린 만화 환단고기도 출판하고 있다.
  • [12] 하드커버판(B5), 보급판(B5), 축소판(A5), 포켓판 4가지 종류가 나와 있다. 그런데 정작 보급판이 한문 원문만 있는 영인본이라는 게 반전.
  • [13] 사실 환빠들 사이에서도 의견 통일이 안 되고 있다.(...)
  • [14] 호(胡)의 초성인 'ㅎ'과 관(官)의 중성·종성인 'ㅘ·ㄴ'을 붙인다. 이러한 표기 방식을 반절법(反切法)이라고 한다.
  • [15] 같은 책에서 端을 '도환절(都丸切)'이라 했다. 현대 한국음으로는 端을 단이라고 읽지만, 중세 이전에는 그 발음이 돤이었던 것으로, 현대 중국음에서도 역시 端은 뚜안(duān)이라고 읽는다.
  • [16] 이유립이 1983년 배달의숙본의 서지사항에 초판을 개천 5808년, 광무 15년 3월 16일이라 적어놓았고 이는 아직까지 통용된다.
  • [17] 단학회 역주본에서는 이 초판을 필사본이라고 하는데, 증산도 역주본에는 범례의 기궐(剞劂)을 근거로 목판본이라 하고 있다. 이거 뭥미?
  • [18] 그런데 웃기게도 현존하는 환단고기 판본에는 모두 오형기가 필사하면서 썼다는 발문이 붙어있고, 전부 오형기의 필사본이 저본이라 하고 있다. 때문에 증산도에서는 이 일로 의정부에서 잃어버린 게 계연수의 초간본이라고도 하는데, 그럼 그 전에 잃어버렸다는 건 도대체 뭥미? 게다가 한배달 2001년 7월호에 따르면 이 일로 가지고 있던 '환단고기'를 잃어버리고 기억으로 되살려야만 했다고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오형기의 필사본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기억으로 다시 써야만 했을까. 즉 이유립은 계연수의 초간본이고 오형기의 필사본이고 간에 1970년대에 죄다 잃어버리고 기억으로 되살려 썼던 것이며, 환단고기 원문에 더해서 생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기던 오형기의 발문까지 외우고 다니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 [19] 환단고기 - 실크로드 흥망사, 1982년.
  • [20] 증산도에서는 원고 자체는 1979년에 준비되었고 출판비 문제로 발간이 1983년에 되었다고 변명하나, 어찌되었던 분명히 서지사항을 위조한 것이다.
  • [21] 세조실록 7권 3년(1457) 5월 26일 3번째 기사, "安含老元董仲三聖記".
  • [22] 오장국에서 온 비마라진제(毘摩羅眞諦)와 농가타(農伽陀), 마두라국에서 온 불타승가(佛陀僧伽)라고 한다.
  • [23] 증산도 역주본 원전, 107쪽.
  • [24] 아무래도 원천석이 석함에 수장했다가 증손자가 열어보고 깜놀해 태워버렸다는 야사(野史)가 환단고기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으리라 여기는 모양이다.
  • [25] 또한 단군세기 서문에서 저자는 스스로를 홍행촌(紅杏村)의 늙은이라고 했는데, 실제 이암이 은거한 곳은 청평산(淸平山)이고 행촌(杏村)은 그의 묘지명에서 자호(自号)였다고만 적고 있을 따름이라 홍행촌 운운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다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 [26] 사실 이것도 위서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부루의 도산회의 참가라는 신화소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색은 아예 "우리 동방이 순임금과 하나라 때 어떠하였는지는 역사에 전하지 않아 상고할 수 없지만, 주나라가 은나라 태사 기자(箕子)를 책봉하였으니 그곳이 중국과 통하였음을 대개 알 수 있을 따름"이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그래도 환단고기가 진서라면 이것도 진서겠다
  • [27] 참고로 정몽주는 "고개 돌려 삼한이 멀지 않으니 천년토록 기자의 유풍이 있네(回首三韓應不遠 千年箕子有遺風)"라거나 "기자가 동이를 밝히시니 만세토록 황극의 가르침 있네(箕子以明夷 萬世訓皇極)"라는 환빠들의 눈에는 거의 망발에 가까울 시를 남겼다(...).
  • [28] 온몸이 찢겨 전국에 뿌려졌다고도 하고, 사지가 토막나 압록강에 버려졌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과장이 너무 심하다.
  • [29] 정훈모가 1910년에 대종교에서 뛰쳐나와 세운 친일 지파. 원래는 나철이 이끌던 대종교 자체도 단군교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철과 정훈모가 갈라서면서 나철이 이름을 대종교로 갈았다. 때문에 흔히 대종교와 단군교가 혼동되지만 실은 다른 교단이다.
  • [30] 이유립이 1954년에 세운 종교단체. 태백교라고 쓰고 '커발한'교라 읽는다? 이명은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이기와 계연수가 대종교로부터 갈라져 나온 단학회(檀學會)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유립이 세운 것이나 다름없다. 삼신일체를 교리로 한다. 현재 이유립에 이어 양종현(梁宗鉉)이 회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증산도와 크로스 합체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 [31] 이기의 유고집인 해학유고의 <증주진교태백경>에 따르면, 이것이 태백교의 경전이 아니라 '진교(眞敎)'의 태백경으로 되어 있으며 이 '진교'란 바로 대종교였다. 따라서 이기가 대종교와 별도의 단학회(태백교)를 세웠다는 것은 허구가 된다. 그런데 이유립은 어쩌다 손에 넣은 이걸 제멋대로 뜯어고쳐서 '태백교'의 경전인 <정교증주태백속경>으로 팔아먹었다.(...)
  • [32] 개중에는 계연수를 참획군정으로 거느렸다는 이상룡의 역사인식이 그나마 환단고기의 내용과 가장 흡사하기는 한데, 환단고기에 배어나는 철저한 반중국적 역사인식과 달리 이상룡은 오히려 중국을 '4천년 동안 모국이었던 중화'라 칭하면서 자신은 농서 이씨의 후예로 "중화 또한 씨족의 구관(舊貫)"이라 말하기까지 했다. 또한 환단고기에서 기자는 일개 망명객에 불과할 뿐 정치적 세력을 이룬 바 없지만, 이상룡은 1911년부터 일관되게 기자조선이 평양이 아닌 요양에 있었다고 함으로써 환단고기와 달리 기자조선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한민족 북방사의 계통을 '단군조선→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로 설정한 것도 환단고기에서 '북부여→가섭원부여(동부여)&졸본부여(북부여)→고구려'로 설정한 것과 차이를 보인다.
  • [33] 관자에 '발조선'이나 대대례기의 '발식신' 정도가 이와 비슷한데, 이는 일주서에서 "발인이 씩씩하여, 사슴과 같이 빠르게 달린다."는 문구가 발굴되면서 '발·조선'과 '발·식신'으로 끊어읽어야 하게 되었다.
  • [34] 2007년에 비봉출판사 출간본에서는 고약하게도 '천부경등'이라는 네 글자를 빼버렸다. 생전에 글자 하나 건드렸다고 투고를 끊어버린 일도 있었던 단재인 만큼, 저승에서라도 이를 알게 된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듯.
  • [35] 이 말은 신채호가 나서서 '단언컨대 이건 위작이다'라고 한 것은 아니고, '이걸 고서라고 하는 눈깔 삔 사람이 누가 있음?'이라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 그러니까 이게 위작이라는 사실은 입 아프게 논증할 필요도 없다는 것.
  • [36] 양종현은 계연수를 살해하고 단학회의 본부이던 배달의숙에 불을 질러서 계연수가 소장하고 있던 3천여 권의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물론 계연수와 단학회가 비실재했다는 게 문제지만.(...) 이유립이 가지고 있던 초간본이 어찌되었다고 변명하는지는 위에서 다 이야기했다.
  • [37]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유립이 대시전을 세운 것은 1969년 봄이다. 어라? 오형기가 필사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네?
  • [38] 다만 1952년에 저술되었다는 심당 이고선의 '단서대강'에 환단고기,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이 이미 참고서적으로 나와 있어서 실제로 1949년에는 필사본으로나마 대체적인 내용이 잡혀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단서대강은 1952년 당시에 출간된 것이 아니라 이고선 사후 1981년이 되어서야 (그의 아들?) 이준에 의해 유고집인 심당전서로 묶여서 나왔기에 단서대강 자체의 진위를 확인할 수가 없으므로 상술한 것처럼 1979년에 완성되었다고 볼 여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인 이고선이 워낙 무명인사라서 더 이상의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단서대강이 진서라 해도 문제인게, 결국 한 갑자 뒤에 공개하겠다는 계연수와의 약속은 어디다 팔아먹었냐는 거다.
  • [39] <환단휘기(1971)>, <세계문명동원론(1973)>, <동양문명서원론을 비판한다(1976.5)>, <이병도사관을 총비판한다(1976.10)>.
  • [40] 맹자는 '천하의 광거(廣居)에 거하고, 천하의 정위(正位)에 서고, 천하의 대도(大道)를 행하는' 자가 대장부라고 하였다.
  • [41] 이를 가리켜 증산도 역주본에서는 "가지마의 번역이 많은 오류와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고 애써 이유립에게 변호를 하지만, 유교 고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시 서두와 말미의 광거(廣居)와 기여(起予)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소치에 불과하다.
  • [42] 자하가 공자에게 "예가 나중에 오는 겁니까?"라 묻자, 공자는 "나를 계발시키는 자, 바로 자하로구나(起予者商也)! 이제 함께 시를 말할 만하다(始可與言詩已矣)!"라고 하였다.
  • [43] 흑룡강과 백두산 사이 만주 지방?
  • [44] 시베리아 중앙고원과 바이칼 호 일대 지방?
  • [45] 중국 신화에서는 치우에 대해 구리 머리에 쇠 이마(銅頭鐵額)라고 묘사한다.
  • [46] 고열가의 후손이라는 말은 일설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열가(高列加)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에는 애당초 노리고 지은 이름인 듯.
  • [47] 지구의 크기가 불변이 아닐 가능성 때문에 정의를 바꿔서, 1983년부터는 빛이 진공에서 1/299 792 458 초동안 진행한 거리가 되었다.
  • [48] 환빠들은 이것을 보면서 '보라능 우리는 이렇게 과거에 위대했었다능'이라고 망상하지만 오히려 그림의 변화만으로 따지자면 과거에는 미약했던 한(漢)족이 주인공 보정으로 점차적으로 세를 불려나가, 오천 년 동안 발전 없이 삽질만 하고 있는 한민족을 누르고 동북아시아의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고까지 이해 가능하다. 즉 한마디로 하자면 자폭.
  • [49] 한문으로 達支國이라 쓰는데 한글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는 바로 마한의 맹주국이었던 월지국(月支國)을 가리킨다. 또는 목지국(目支國)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는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충남 직산이나 전북 익산에 비정하는 것이 통설이다.
  • [50] 사기에는 위만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고 전하는데, 여기에 주석을 단 응소(應邵)는 공통되는 글자에 착안했는지 요동군의 속현이던 험독(險瀆)을 조선의 옛 도읍이라 했던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이를 받아들인데다가 난하요수설을 끌어다가 이것을 난하 하류에 있는 탕산시 일대로 보고 있다. 실제로는 험독과 왕험을 연결시키는 것을 오류로 보고 험독은 요하 하류에 비정하며, 왕험은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 [51] 예로부터 중화문명권은 세계사에서도 가장 발전도가 높은 지역중의 하나로 동시대의 문명권과 비교해 봐도 전국7웅은 하나같이 모두 상당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록 같은 7웅 중에서는 말석이었지만 연나라 자체도 북방민족들과의 싸움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무시못할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연나라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 고조선이 오히려 상당히 선전한 셈이다.
  • [52] 이 때문에 대륙설 계통의 주장은 환단고기를 직접적으로 근거로 삼지 않고,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다가 억지를 쓰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대륙설로 가면 환단고기는 거의 인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 [53] 그냥 고조선이 패배한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다고 보면 간단하지 않겠나 싶지만, 있지도 않은 춘추필법의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 운운하면서 중국의 사서들을 신나게 까내리던 낮짝으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사실 이걸 춘추필법이라고는 하는데 춘추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정작 춘추필법은 억울하다.(...) 이 말은 본래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긴다(爲中國諱恥)'는 것이 공자의 춘추 이래 지나 역사가의 유일한 종지가 되었"다고 적은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 [54] 김한규, 『천하국가』, 57쪽의 일부를 어레인지한 것. 그 원문은 상나라#s-3 문서에 인용되어 있다.
  • [55] "도시국가론자 가운데는 한대(漢代)의 취락규모로부터 유추하여 당시 성곽도시의 평균을 300호로 잡기도 하지만 이는 '도비불과백실 이편야사(都鄙不過百室以便野事)'만을 감안해도 기층의 전형적 읍이라 보기 어렵고, 반면 선진(先秦) 취락규모를 10~25호로 잡는 자연촌락설도 읍 본래의 공동방위집단적 성격에 의거할 때 지나치게 소규모인 듯하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정황적 조건과 기타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당시 비읍 규모의 최상한을 100호로 보고 대체적 평균치를 30~40호로 추정하는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한데, 물론 이 역시 추론의 역(域)을 넘지 못한다.(「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講座 中國史 I』)"
  • [56] 이것이 단군조선 말기 단군구물 원년(BC425)의 일이므로 거꾸로 그전까지는 '화친하고 전쟁할 권리'가 단군에게만 있었다는 말이 된다.
  • [57] 주(州)라는 글자 자체도 강(川)의 줄기 사이에 점을 찍은 자형에서 보이듯 본래 하중도(洲)를 뜻하는 글자였고, 사람들이 하중도에 모여 살면서 마을이라는 의미로 확장된 것이었다. 따라서 춘추시대에 주는 지방의 군사거점이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 [58] 사기에서는 이들보다 조금 앞선 기원전 688년에 진(秦)이 규(邽)와 기(冀)의 융족을 토벌하여 이들을 초현(初縣)하고, 이듬해에는 두(杜)와 정(鄭)을 초현(初縣)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좌전에는 진(秦)의 현 설치가 전혀 보이지 않는 반면에 초(楚)와 진(晉)의 현 설치는 집중적으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후자가 더 중시된다. 현(縣)은 계(繫; 걸려 있다, 따라서 당기면 끌려온다)는 의미가 있어 '현'을 설치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단순히 직할화한다는 뜻의 동사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사로부터 현이라는 행정단위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 [59] 게다가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오늘날과 달리 군(郡)이 현보다 작은 조직이었는데, 이유립이 이걸 몰랐는지 환단고기에서는 처음 한 번만 주현(州縣)이라 하고, 그 뒤로는 일관되게 주군(州郡)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 [60] 30세 단군나휴(BC 909~BC 875)부터 35세 단군사벌(BC 772~BC 705)까지의 기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이 시기는 단군색불루가 조선의 제도를 정비한 이래 줄곧 태평성대가 이어진 기간이었다. 중국의 주나라·초나라와 북방의 흉노족·선비족이 모두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뒷산에는 봉황, 앞뜰에는 기린이 뛰노는 가운데 백성들은 도리가를 지어 부르며 단군조선을 찬양했다 카더라. 다만 단군사벌의 말년에 들어 일본으로 원정군이 출정하고 중국의 연나라 및 제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등 조금씩 갈등이 시작되었다. 더욱이 이 뒤로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 4세기 전반까지는 근 200년간의 암흑기가 펼쳐진다.(...) 그 뒤로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멸ㅋ망ㅋ
  • [61] 이하 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15~28쪽 참고.
  • [62] 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 14쪽, "군장사회는 수공업의 전문화와 사회적 위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군장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계층에 의해 일반 사회 성원들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통제와 조절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사회에서는 군장을 비롯한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권위를 현시하는 특수 유물을 전유(專有)할 뿐만 아니라 일반 성원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의 가옥·무덤·공적 의사 결정의 장소·의례 공간 등을 공간적으로 구분하기 마련이다."
  • [63] 김경택, 「청동기시대 복합사회 등장에 관한 일 고찰: 송국리유적을 중심으로」, 19~20쪽.
  • [64]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라.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사 조선삼한이라 하니 고리 시라 고례 남북의 옥저 동북의 부여, 예와 맥은 그의 관경이었다.(태백일사 신시본기)"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르빈이다.(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 [65] 사실 생활공간으로서 야(野)와 거주공간으로서 비(鄙)의 구분은 모호한 면이 있다. 비와 야를 동일시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는 반면에, 비와 야를 동일시할 수 없는 기록도 존재한다. 어찌되었든 둘은 교외라는 의미에서 일정하게 혼용되었던 듯하다.
  • [66] 이성구,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講座 中國史 I』, 95~96쪽.
  • [67] 안 그래도 미개간지가 유의미하게 널려 있는데 중국 따라한답시고 토지분급제를 실시했다가 철저히 시망한 사례가 있으니, 바로 다이카 개신 시대의 일본...
  • [68] 이미 무언가와 관련되어 있다고 확정된 유물을 환국과 관련지어서 말도안되는 날조를 일삼기도 한다.
  • [69] 당장 메이지 유신국가신토 교리를 세우느라 자국의 신화를 물갈이한 일본을 보라. 그렇게 물갈이를 했음에도 이리저리 들춰 보면 곳곳에서 티가 드러난다. 그런데 땅 속에 있는 수천 년 전 사람이 살았던 유적·유물을 하나도 안 놓치고 다 파내서 없앴다? 그건 좀 아니지 않은가?
  • [70] 뿐만 아니라 초본이라는 책이 성분검사결과 캐나다산 펄프다.(...) 하지만 환빠들은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세계를 제패했다는 증거라 우긴다. 하지만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법을 사용하면 어떨까?
  • [71] 더불어 이러한 개념적인 이행이 종래의 가족적 국가관 위에서 이루어진 만큼 이는 동아시아에서 특히 더 강력하게 동질성(문화)과 친연성(혈연)을 확인하고 이를 타 집단과 대비시킴으로써 정체성을 가지는 공동체가 되었다. 간단히 말해, 전근대의 국가관이란 사람이 '아버지(왕)'를 섬기지 '가족(국가)'을 섬기지 않는 것과 같다.
  • [72] 공백(共伯)인 화(和)라고도 하고, 공(共)나라의 백화(伯和)라고도 한다. 다만 이는 죽서기년에 따른 것이고 사기에는 공백화가 아니라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함께 정치하면서 공화라고 칭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소공은 목공(穆公)이라는 시호와 호(虎)라는 이름이 전하는 데 반해 주공은 그 자세한 신상을 알 수 없기에 근래의 학자들은 죽서기년의 기록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 [73] "협화(協和)니 상화(相和)니 공화(共和)니 하는 문자는 대개 서로 통용하는 말들인 것입니다(광해군일기)" "특별히 그 마음이 공화(共和)하지 못하고(영조실록)"
  • [74] 지금의 헤이룽장 성(黑龙江省) 무단장 시(牡丹江市) 닝안 시(宁安市) 닝안 진(宁安镇). 1910년부터 영고탑(寧古塔) 대신 영안(寧安)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 [75] 본래 송화강은 만주어로 '하늘 강'이라는 의미의 쑹아리 강(松阿哩江)을 음역한 것이다. 고구려와 발해에서는 속말수(粟末水), 요나라에서는 압자하(鴨子河), 금나라와 원나라에서는 송와강(宋瓦江)이라 기록되었는데, 송화강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1462년의 명통지가 최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나라에서 이를 혼동강(混同江)이라 이름지어서 한동안 송화강과 혼동강이라는 명칭이 병존하기도 했다.
  • [76] 시베리아라는 이름은 15세기에 킵차크 칸국이 분열되고 우랄 산맥과 예니세이 강 사이에 세워졌던 시비르 칸국(Khanate of Sibir)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러시아가 이반 뇌제의 지도 하에 아스트라한 칸국과 카잔 칸국을 멸망시키고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 칸국과 충돌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러시아 인들이 우랄 산맥 너머의 동토를 시비리(сибирь)라 부르던 것이 시베리아로 전화되었던 것이다.
  • [77] 고대에는 부근에 요동군 소속의 신창현(新昌縣)이 있다가 요나라 때 비로소 해주(海州)가 설치되었는데, 본래 발해의 남경 남해부였다는 것으로 보아 황해도에서 사람들을 끌어다 정착시킨 데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금나라 때에는 등주(澄州)라 개칭했다가 원나라 초에 폐지되었는데, 명나라 초에 다시 이곳에 해주위를 설치하였다. 해성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청나라 순치 10년에 해주를 해성으로 고친 것이 최초이다.
  • [78] 고구려 때에는 책성이 있었으며, 간혹 동해곡(東海谷)이 이곳을 가리키던 지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발해에서는 이곳에 동경 용원부를 설치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해관총관부(奚關總管府)가 설치되었다가 명나라 때에는 안춘(顔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혼춘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쓰이게 된 것은 청나라 강희 53년에 혼춘협령(琿春協領)이 설치된 것이 최초이다.
  • [79] 에도시대 이전까지는 섬과 섬 사이 해역들이 늘어선 개념만이 있을 뿐,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내해를 이룬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에도 시대에도 세토우치(瀨戶內)라는 명칭은 있었지만 단순히 해역이 확장된 것일 뿐, 오늘날의 것과 그 범위가 겹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 서구의 해역(The Inland Sea)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1872년부터 비로소 세토 내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이는 1911년에 '세토내해론'으로 정리되어 20년 뒤 하나의 국립공원으로 묶이게 되었다.
  • [80] 엄밀히 말하자면 하얼빈이라는 말 자체는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만주어 토속 지명으로 그전부터 존재해왔다. 다만 이곳에 도시가 건설된 것은 1898년에 둥칭철도(東淸鐵道)의 건설에 따라 이곳이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부터의 일이고, 그전까지는 일개 촌구석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 아십하(阿什河)를 거슬러 올라가 있는 아성현(阿城縣) 일대가 이 지역의 중심이었으며, 금나라의 상경(上京) 회령부(會寧府)도 바로 이곳 아성현에 있었다.
  • [81] 물론 수밀이국이 수메르라는 견지에서 바라볼 경우에 해당한다.
  • [82] 환빠들에게 천산산맥이나 파미르고원이 바이칼호 서쪽에 있다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게 대부분의 환단고기 역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인데, 때문에 정작 이유립은 '천산=파나류산'을 시베리아 중앙 고원으로 정의내렸다. 여기에서 '파나류(波奈留)'가 우리말 '하늘'의 일본어 음차라는 것은 해동역사 제28권 방언조에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를 인용하여 실려 있다. 즉 파내류산은 뜻으로 쓰면 천산, 음으로 쓰면 하늘산인 것이다. 그런데 환빠들은 이걸 일본어로 음독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파미르에 가져다 비벼놓는다(...) 덧붙여 환국을 파내류국이라고도 했으니 환국=하늘국으로 환=하늘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 다만 이걸 한국이라고 읽지 않음은 개요에서 상술한 바와 같다. 환인의 '환'이 하늘이라는 것은 이유립의 설정일 뿐. 이것도 또 태백일사에서는 '환'을 가리켜 광명이라 말하는 대목이 따로 있다.(...)
  • [83] 사실 신채호가 20대에는 기원전 15~14세기에 고등(高登)으로부터 부여라는 이름이 시작된다고 하였고, 30대에는 이걸 취소하고 기원전 4세기에 삼조선이 분립했다고 하였는데, 환단고기에선 이 둘을 모두 가져다 쓰다 보니 생긴 문제다.(...) 참으로 졸렬하다.
  • [84]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은 1924년 경기도 시흥에 유학자 안향을 모시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을 만들고, 그곳에 명교학원을 연 뒤 조선유교회를 설립하였다. 일명 조선유학회라고도 하는 이 단체는 정만조, 정봉시, 정병조 등 친일 유교단체에서 활동했던 거물급 인사들이 요직을 맡았고, 일제협력단체사전 국내 중앙편에 수록되었다.
  • [85] 서기 1927년은 단기 4260년이다.
  • [86] 김대호, 「1910~2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신궁 건립과 운영」, 2004, 318~321쪽; 329~333쪽.
  • [87] 정작 문정창은 1923년 동래군 서기를 거쳐 경상남도 도청, 조선총독부에 근무한 뒤 1940년 충청북도 사회과주사, 1942년 황해도 은율군수, 1944년 황해도 사회과장까지 지낸 인물이다! 이에 힘입어 친일인명사전에도 오르는 화려한(?) 전적을 자랑한다. 이런 인간이 광복 후에는 "중국의 남북조가 모두 백제의 속국이었고, 이 가운데 남조 양나라의 건국자인 양무제는 본래 백제인이며, 무령왕릉의 벽돌무덤 양식은 양나라로부터 수입된 것이 아닌 백제의 문화"라는 정신나간 주장을 마구 해댄다.(...) 친일로 한 번 정신나간 사람이 환뽕으로 두 번은 못 나갈까.
  • [88] "日帝 '韓民族魂 말살' 새 事実 밝혀져", <조선일보>, 1985년 10월 4일.
  • [89] 또한 단군은 '그 관련 연대를 믿을 수가 없으므로 편년체 사서인 조선사에는 실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앞서 보았듯이 단군을 매개로 삼아 조선인의 일본 제국 내 권리 확보를 노렸던 최남선이 단군 관련 사료를 조선사에 기재하도록 주장하자, 조선사편수회에서는 편년체의 체제에서는 역사적 시간상이 불명확한 단군의 이야기를 실을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즉 일제시대의 단군 기록은 말살된 것이 아니라 인정받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 [90] 태종의 구체적인 참서 탄압은 태종실록 17년 6월 1일, 6월 6일, 11월 5일, 12월 15일의 기사에 보인다. 분명히 역사서 따위가 아닌 음양가(陰陽家)의 장서, 서운관의 참서(讖書)라고 되어 있다. 신채호가 이를 탄식하였던 것은 그것에 한민족 고유의 선교(仙敎) 사상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에서였지 역사의 소실을 안타까워 한 것은 아니었다.
  • [91] 그당시 성리학자들의 전반적 기풍이 그러했다. 왕조초기엿기 때문에 왕들이 그들의 포텐셜을 거의 한계까지 밀어붙인 까닭이다.
  • [92] 심지어 이유립은 그의 저작인 대배달민족사에서 태백일사에 실린 삼일신고를 원본 삼일신고라고 하면서 계연수가 처음으로 세상에 유포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진본 삼일신고 vs 원본 삼일신고
  • [93] 이에 따라 오형기가 1949년 5월에 환단고기를 필사했다는 것도 자연히 거짓부렁이 된다.
  • [94] 왼쪽에 示변, 오른쪽 위는 旬, 오른쪽 아래는 且. 네모 점선은 '한자 생김꼴 지시 부호'(Ideographic Description Sequences)로, 유니코드 표준이나 특정 글꼴에 존재하지 않는 한자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한자를 조합하여 쓸 때 그 위치 관계를 나타내는 부호이다.
  • [95] 이근철, 「대종교 경전으로 본 《환단고기(桓檀古記)》 진위 문제」, 106~110쪽.
  • [96] 이후 천부경은 단군교가 해체되는 1930년대까지 대종교와는 대별되는 단군교의 핵심 교리로 기능하면서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측면을 담당했고, 단군교가 해체된 이후에는 대종교 내에서 일종의 외경처럼 취급되다가 1975년에 비로소 대종교의 정식 경전 가운데 하나로 채택되었다. ... 대종교 대전시교당장 이유립의 <환단휘기>로 말미암아.(!)
  • [97] 이유립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정훈모의 단군교가 해방 이후 대종교로부터 떨어져나온 일파라면, 이기의 단학회도 삼신일체에 대한 이론 차이로 대종교로부터 갈라선 일파라고 설정되어 있다.
  • [98] 이보다 앞선 1907년 '대동역사'에서도 흡사한 인식이 보이는데, 세속오계를 선교의 종지였다고 본 점이 특이하다.
  • [99] 그보다도 애당초 작다 크다 짧다 길다는 기준이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다. 한반도가 코딱지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장 국토대장정을 떠나봐라. 확 와닿는다.
  • [100] 사실 그전부터 신채호와 대종교 측 인사들이 각종 문헌들을 뒤져가면서 자신의 교리를 완성시켰기 때문에 이유립은 이걸 보고 뒤지기만 하면 되었다.(...)
  • [101] 여담이지만, 상술한 대로 창작 이래 지금까지 환단고기 전체의 해석에서 가장 웃기는 부분. 이는 일본어로 음독해야 파내류=하나루=하늘이 되어 천산(天山)과 등치되는 보통명사가 되는데, 이걸 모르고 무작정 '파내류산'이라는 고유명사로 읽어서 중앙아시아 어드메니 파미르 고원이니 하는 온갖 비정을 다 하고 있다.(...)
  • [102] 고국원왕의 이름 소(召)와 탁발선비의 추증황제 열제(烈帝)를 이어서 고국원왕의 이칭을 '소열제'라고 오독한 것.
  • [103] 해모수가 고리국의 왕족이기에 종실이라 했다고도 하는데, 정작 해모수가 고리국의 왕족이라는 근거는 환단고기 어디에도 제시되지 않는다. 적어도 그가 고리국의 왕족이라면 그 선조는 고리국인(稁離國人)이 아니라 고리국왕(稁離國王)이라 쓰여졌어야 옳다. 게다가 단군의 왕통을 서술한 단군세기에서 밑도끝도 없이 고리국 왕족을 종실이라고 일컫는 것도 에러. 단군의 후손이 고리국에 책봉되었다는 Ad Hoc을 제시하면 되잖아. 그럼 백제왕은 고구려의 종실이냐?
  • [104] 엄밀히 말하자면 환단고기 자체를 신빙하지는 않으며, 환단고기처럼 막나가지도 않는다. 다만 환단고기가 대종교 신앙으로부터 파생된 것일 뿐.(...) 후새드.
  • [105] 얘네는 모태가 되었던 '환단고기'도 버리고 운영자가 가지고 있다 카더라는 '연사'라는 사료를 내세워서 설정놀음을 한다. 이건 뭐 주체사상도 아니고.
  • [106] 역사학자긴 하지만 고대사와 조선후기사 관련 서적에 음모론을 넣거나 검증되지 않은 설을 주장하면서 타락한 예. 전공인 일제시대 관련 서적이나 손댈 것이지.(...)
  • [107] 환단고기의 내용을 소설에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그를 소재로 소설을 썼었지만, 나중에는 "소설가로서 가설로 제시"한 것 뿐이라면서 빠져나갔다.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판타지 소설로 발표해서 저작권료를 받았어야 하는데.
  • [108] 환빠는 아니지만, 애초에 역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서 이 책의 내용을 정사인 양 삼국유사나 맹꽁이 서당에 사용한 경우가 있다.
  • [109] 만화 천국의 신화가 대표적